# 222
222화
민사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은 퉁명스러웠다. 아마 수많은 일거리에 치이고 있어 그런 것 같았다.
“자, 거기 서십시오. 찍습니다?”
“예!”
사진기를 들고, 그는 펑 하고 플래시를 터트렸다. 몇 번이나 해 봤는지 사진기를 다루는 손놀림이 제법 익숙했다.
“에… 신부는 신랑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신랑도 그렇죠? 자, 여기 도장 찍으십시오.”
“예!!!!”
니콜라이는 참지 못하고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옆에서는 카티아가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그의 손을 꼭 잡은 카티아는 먼저 펜을 잡아 슥슥 서류에 사인을 해 내려갔다.
가족들이 모두 함께 모여 친지들의 축복하에 서로를 맞이하는 거대한 의식은 아니었지만, 카티아의 태도는 짐짓 경건했다. 니콜라이는 어쩐지 미안해졌다.
“카티아, 미안… 사정이 좀….”
빠르게 새 임지로 부임하기 위해서는 먼저 관사를 신청해야 했다. 그리고 관사는 미혼자용과 기혼자용이 나뉘어 있었는데, 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일단 결혼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일생일대의 의식을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치러야 했다.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을 공무원의 귀찮은 듯한 주례하에서 그저 대충 넘겨 버려야 하다니!
하지만 카티아는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
그렇게 방긋 웃은 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니콜라이의 뺨에 입을 맞췄다.
급하게 빌려 온 양복의 목은 영 그에게 맞지 않았다. 꽉 조이는 넥타이 때문에 몇 번이고 목께를 매만진 니콜라이에게, 공무원은 우습다는 듯 툭 던졌다.
“기분 좋습니까? 나도 한땐 그랬지요.”
“예? 하하하하하하하….”
“요새는 전쟁이 끝나서 그런지 하루에도 몇 명씩이나 이렇게 결혼을 하러 오더군요.”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다들 고향으로 돌아와 밀린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집을 수리하는 따위의 일들은 당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밀어붙여 끝내고 있었다. 흐루숍카 수천 채가 전국 각지에 세워지며, 집으로 돌아간 귀환병들은 졸지에 뒤바뀐 집을 찾느라 한참을 헤매야 했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들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결혼이었다. 사랑하지만 전쟁 때문에 떠나가야 했던 연인들이, 전쟁터에서 만난 인연들이, 혹은 바뀌어 버린 고향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이 결혼을 했다.
“다들 그렇게 웃고 있던데… 하하하하, 하하하….”
“하하핳, 저희는 행복하게 지낼 겁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나도 한때는 그랬다니까요?”
지친 유부남의 면모를 한껏 드러낸 담당 공무원은 다시 자리에 앉아 결혼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니콜라이는 하얀 면사포를 쓰고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카티아를 바라보았다.
꽉 잡은 그녀의 손에는 니콜라이가 애써 장만한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자! 이제 가자!”
* * *
요사이 당에서는 신혼부부에게 다양한 혜택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었던 터라 인구 증가를 위해 각종 조치들이 취해졌다. 예컨대, 니콜라이와 카티아 같은 신혼부부들에게는 주택과 신혼살림을 위한 가구 공급에서 우선권이 주어졌다.
물론 새살림을 차리는 데 들어가는 적지 않은 비용을 생각해 보면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아… 여전히 휑하네.”
“그래도 얼마 안 있을 거니까!”
함께 돌아온 작은 흐루숍카에는 둘만의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카티아가 친정집에서 가져온 작은 양철제 찻주전자는 난로 위에서 팔팔 끓고 있었다.
부부를 위한 침대,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안락의자, 식탁과 의자 서너 점. 그리고 작은 탁자.
장교 월급을 저축하기는 했어도, 끽해야 1년 치를 저축한 것으로는 사실 턱도 없이 모자랐다.
신혼부부에 귀환장병을 위한 혜택을 이중으로 받고, 또 인민영웅인 니콜라이의 당원증까지 보여 주고서도 이 정도였다. 물론 다른 부부들은 이것만도 못한 상황에서 시작할 테니 불평할 수는 없었다.
“하나하나 모으면 되는 거지… 당신 월급이 적지도 않고.”
“그런가? 하하하….”
대위 정도쯤 되면 월급이 적지는 않았다. 빠르게 승진해서 대령이나 장군쯤 되면 제법 유복한 삶을 꾸릴 수 있을 것이고.
니콜라이는 작고 휑한 이 아파트를 쭉 둘러보았다.
“난 텔레비전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어. 여기에는 텔레비전을 두고… 이것보단 조금 더 큰 안락의자를 사는 거지.”
“후후, 그러면 좀 오래 모아야 할 텐데?”
“하하하하, 그러니까. 어디서 당첨이나 되면 좋겠다.”
“난 텔레비전이 없어도 좋아. 나가서 극장에 가는 게 좋지 않아? 니콜라이?”
카티아는 안락의자에 앉아 발을 달랑달랑 흔들며 까르르 웃었다. 카티아는 극장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요새 새로 공개되는 영화들은 수도 많았거니와 인민들을 위한 복지 차원에서 거의 무료에 가까운 가격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당연히 휴일이나 저녁에 연인, 혹은 가족과 오붓한 한때를 즐기러 나온 인민들로 가득 차 북적거렸다.
그런 북적거림마저 카티아는 즐기곤 했다.
“그럼 지금 갈까?”
“그래!!”
신혼여행은 당장은 어려웠다. 당에서는 새로 결혼한 부부들을 위해 휴양여행을 공짜로 보내주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철도편이 아직은 모자랐다. 니콜라이와 카티아 역시 대기표를 뽑아 두고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레닌그라드나 세바스토폴 같은 곳에서는 여객선을 타고 발트해, 흑해 크루즈를 보내준다고 하는데, 모스크바 같은 내륙도시에서는 그런 것은 어려웠다. 물론 신혼부부가 즐길 만한 것이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경사스러운 날에 신부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게 자못 미안했던 니콜라이는 청명한 하늘이 고마웠다.
파란 하늘, 흰 구름에 기분이 좋아진 듯한 카티아는 어린 사슴이 깡총깡총 뛰듯이 먼저 걸어 나가 니콜라이에게 손짓했다.
“빨리 와~! 느림보!”
“하하하하! 갈게!”
극장은 제법 가까웠다. 아니, 그냥 극장이 상당히 많았다.
흐루숍카나 군용 막사 같은 것을 조립하는 것처럼 건설기술자들은 뚝딱뚝딱 백여 명이 들어갈 정도의 건물을 조립했다.
당 집회장으로도 쓰이고, 소비에트 회의나 콤소몰의 수련회 같은 것에도 쓰일 수 있는 이 건물은 평소에는 주로 극장으로 쓰였다. 적당히 널찍한 공간에 의자를 쫙 채워 두고 흰 스크린에 영화를 틀어 주면 그게 극장이 아닌가?
“아, 오늘은 이 영화네?”
“그러게. <모스크바의 휴일>? 어? 미국 건데 왜 모스크바의 휴일이지?”
“글쎄… 이거 재밌다고 했는데!”
카티아는 극장 관리인에게 통통 뛰는 발걸음으로 다가가 손가락 두 개를 쫙 펼쳐 보였다.
“표 두 장이요! 그리고 팝콘 제일 큰 거랑… 콜라 두 개 주세요!”
“예! 다 합쳐서 7코페이카입니다.”
인자한 얼굴에 흰 수염을 기른 관리인은 뒤로 걸어가 큰 통에 팝콘을 가득 담고, 얼음통에 담가 둔 콜라 두 병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영화는 10분쯤 있다가 상영할 겁니다. 콜라병은 나가면서 저기 보이는 상자에 담아 주시지요.”
“네, 감사합니다.”
으, 이 단맛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카티아가 자기 몸통의 반 정도는 되는 거대한 팝콘 통과 씨름하는 동안 니콜라이는 콜라병을 툭 따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다 먹을 수 있을까?”
“그럼!”
음, 짜릿해. 바로 이 맛이야.
미국제 코카콜라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니콜라이는 마치 전율할 것만 같았다. 소련에서도 이와 비슷한 ‘바이칼’이라는 음료를 만들어 팔아 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솔직히 별로 맛이 없었다.
짜릿한 탄산의 맛도 덜했고, 기묘한 향이 섞여 있었다. 콜라에 이미 적응해 버린 소련인들은 아무튼 미제 콜라를 훨씬 좋아했다. 특히, 밤낮으로 미제 물건을 먹고 마셨던 전역장병들은 더더욱.
카티아는 팝콘을 와작와작 먹으며 영화가 상영되기만을 기다렸다.
“난 군대에 있을 때는 영화 볼 때가 제일 좋았어.”
“아, 나도 솔직히 그랬지.”
후방에 간호병으로 종군하던 카티아와 최전방 소총병 부대, 혹은 전차부대에 있었던 니콜라이에게 영화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니콜라이에게 영화부대가 온다는 것은 후방으로 빠져 재편성에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오래고 고된 전투 끝에 다가온 휴식. 이제 막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지금이 딱 그런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에겐 이제 든든한, 영원히 함께할 아군이 하나 있었다.
니콜라이가 카티아의 가느다란 허리에 팔을 두르자, 카티아는 니콜라이를 보며 눈웃음을 치더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영화 시작한다!”
* * *
<모스크바의 휴일>은 제법 재미있었다.
저기 네덜란드 출신의 어느 어린 여배우와 미국인 남자 배우가 대체 왜 모스크바에서 영화를 찍는지, 니콜라이는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주인공은 루마니아로 추정되는 어느 왕국의 공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어린 공주가 위장 NKVD 요원을 만나서 모스크바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내용이었다. 그 NKVD 요원은 상부의 명령 때문인지 공주를 감시하며 채증을 하려 했으나 결국 포기하고 서로 애정을 품게 된다는 줄거리에 카티아는 감동한 것 같았다.
“어머… 어쩜….”
니콜라이는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를 보다 영화 스크린을 보았다.
“으음… 잘생기긴 했네.”
그 미국인 배우는 미남이었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중후한 목소리와 남자다운 얼굴선, 짙은 눈썹은 여심을 흔들 만도 했다.
신사다운 몸짓으로 여주인공을 이끌어 붉은 광장에서 손을 잡고 춤을 추다가 해가 지자 작별을 고하는 주인공을 보며 다들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응? 니콜라이? 뭐라고 했어?”
“아니, 그… 저 배우 참 잘생겼다고.”
“내가 보기엔 네가 더 잘생겼는데? 히힛.”
카티아는 그렇게 꺄륵 웃고는 다시 스크린에 집중했다. 니콜라이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난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아.”
“나두….”
스크린 안에서 두 주인공이 입을 맞추는 순간, 니콜라이는 카티아를 바라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고, 곧 눈을 감았다.
“에그, 망측시러라….”
뒷자리에서 웬 아주머니의 핀잔이 들려왔지만, 솔직히 신혼부부는 그런 것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팝콘 때문인지 어쩐지 짭조름한 정도나 신경이 쓰였을까?
아무튼 영화가 끝나고, 두 신혼부부는 팔짱을 끼고 걸어 나왔다.
“와! 재미있었다!”
“하하하하, 그러게. 나중에 또 와도 좋을 것 같네.”
이런 시간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둘이 나른하고 즐거운 오후의 한때를 즐기며 나들이를 하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행복한.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니콜라이는 군인이었고, 전장은, 혹은 어딘지 모를 임지는 그를 부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잘 살아남았더라도 언젠가 눈먼 총알에, 포탄에 맞아 전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에 충실하자. 니콜라이는 몇 번이고 그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카티아, 다음엔 어디로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