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221화
“미국에 좀 더 지원을 요청할 수는 없겠나…?”
“미국은 현재 난색을 표하고 있습니다, 각하. 식민지에 대한 무단 강점은 더 이상 용납되지 못할 것이라며….”
“그 미개한 놈들이 어떻게 독립 국가를 꾸린단 말인가! 팔레스타인 좀 보라고 해. 우리가 빠지니 바로 서로 쏴 죽이기 시작한 것 아닌가!”
전쟁은 끝났지만, 영국은 전쟁을 끝낼 수 없었다.
유럽에서의 대전, 즉 군대와 군대가 맞붙는 거대한 야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구 독일 공화국들은 군대가 해체되었으며, 소련마저도 수백만에 이르던 대육군을 절반 이하로 줄여 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외려 영국만은 국방투자를 줄일 수 없었다. 식민지인들은 무기를 들고 대거 봉기를 일으켜 대영제국의 근간을 흔들었다.
성급히 개입했다가 큰 코만 다친 인도네시아 식민지에서는 바로 옆의 말레이시아 식민지들을 슬금슬금 선동하고 있었다. 잠시 총성은 멎었지만 네덜란드는 결코 순순히 인도네시아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기에 또 한 번의 피바람이 예정되어 있었다.
인도에서는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불순분자들이 각지에서 주둔군과 친영파 인사들을 습격했다. 그리고 중동에서까지 유태인들과 아랍인들이 서로를 쏴 죽이기 시작했다.
“젠장… 포르투갈에서는 뭐라던가?”
“…인도의 독립은 자기네들도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놈들이 안 좌시하면 어쩔 건가. 그렇지?”
그나마 세계에 식민지를 가진 영국은 손을 내밀어 볼 동료들이 몇몇 있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진 네덜란드와 협력해 볼 수 있었다. 인도와 남아프리카에서는 고아와 앙골라에 식민지를 가진 포르투갈과 연합전선을 구성했고.
물론 전쟁에 짓밟힌 영국에 비해서도 국력이 훨씬 부족한 두 나라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식민지 문제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미국의 도움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현 상황에서 그만한 국력을 갖춘 국가는 미국뿐이었기에. 하지만 미국은 자기네들이 그 모든 땅을 다 독점해 버릴 속셈인지 한 발짝 떨어져서 불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은 영국의 곤경을 즐기며 봉기하는 식민지인들 뒤에서 음흉하게 웃고 있었고.
“스페인 친구들에게도 레굴라레스(모로코인 외인부대)를 고용하고 싶다고 해 보게.”
“그… 미국이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빌어먹을! 미국이 돈줄을 쥐고 있다고 그놈들이 우리 상관인가!”
“….”
구 추축국, 즉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가한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대한 처우는 가혹했다. 미국은 억 소리 나는 원조금액을 전후 재건에 퍼부어 주면서도 두 나라에 대해서는 돈줄을 죄었다.
그런데 영국이 스페인과 짝짜꿍을 한다면? 미국이 스페인으로 가는 돈줄을 죄기 위해서라도 영국 몫을 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도 한계는 있었다.
“미국 놈들이 우리 없이 소련과 비벼 볼 수나 있을 것 같나? 우리가 무너지고,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무너지고, 포르투갈은 있으나 마나. 덴마크? 저지대 국가들? 스웨덴? 그놈들도 매한가지지. 유럽이 모조리 뻘겋게 물들면 나머지 세계는 무사할 것 같나?”
“….”
“소련의 야욕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야! 구대륙 전체가 적화되는 것을 우리가 막고 있는 거라고!”
이든은 그렇게 외치며 방방 뛰었다.
또 도미노 이론이었다. 가장 견고한 방파제이자 세계 제3의 강국인 영국이 붕괴한다면, 서유럽의 자유는 안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서유럽이 넘어가면 서유럽 식민지들은 연쇄적으로 적화될 것이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구대륙이 모두 소비에트의 붉은 깃발 아래 신음하게 될 것이다.
“소련의 꼭두각시들이 된 나라들에, 미국이 제멋대로 수출이나 할 수 있겠나?”
“그… 미 국무성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든은 입을 딱 벌렸다. 외교보좌관은 담담하게 보고서를 보여 주었다.
“이미 소련이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액수는 천문학적인 수준입니다. 미국의 가장 큰 수출상대가 바로 소련입니다! 이러니 양국이 이렇게 서로 밀월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듯합니다.”
“….”
미국은 전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호황을 즐기고 있었다.
죽은 루즈벨트가 맺은 합의로 인해, 핵무기의 대가로 소련에는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자금이 흘러 들어갈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스탈린은 이 자금의 일부를 프랑스, 유고, 루마니아 등 위성국의 복구 자금으로 뿌리기는 했지만 대다수는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아니, 되돌아갔다고 하기에는 애초에 그 달러들이 대양을 넘어오지를 않았다.
대부분의 원조금액은 미국의 공장들로 직행해 현물 형태로 소련에 들어왔다. 미국에서 새로 생겨나 귀환병들이 취직한 일자리들의 상당수는 이렇게 소련에 수출할 물건들을 만들어 내는 자리였다.
이러니 미 정부가 소련과 거리를 두려야 둘 수가 없었다. 가장 큰 소비자이자 경기부양을 지탱하는 핵심축인 소련을 어떻게 버리겠는가?
차라리 막대한 빚만 지고 계속 연대보증을 요구하는 영국을 버리는 게 나았다. 영국이 아무리 소련은 음흉한 의중을 숨긴 나쁜 놈들이라 우겨도 당장 먹기에는 곶감이 단 법. 소련처럼 멋들어진 선물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요, 자꾸 젊은이들의 생목숨만 요구하는 영국이 곱게 보일까.
“끄응….”
이든은 도무지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죽은 처칠의 인기에 기대는 것도 한두 번이지, 보수당 정권은 지금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인도, 인도네시아, 중동, 그리고 슬슬 불이 붙기 시작하는 아프리카 식민지들까지!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한 시민들은 철없이도 더 나은 삶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대영제국은 다시 위대해져야 했다.
“후… 일단 추가 파병 건은 계속 진행하게!”
이게 다 영화 때문이다! 이든은 그렇게 투덜댔다.
세상이 녹록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미디어’들에서는 너무 달콤하고 호화로운 삶의 모습들만 틀어 주고 있었다.
특히, 저 헐리우드의 양키들이 만들어 팔아먹는 영화들에서는. 미국 영화들에서 나오는 멋지고 아름다운 배우들, 번영하는 소비도시들을 본 시민들은 영국의 칙칙함과 아직도 실시되는 배급제 같은 불가피한 일들에도 반감을 가졌다.
그렇다고 당장 검열을 걸어 버릴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헐리우드가 무슨 난리를 칠까!
* * *
“오… 이게 다 우리 거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이제 세상은 내가 아는 역사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덜 변할 만한 것들이 몇 개는 있었다. 예컨대, 석유가 묻혀 있는 매장지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 땅 위의 국가는 달라질 수 있을지언정.
또, 사람들도 변하기는 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일개인의 행보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공화당으로 간 트루먼이나, 소련에 약점을 잡힌 후버처럼.
하지만 보편적인 감각, 예술에 대한 감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원래 예술가로 대성할 사람들은 바뀐 세상 속에서도 자기들의 재능을 뽐냈다. 영화 <카사블랑카>는 영프의 조기 퇴장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험프리 보가트나 잉그리드 버그만 같은 배우들은 인기를 얻어 스타로 한창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를 명령했다.
“흠, 자금은 더 밀어줄 테니, 영화사들을 좀 더 인수해 보게. 예컨대 이….”
보고서에는 몇 가지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MGM, 파라마운트 픽쳐스와 유니버셜 픽쳐스, 이런 데. 여기 지분을 좀 더 사 올 수는 없겠나?”
“가능할 것입니다, 서기장 동지.”
“좋아. 아주 좋아.”
새삼 흡족했다. 이 맛에 그렇게들 재벌이 되려 하는 거였나?
나는 물론 재벌은 아니었지만 자금 하나는 썩어 넘치도록 많았다. 나치 놈들이 숨겨 두었던 엄청난 양의 금괴를 바탕으로, 우리는 조금씩 돈세탁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렇게 세탁한 돈으로 미국에서 각종 자산들을 매입했다. 정치국원들은 핵심 기술을 가진 기업들을 사 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그건 너무 위험했다. 차라리 이렇게 할리우드에 투자하는 것이 나았다.
괜히 소련이 자기네들이 준 돈으로 산업스파이 노릇을 한다는 게 걸리면 미소관계가 어떻게 파탄 날지 몰랐다. 그러느니 미래인의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가 나았다.
“자네들도 미디어의 힘을 잘 알지 않나?”
“그렇습니다! 역시, 서기장 동지의 안목은 대단하십니다!”
판에 박힌 아부이기는 했지만, 안목이 대단해 보일 수도 있었다.
“그게 별건가. 아무튼 배우들도 입도선매해 보도록 하고.”
흘러넘치는 자금으로 할리우드에 침투한 우리가 뭘 했느냐고? 간단하다.
영화를 만들었다!
<레프 일병 구하기> 같은 영화는 미국에서도 제법 히트를 쳤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고전영화들의 플롯을 바탕으로 헐리우드의 제작사들에서는 각종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벤허>, <사랑은 비를 타고>, <지구 최후의 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같은 쟁쟁한 영화들을 이제 우리 소유의 제작사들에서 찍어 낼 것이다.
물론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영화는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드는 힘이 있었고, 우리는 이 힘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작정이었다.
“프로파간다를 너무 노골적으로 할 필요는 없네. 다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자네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꼭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할 필요는 없었다. 최소한, 그 곁다리에서 가만히 암시만 해도 좋았다. 어차피 제작사들을 여러 개씩 가지고 있는 만큼 여러 영화들에서 분리해서 말해 주어도 좋았고.
예컨대, 미국의 인종차별을 비판하기 위해 한 영화에서 모든 것을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어떤 영화는 ‘미국 내부에서의 흑백차별’을 비판하고, 다른 영화에서는 ‘소련 내의 인종평등’을 보여 주는 방식이어도 좋았다.
어차피 다 우리 입김이 들어가니까!
프로파간다에 도가 튼 우리 문학가들은 열심히 각종 작품들을 기획해 내고 있었다. 정부는 얼마든지 소설가들, 영화인들, 그리고 극작가며 시인들을 후원해 주고 있었고, 운만 좋으면 명성을 떨칠 수도 있었다.
“이… 미묘한 경계가 있네. 불쾌감과 의문 사이의 그 경계 말이네. 그걸 넘지 않는 게 중요해.”
물론 실제 역사에서처럼 예술성마저 거세한 노골적인 선전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자본주의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갈 사람들에게 그런 단순한 방식은 먹히지도 않을뿐더러, 불쾌감만 자아내기 십상이었다.
영국인들처럼 불만에 빠진 사람들에게 먹힐지는 몰라도, 미국인들처럼 한창 황금기를 누릴 사람들에게는 그랬다.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목표는 그 정도였다. 폭발적으로 발달할 미디어 시장 속에 미리 들어가 자리를 잡아 두는 것. 프로파간다로서든, 아니면 황금알을 낳아 주는 거위로서든, 아무튼 매스미디어의 시대가 온다면 그 안에 자리 잡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