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220화
전쟁은 처음에는 사소한 충돌에서 시작되었다.
“에잇…!”
한 꼬마아이가 힘껏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는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구르던 돌은 툭 하고 누군가의 군홧발에 가 닿았다. 군용 조끼를 입고, 소총을 들고 정착촌 입구를 지키던 유태인 민병은 발치에 굴러온 돌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어….”
“이 빌어먹을 ‘고임(이교도)’ 같으니라고….”
성큼성큼 걸어온 민병 청년은 도망가려는 꼬마의 뒷덜미를 콱 잡아 들어 올렸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개 같은 새끼!”
퍽, 두터운 손바닥이 아이의 얼굴에 닿자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입술이 터졌지만 몇 마디 주워들은 욕설을 내뱉었다.
“지옥에 갈 새끼, 독사의 자식….”
퍽, 퍽. 청년은 그때마다 아이의 뺨따귀를 세차게 갈겼다.
이 지역은 유태계 정착촌이 새로 건설된 곳 중 하나였다. 기존에 있던 팔레스타인인들은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군사적으로 훨씬 경험이 많은 유태계 민병조직은 그들을 격퇴하고 정착촌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꼬마의 아비와 형은 그때 죽었다. 민병 청년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애초에 그는 신성한 유태인의 왕국에 사는 이교도들이 몇이나 죽어 나가든 개의치 않았다.
“흐윽… 흡….”
코피가 터지고 이가 부러져 피가 나는 바람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아이를 질질 끌고 청년은 정착촌으로 들어갔다.
“어이! 밧줄 가져와 봐!”
* * *
“개… 같은 새끼들….”
“이스마일은 정신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그놈들은 밧줄로 이스마일을 기둥에 묶어서….”
마을의 아이가 야밤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 때문에 온 사방을 뒤지다 들어온 이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유태인이 우리 아이를 납치했다!’
그들 때문에 물이 있는 개천으로부터 멀리 밀려난 팔레스타인인들은 실추된 명예와 손상된 자존심, 그리고 원한 때문에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80 먹은 노인부터 이제 막 말을 뗀 아이들까지 유태인을 증오하지 않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납치까지 하다니! 마을 사람들은 분노로 끓어올랐다.
“당장 저 개새끼들을 몰살시켜야 합니다! 이스마일을 구해 와야 합니다!”
“아서라, 마흐무드. 그게 바로 저놈들이 바라는 바일 거다.”
빠드득, 마을 청년들은 소총을 세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장로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대놓고 납치해 간 아이를 전시해 놓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덤벼 볼 테면 덤벼 보라, 덤비는 대로 족족 다 죽여 주겠다는 소리겠지.
지난 이십여 년간 유태인 정착자들과 싸우며 그들의 수법에 익숙해진 장로는 청년들을 말려야 했다. 젊은 막내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그는 외다리로 일어섰다.
“내가… 내가 가도록 하지.”
“예? 장로님이 가시다니요! 저놈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나는 너무 오래 살았어.”
젊은이들은 다 같이 합죽이가 되었다. 노인의 아들이자 이스마일의 아비는 얼마 전에 유태인들과의 총격전에서 살해당했다.
젊어 죽는 일이야 가혹한 사막의 삶에서는 다반사라지만, 아들을 먼저 보낸 장로는 그때부터 살아도 산 게 아니라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내 손자고, 내 아이일세. 내가 가서 구해오도록 하지.”
“장로님….”
“그리고… 그 외지인들이 준 걸 가져오도록 해라.”
‘외지인’. 유태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매일같이 총격전을 벌이는 이 땅으로 찾아오는 외지인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주고 가는 것은 단순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야 얼마든지 자급자족이 가능했지만, 총화기 같은 문명의 이기들은 외지인들에게서 사야 했다. 물론 요새는 영국인이나 미국인들은 오지 않고, 저기 북쪽의 소련인들이 와서 공짜로 주고 가기 시작했지만.
“….”
“울지 말거라. 갈 때가 되어 가는 것뿐이다.”
장로는 이제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젊은이들을 진정시켰다. 이 창창한 젊은이들은 살아야 했다.
그리고 언젠가 이 땅이 온전히 아랍인들의 것이 된다면, 그때는 그도 천국에서 편히 쉴 수 있으리라.
* * *
“그래서, 인질을 바꾸자는 말인가?”
“그렇네. 아이가 다쳤으니, 나를 대신 잡아 두고 아이는 놓아 주게.”
“흐음….”
유태인 정착촌의 울타리 앞에서, 양측은 백기를 들고 만났다.
화려한 유목민식 전통예복을 입은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절뚝절뚝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태인들은 고심했다.
‘이 새끼들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
아이를 공개적으로 보여주며 도발을 하려 했으나, 이들은 도발에 걸리지도 않고 오히려 대낮에 협상을 청했다. 항상 복수에 눈이 멀어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미개한 아랍의 풍습과는 영 달랐다.
정착촌의 촌장은 짧은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진짜 아이를 데려가려는 건가? 어차피 인질을 잡아 두고 습격을 방지할 수 있으면 이쪽이 이득이다. 보아하니 마을의 장로격 되는 노인인 듯한데 꼬마애보다도 인질로서의 가치는 높을 수도 있었다.
“좋다! 데리고 가라!”
“….”
노인을 부축해 따라왔던 청년은 한낮의 땡볕과 한밤의 추위 아래서 혼절한 아이를 조심스레 안아 들고 뒤로 돌아 마을 사람들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양편은 총을 겨누고 혹시 상대편이 수작을 부리지 않는지 경계했다.
하지만 청년이 아이를 데리고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 때까지, 팔레스타인인들은 그저 노려볼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하, 밸도 없는 새끼들. 노인네! 당신은 저기로 들어가!”
좀 성급한 유태인 청년은 총구를 내리고, 아랍인들을 낄낄 비웃었다. 장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마을 안으로 떠민 그는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깡마른 팔목이나 후들거리는 다리와 달리, 노인의 어깨는 예상외로 두툼했다.
마치 안에 뭔가를 껴입은 것처럼. 유목민식으로 친친 감은 것일까?
청년의 눈에 떠오른 의아함을 본 장로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말이 통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생각은 어찌나 이리 비슷한지.
이쪽을 돌아보며 뭐라뭐라 말을 걸어오는 유태인 촌장에게, 장로는 한 발짝 더 걸어갔다.
“알라후 아크바르.”
“뭐, 뭐라는 거야…?”
쾅!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노인의 옷 안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유태인들 위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총알이 쏟아졌다. 그들 역시 외쳤다.
“알라후 아크바르! 이것은 지하드(聖戰)다. 침략자들을 몰아내자!”
“와아아아아아!!!!”
소련인들로부터 유통해 온 무기들이 불을 뿜었다. 물론 소련인들은 폭탄을 이렇게 사용할 줄은 몰랐겠지만, 장로의 자폭공격은 유태인들의 대열 사이에서 터져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아… 아아악….”
팔 한 짝이 날아간 민병대 청년은 쇼크에 빠져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한 차례 총알을 퍼붓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쓰러진 유태인들 사이로 돌격했다.
“죽여라! 죽여라! 저 악랄한 자들을 모두 죽여라!”
“응, 응사해라! 비상! 비상! 악귀 같은 이교도 새끼들이 온다!”
서로가 서로를 악귀라고 부르는, 처절한 격돌이 시작되었다. 총탄이 떨어지자 대검을 가슴팍에 박아넣고, 도망가는 이의 뒤통수에 납탄을 쏴 갈기는.
아직 솜털조차 채 안 가신 열너댓 살짜리 소년에게도 자비는 없었다.
“어머니….”
소년은 어미를 찾았지만, 눈이 시뻘게진 팔레스타인 청년은 버르적거리며 기어가는 소년의 다리를 꾸욱 밟았다.
허벅지에서 피를 줄줄 흘리던 소년은 비명을 질렀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팔레스타인 청년은 그 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끽해야 열 살이나 된 아이를 혼절하도록 두들겨 패서 바깥에 묶어 둔 유태인 놈들은 살려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개새끼들!”
탕! 소년의 몸부림이 멎었다.
교전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초반에 가해진 자폭테러 때문에 지도자가 죽은 데다가 다수가 부상당한 유태인들은 결국 모두 살해당했다.
마지막까지 살아 있던 유태인 청년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여자와 아이들은… 안 ㄷ….”
* * *
“서안 지구 근처에서 정착촌이 습격당해 불태워졌다고 합니다. 생존자는 아무도 없다고….”
“뭐? 이 개새끼들이!”
“지금 보복작전에 나서야 합니다!”
유태계 무장조직들은 습격당해 파괴된 정착촌의 소식이 알려지자 보복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야만적인 아랍인들은 여자와 아이들마저 남기지 않고 모두 납치하거나 살해했다더라!
그곳에 널린 참혹한 시신들을 본 민병대원들은 그렇게 묘사했다.
“갈가리 찢긴 시신들을 들개가 뜯어 먹고 있었습니다…. 제 평생, 그렇게 참혹한 광경은 아우슈비츠 이후로는….”
“크흑…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과격한 청년들은 바로 무기를 들고 근처의 팔레스타인 마을을 습격했다. 그리고 똑같이, 아무도 남기지 않았다.
그동안은 땅을 빼앗기 위하여, 개천이 흐르고 샘물이 있는 곳을 빼앗기 위하여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전쟁’은 이제 점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알라시여! 맙소사! 유태인 놈들은 이제 우리를 다 죽여 없애려고 합니다!”
“저들이 우리를 죽이기 전에 우리가 저들을 죽여 버려야 합니다.”
“신이시여… 신이시여….”
보복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끝나지 않았다.
마을 하나가 습격을 당하면, 반대편에서는 마을 서너 개를 습격해 불태우고 약탈했다. 마을이 습격당한 데에 대한 보복으로 또다시 이번엔 마을 주민 모두를 살해했다.
“복수다! 우리 가족과 형제의 복수다!”
양편은 똑같은 말을 하며 똑같이 서로를 쏘아 댔다. 그리고 전혀 무관하던 이들조차도 점점 복수의 고리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우리가 뭘 했다고!! 왜! 왜 이러는 거야!”
“내 형제의 복수다! 저들이 우리 동포들을 모두 죽였다! 죽여라!”
유태인들에게 형제가 죽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유태인이라면 그 누구든지 머리통에 납탄을 박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족이 학살당한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인이라면 거리낌 없이 학살을 선택했다.
수십 년간의 울분과 원한이 일시에 끓어 넘치기 시작했다.
분쟁을 멈추어야 할 이들은 분쟁을 멈추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럴 힘이 있는 자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두 민족의 문제는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터라 우리가 손을 대기에는….”
“각 민족들은 어디까지나 자기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야 하지요! 오, 그렇습니다. 우리 대영제국은 민족자결의 원칙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자결이라는 것이 쉽지 않은 만큼 성숙한 태도로….”
식민지 문제에 대한 고담준론이 오가는 와중에도 전쟁은 점점 확산되었다.
팔레스타인 방위군과 유태인 민병대 ‘하가나’는 결국 동포들을 지키기 위해, 죽어 나자빠지지 않기 위해 총을 들었다.
“이는 우리 민족을 지키는 성스러운 전쟁입니다. 알라후 아크바르!”
“이스라엘 땅은 유태인이 태어난 곳입니다. 우리의 땅에서 강제로 쫓겨난 이후 우리 민족은 세상을 떠돌았으나 이제 돌아와 고향에 정착하려 합니다. 신이여 우리를 지키소서!”
“와아아아아아!!”
걷잡을 수도 없이 전장의 충돌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전쟁의 불길은 오히려 전 세계로 퍼져 더 격렬히 타올랐다. 수천만, 수억 민중의 삶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