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219화
“저 빌어먹을 새끼들은 참 뻔뻔하군그래.”
소련 대표단은 새로 창설되는 국제연합의 조인식에서 발언하는 영국 대표단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영국측 대표는 막 자기네들이 겪고 있는 ‘곤란’에 대해서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있었다.
“중동의 이 문제는 실로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저희 대영제국은 더 이상 이 지역의 분쟁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국제연합의 적절한 중재와 개입을 바랍니다.”
“입만 열면 혐오스러운 소리가 저렇게 쏟아져 나올 수가 있나? 자기들이 해 놓고….”
그들은 신사적인 에티켓이며 태도로 스스로를 포장했다. 하지만 그동안 저질러 온 것을 그 간드러진 말투로 돌려 이야기하면,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더 분통이 터지곤 했다.
“이중계약을 해 놓고 이걸 국제연합에 떠넘기다니!”
영국이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핵심 식민지인 인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수에즈 운하가 반드시 필요했다. 수에즈 일대의 지배권이 흔들린다면, 몇만 킬로미터를 더 항해해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을 빙 우회해야 했으니.
그리하여 수에즈 운하 인근 팔레스타인을, 영국은 어떻게든 ‘안정적으로’ 관리하고자 했다.
문제는 이곳에 이해관계가 얽힌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오!”
가장 먼저, 디아스포라 이후 전 세계로 흩어진 유태인들이 있었다.
원래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민족으로 기독교 세계에서 박해당하던 유태인들은, 근대에 들어서 민족주의의 열풍 속에서 전 유럽 민족들의 증오를 한 몸에 사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알프레드 드레퓌스가(알자스―로렌 출신에 독일계라는 배경도 있었지만)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박해를 받았다. 나치 독일은 유태인에 대한 증오를 전 유럽에서 선동했고, 또 그들을 잡아 죽이는 것을 실천에 옮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학살에 협조한 이들은 가장 놀랍게도 그 지역의 주민들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땅에서 살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민족의 고향만이, 우리가 떠나온 그 땅만이 우리의 새로운 터전이 될 것입니다.”
포그롬이라는 이름으로 유태인을 박해해 온 유럽인들은, 나치가 찾아와 네 이웃을 밀고하라 했을 때 기꺼이 그 요구에 협력했다.
동유럽에 퍼져 있던 수백만 유태인들이 결국 이렇게 죽었다. 독일에서 60만, 폴란드에서 200만, 소련령에서도 50만 등, 각지에서 이웃인 줄 알았던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또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유태인들을 팔아넘겼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들은 유태인들만의 독립국가를 요구했다.
저 팔레스타인 땅에.
“하! 그 땅은 우리가 적어도 천 년 전부터 살아온 땅이오. 야금야금 가장 비옥한 토지를 차지하고 우리를 몰아내 놓고는 이런 협상안을 제시하다니!”
하지만 그 땅의 원주민이라 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유태인들의 독립국가 요구를 거부했다.
영국은 유태인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또 아랍인들에게도 같은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을 믿고 오스만을 몰아낸 아랍인들은 이제 와서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유태인들은 영국이 이 땅을 자기네들에게 줄 것을 약속했다며 팔레스타인 땅에서 알박기를 시도했다. 동유럽을 등지고 도망쳐 온 수만 명이 또 추가적으로 유입되어 팔레스타인인들의 영토를 점점 잠식해 나갔다.
“그리고 성지 예루살렘은 마땅히 두 종교가 최소한 공존할 수 있어야 하오. 당신네들만의 땅이 아니오!”
“예루살렘은 우리 유태인들이 건설한 도시요. 당연히 우리의 적법한….”
“그건 2천 년 전 이야기겠지!”
팔레스타인 문제 때문에 국제연합에 온 두 단체의 대표들은 이제 설전을 시작했다. 타국의 대표단들은 저 새끼들이 또 시작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흔들었다.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땅을 가른다 쳐도 누가 어느 땅을 가질지, 요르단강 상류의 수원지대나 성지 예루살렘이나, 혹은 유태인들이 알박기를 한 땅이 누구의 소유인지의 문제가 있었다.
이 모든 문제를 야기한 영국은 이제 국제연합에 배턴이 넘어갔으니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나 몰라라 하는 표정을 짓고 모른 척 하늘을 쳐다보았다. 우간다 땅을 내주겠다고는 했으니 제 책임은 다했다는 심산일까?
“우간다로 꺼지쇼! 아니, 다른 데 다 내버려 두고 왜 하필 여기요!”
“그 땅은 우리의 고향이고 우리가 안식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오!”
“자, 자, 우리 국제연합에서는 이미 몇 가지 제안을 한 바 있습니다. 그것을 위주로 검토를….”
보다 못한 진행자가 의사봉을 땅땅 두들기고는 말싸움을 하는 대표단들을 진정시켰다.
“그… 원한다면 우리 소련에서는 이주자들을 위한 독립적인 자치공화국을 제공하고 폭넓은 자치권을 부여하겠습니다. 정착지원금 역시 제공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향으로 갈 것이오! 고향이 아니면 안식도 평화도 없소!”
“끄응….”
물론 이 와중에 소련은 시온주의자들에게 나름대로의 타협안을 제시했다.
동유럽에서 박해당해 예루살렘으로 가려 하는가? 말 설고 물선 이역만리 타향, 수천 년 전에 떠나온 데다 이민족으로 가득 찬 그곳에 가느니 새로운 터전을 제공해 주겠다!
“…이 제안은 언제나 유효하오. 정착지원금의 액수는 상황에 따라 증액될 수 있소이다.”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유태인들의 시온주의에 대해 제동을 걸려 하지 않았다.
민족자결주의라는 허울 좋은 이상을 내세울뿐더러, 나치독일을 제지하지 못했던 내적인 빚, 그리고 국내 유태자본들의 지지 때문에라도 그들은 시온주의에 제동을 걸 수 없었다.
정작 그 땅에서 살아가야 할 아랍인들? 어차피 해당 지역의 정부는 대부분 친영 친미 성향을 띄고 있었다. 이집트 왕국이나 요르단, 이라크 왕국,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같은 친서방 정부들은 껄끄러워하기는 했어도 성향상 영미가 결정하는 이상 따랐다.
그리하여 이 문제에 대해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것은 소련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그걸 들어주고, 차분하게 해결이 가능했다면 이 정도까지 번지지는 않았겠지만.
“우리는 무력으로라도 이 땅을 차지할 것이오!”
“하! 해 보시오! 우리가 순순히 죽어줄 줄 아시오?”
서로 간 피를 흘리며 얽힌 원한의 고리는 순순히 끊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자기네 땅에 기어들어 온 외부인들인 유태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유태인들은 반격과 복수에 주저하지 않았다.
서로 땅과 물과 도시를 놓고 뺏고 빼앗기는 싸움 속에서 탄생한 적개심은 쉬이 사그라질 것 같지 않았다.
소련 대표는 보고할 내용을 끄적이며 써 내려갔다.
‘협상은 난항을 겪는 중.’
* * *
“흠? 그래? 뭐, 나쁘지 않군.”
“서기장 동지의 대계는 참으로 신묘하기 그지없습니다.”
“몰로토프, 왜 안 하던 아부를 하고 그러나?”
중동문제는 쉽게 풀 수 없었다. 그게 쉽게 풀릴 것 같았으면 실제 역사의 현대가 그 꼴이 나지는 않았겠지.
이스라엘 시오니스트들이 쉽게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을 포기하고 떠날 것 같지도 않았다. 적지 않은 수의 소련 내 유태인들은 극동지역의 유태인 자치공화국으로 떠났지만 그거야 엄연히 국내 ‘이사’였다.
아랍인들과의 분쟁 속에서도 악착같이 팔레스타인에 자리 잡은 이들은 본격적인 무력충돌과 참패가 아니라면 떠나지 않을 터.
실제 역사에서 소련은 친미 친영 왕정들투성이인 중동 지역에 나름의 거점을 만들어 보려 이스라엘을 지원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럴 생각이 없었다.
“보로실로프, 훈련은 잘 되고 있던가?”
“음… 아! 예, 서기장 동지. 생각보다 기본기가 있던 이들이라 배우는 속도가 빠릅니다.”
“그래, 좋아… 하하하하하.”
반대로, 우리가 지원해야 할 쪽은 아랍인들이었다.
아랍 지역의 왕정들은 실제 역사에서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붕괴하고 말았다.
이집트의 파루크 왕가는 1차 중동전에서 패배한 이후 나세르의 쿠데타에 무너진다. 이라크는 압둘 카림의 쿠데타에 의해, 리비아는 카다피의 쿠데타에 의해, 엄밀히 말하면 아랍은 아니지만 이란의 팔레비 왕정 역시 이슬람 혁명에 의해 쓸려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지금 중동 지역에 영향력을 투사하겠다고, 소련의 통수를 칠 이스라엘의 손을 잡을 필요가 없었다. 부패한 왕정들은 알아서 자멸할 것이고, 혁명의 불꽃이 높이 피어오를 것이기에!
우리는 기다려야 했다. 힘을 기르며.
“아랍 왕국들에게 추가적인 무기 판매를 타진해 보게. 이만큼 긴장이 고조되는 중이면 나름대로 뭔가 대비를 하고 싶어 하겠지.”
“예! 서기장 동지!”
“그리고 우리 측의 핵심 요인들에게는 미리 알려 두게. 유태인 무장조직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실제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은 46년 이스라엘 건국을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그에 맞서 팔레스타인 무장조직과 아랍 연합국들은 이스라엘을 침공해 1차 중동전쟁, 다른 이름으로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이 발발한다. 여기서는 독일의 패망이 빨랐던 만큼 이스라엘이 조기에 건국선언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전달하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성공한다면 중동에 우리가 영향력을 투사할 수단이 하나 더 생기는 걸세. 잘 해 보도록 하게.”
“예!!”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이스라엘의 주요 무기 공급처가 되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크렘린의 지령에 따라 유태계 무장조직들에 대한 무기 판매를 거부했다.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각종 화기들은 인도네시아 독립군에게, 그리고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에게 넘어갔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 국가방위군’은 웬만한 정규군 수준의 무장수준을 갖추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가 파견한 정예 고문단 하에서 이들은 맹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자기네 고향을 침략하고 땅을 빼앗아 간 유태인들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는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리고 동포들을 유린한 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에게 분노한 아랍인들이 방위군에 속속 합류했다.
터키로부터 뜯어낸 땅에 세워진 쿠르디스탄, 프랑스가 독립시켜 아랍 공산당이 자리 잡은 시리아, 그리고 자립 과정에서 소련의 지원을 막대하게 받은 팔레스타인까지!
이 정도면 중동의 중심부에서 붉은 물결을 퍼트리기 충분해 보였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석유 수출국 기구’에 대한 제안은 해 보았나?”
석유야말로 중동이 세계의 화약고가 된 이유였다.
그리고 비―아랍 국가 중 세 손가락 안에 꼽는 석유매장량을 지닌 소련과 이념적으로 단결한 중동 산유국들이 힘을 합친다면?
그야말로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아시아 지역에서 나름 풍부한 석유 매장량을 지닌 인도네시아도, 만주 지역도 우리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다.
“예! 해당 국가들은 모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향후 외무장관 선에서 회담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래, 아주 잘 해 주었네. 수고했어.”
최소한 산유국들만큼은 우리 편으로 만들어 두고 싶었다. 미국은 석유가 있다면 어디든 개입해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어 놓고는 했으니.
흩어지면 약하지만, 뭉치면 강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초강대국인 소련이 뒤에 있다면? 산유국에 괴뢰정부를 세워 좌지우지하며 국민들은 분쟁에 끼어 죽어 가는 꼴은 나지 않을 것이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참 고맙게도 세계만방에서 패악을 부리며 서구의 평판이란 평판은 다 깎아 먹고 있었으니 우리가 경찰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린 그러면 기다리도록 하지. 저들이 자멸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