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218화 (218/300)

# 218

218화

“나는 우리 소련 정부가 인민 대중의 의지에 반응하는 정부여야 한다고 생각하네.”

“음….”

“중요한 것은 인민이오. 인민은 정권을 세우기도 하고 무너트리기도 하지. 그들은 어리석어 보일지 몰라도, 결국 역사의 발전을 이루어 내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지.”

민중사관? 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그들의 입을 막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체제가 오래 간 적은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미래의 소련은 그렇게 해서 몰락했다.

소련 인민들은 다른 모든 나라 사람들처럼 여러 가지를 원했다.

가장 간단하게는 먹고 마실 것들을 요구했다. 소련 정부는 이 문제를 소련이 붕괴하는 그 날까지 잘 해결하지 못했다.

또 더 높게는 적절한 일자리와 주거환경과 소득수준을 요구했고, 정치 참여를 요구했으며, 장기적으로는 ‘괜찮은 삶’을 요구했다.

하지만 비대하고 부패한 소련의 관료제도와, 혁신이 멈춰 버린 경제는 그 요구를 모두 들어주지 못했다.

결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조국 소련은 그렇게 산산이 부서졌다. 사회주의의 꿈과 함께.

“그렇다면 서기장 동지의 말씀은… 서방식의 민주주의를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들의 제도라고 항상 인민 대중의 의지를 반영하지는 않네. 자네도 알지 않나? ‘민주주의’랍시고 항상 모든 자가 같은 힘을 가지던가?”

“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정부가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 대중의 이해관계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네. 직설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어쩌면 프롤레타리아트 민중이 아니라 공산당원들을 위한 정부로 타락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네.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의 정부가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하여 사유화되었듯.”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다들 찔리는 것이 있기는 할 것이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항상 소리 높여 자본주의 국가들을 비난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민중을 억압하는 자본의 도구일 뿐이라며!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들이라고 크게 달랐나? 이 시대까지는, 최소한 동구권에서 그런 계급주의가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계급은 공고해졌고, 당서기의 아들은 당서기가 되고 노동자의 아들은 노동자가 되는 시대가 소련에도 도래하고 말았다.

여기 있는 정치국원들도, 혹은 그들이 이끌어 준 후배들도 다들 비슷할 것이다. 고위직 간부와의 연줄을 통해 이들의 자녀들은 대학에 입학하고, 승진하기 좋은 보직에서 상부의 눈치로 실적을 몰아받아 젊은 나이에 높은 위치로 껑충 뛰어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민중은 결국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니, 그럴 바에야 ‘자기 능력으로’ 성공이 결정되는 자본주의가 낫다 생각했겠지.

“찔리시오? 하하하하.”

“….”

이 자리에서 비판받지 않아도 되는 대상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내 자식들은 모두 죽거나… 혹은 죽음 비슷한 상황에 처했으니까.

주코프와 보로실로프는 고개를 떨구었다. 몰로토프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머리를 긁적였다. 칼리닌과 미코얀, 즈다노프도 각기 시선을 돌리고 턱을 만지작거리거나 수염을 배배 꼬았다.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흐루쇼프가 해답을 갈구하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혁명시대의 열기는 이들 안에 잠자고 있었다. 젊은 혁명가 시절, 차르의 제정에 불만을 품고 제정을 무너트려 새 시대를 열었던 이들은 여전히 한 조각 붉은 양심을 가슴 속에 가진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비판에 낯뜨거워할 리가 없었으니. 어쩐지 희망의 편린이 보이는 듯했다.

“쉽지는 않다만, 내 생각은 이렇네.”

“오….”

이에 대한 논쟁은 수십 년간 사회를 달구었다.

능력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어떤 사회는 철저히 시장에 보상을 맡기는 것을 선택했다. 어떤 사회는 보상을 국가가 완전히 통제했다. 두 사회 나름대로 나름의 불평등이 생겨났고, 각자의 실패를 겪었다. 두 방안을 절충한 국가들도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한 잣대를 영원히 유지할 수는 없었다.

“먼저, 능력에 대해 생각해 보지. 능력에 따라 보상이 이루어지는 게 옳다 생각하나?”

이론에 밝은 간부들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덜 밝은 친구들, 예컨대 몰로토프나 주코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두 반응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는 일단 ‘능력에 따른 기여’와 ‘능력에 따른 분배’를 천명했다. 중화학 공업 노동자와 시인과 교수와 상점 점원은 분명 사회에 다른 기여를 했고 그에 따라 다른 월급을 받았다.

물론 공산주의는 달랐지만, 그것은 이상적인 발전상의 결과물이었고. 공공의 것인 재화가 넘쳐 흐르기에 얼마든지 각자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쓸 수 있는 사회가 바로 공산주의 사회, 라고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능력주의는 왜곡되네. 능력이 있어 출세한 자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게 되네. 편법적인 영향력이나 탈법적인 수단이 아니라 지극히 합법적으로도!”

“그…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코프, 생각해 보게. 자네는 군사학책을 좀 가지고 있을 걸세. 그렇지 않나? 자네와 같은 뛰어난 장군이 밥상머리에서 이야기해 주는 것도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걸 불법으로 간주하지는 않지.”

“그, 그렇습니다.”

이 자리에서 공산주의에는 가장 문외한일 주코프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자네 자식들이 그 영향을 받고 자란다면 남들보다 좀 더 좋은 군인이 될 수 있겠군. 안 그런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서기장 동지.”

“그래. 그래서 장군의 자식은 장군이 되기 쉽고, 의사의 자식은 의사가 되기 쉽고, 당서기의 자식은 당서기가 되기 쉬울 것이네. 그렇지 않나?”

이제야 이해했는지 주코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자신은 빈농의 아들로 병사로부터 출발해 소비에트 연방원수가 되었다.

하지만 후대에는 그게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전쟁이 또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서기장의 말처럼 장군의 아들이 장군이 되는 것이 훨씬 쉬울 테니.

“그래서 오직 능력만 보고 보상을 한다면 우리는 결국 돌아온 계급사회와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 나는 감히 이야기하겠네. 적잖은 엘리트들이 그런 퇴보를 환영할 것이고!”

탕. 내가 탁자를 내리치자 다들 깜짝 놀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그렇다면… 제 짧은 생각으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듯 합니다. 서기장 동지.”

“오! 그래? 한번 들어 보도록 하지.”

곰곰히 생각하던 흐루쇼프가 손을 들고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붉게 달아오른 표정이 그의 흥분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무학의 광부에서 세계의 절반을 좌지우지하는 자리까지 올라온 그는 아마 이 문제를 실감해 보았을 것이다.

“하나는… 노동자 계급에게 기회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 그건 지금도 우리가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조용히 있던 미코얀이 태클을 걸었지만 흐루쇼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입당 기회나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으음… 서기장 동지의 말씀대로라면 노동자 계급 전체가 예컨대 8할이라 치면, 능력 본위의 선발에선 당직자의 6할 정도의 비중을 노동자 계급이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예시입니다만….”

“계속해 보게.”

흐루쇼프는 사뭇 진지해 보였다. 그는 자기 앞의 종이에 슥슥 그림을 그려 가며 문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당직자뿐만 아니라 대학이나 장교 선발이나, 아무튼 여러 곳에 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로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은 기회가 적었던 노동자들끼리 경쟁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8할의 자리를 노동자들에게 배정하고….”

어쩐지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내가 모든 것을 제시하고 명령하는 주체에서 벗어나길 바라 왔다. 언제까지나 내가 서기장 자리를 지킬 수는 없으니.

최소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큼은 엄격한 공산당의 교리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흐루쇼프는 그 능력을 가장 먼저 길러 개화한 것 같았다. 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또, 다른 방법은… 한 사람에게 기회를 여러 번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나? 아무튼 예컨대, 처음에 학교를 가지 못한 아이는 보통 평생토록 노동자가 됩니다.”

그 말을 할 때 흐루쇼프는 약간은 서글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부심이 엿보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아래에서 올라온 인간승리의 상징이었으니!

“하지만 이런 아이들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학교에 가지 못했다면 예컨대, 콤소몰에서 대표를 해 본다거나, 혹은 공장 소비에트의 대표가 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동지의 말은 그러면, 당의 선발 방식을 일원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처음부터 잘했던 사람들만 뽑으면, 그럼 나중에 가서는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처음의 선택이 일생을 모두 좌지우지하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흐루쇼프, 자네는 앉아 있게. 나머지, 모두 일어서게나.”

내가 벌떡 일어서며 이야기하자, 다들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혼자 앉아 있으라는 명령을 받은 흐루쇼프만이 이게 웬일인가 하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모두 박수!”

짝짝짝짝짝짝. 나부터 힘차게 박수를 치자 사람들은 얼떨떨해하면서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기립박수를 받은 흐루쇼프는 얼굴이 새빨개지면서도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저 말이 맞다고 생각하네. 물론, 부족한 부분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로 하면 기회균등전형이라고 해야 하나? 흐루쇼프가 제안한 것은 바로 그런 내용이었다.

직위의 세습은 세습이 쉬울 때나 가능하다. 노동자 계층에게 문을 넓게 열어 주면 열어 줄수록, 세습은 더 어려워질 것이고. 또, 새로이 능력을 증명한 사람들이 계속 경쟁으로 유입되면 될수록 관료계급이 고인물이 되어 썩어 가는 것은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와 감시가 활성화되어 살아있는 권력 그 자체가 주권자인 인민 앞에 꼼짝 못 하도록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하겠지만. 일단 권력을 어떤 대표자들의 손에 쥐여 주느냐도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흐루쇼프가 대학 교육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고등교육의 확대 말이네.”

한국, 한국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그랬다.

한국의 초창기 발전은 사실 소련의 그것을 굉장히 닮아 있었다. 소련의 5개년 계획을 벤치마킹한 중공업 위주, 권위주의적 정권의 국가주도성장 같은 면에서 한국은 서구보다 소련에 훨씬 가까웠다.

하지만 한국은 결국 민주화를 통해 선진산업국가 대열에 들어섰고, 소련은 붕괴했다.

여러 요인들이 있었겠지만, 한 가지 핵심 요인은 고등교육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인민들이 많이 배우고 유능할수록 감히 관료들이, 감히 마름들이 설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네. 그 반대가 바로 차르의 제국이었던 것이고.”

독재자들은 3S 정책을 통해 대중을 멍청하고 배부른 상태로 묶어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반대로 갈 것이다.

“나는 자네들을 시험에 빠트릴 걸세. 앞으로 대학교육이 확대되고 더 많은 인텔리겐치아, 특히 노동계급 출신의 인텔리겐치아가 등장할수록 자네들은 정치를 더 잘해야 할 것이네. 안 그러면… 뒤집히겠지.”

한국이 그랬다. 높은 교육열 속에서 시민들은 빠르게 유능해졌고, 독재는 이들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경직된 전체주의 독재정권은 붕괴하고 새로운, 인민의 의지에 더 잘 반응하는 정권이 탄생했다.

또, 이렇게 대거 탄생한 지식인 계층은 신산업의 도래에도 빠르게 적응하여 발전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소련에서도 나는 비슷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젠 내가 자네들을 채찍질하지는 않을 거야. 다만 인민들이 하겠지. 나는 그들에게 무지와 궁핍의 굴레에서 벗어날 열쇠를 쥐여 줄 것이네. 도약하는 인민들의 힘 앞에서, 자네들은… 하하하하! 고생 좀 해 보라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