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217화
열심히 치고받고 싸우는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소련 경기는 역대급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올해 상반기 경제성장률은 대략 6%로 예측됩니다.”
“아주 좋소! 자, 모두 박수!”
짝짝짝짝짝짝! 흐루쇼프가 총 경제성장률을 마지막으로 하여 발표를 마치자 정치국원들은 모두 힘찬 박수를 통해 그를 격려했다.
대머리를 붉히며 흐루쇼프는 멋쩍게 나와 정치국원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사이비 과학자의 헛소리에 속아 옥수수를 심자던 풋내기는 이제 제법 관록이 붙은 경제관료로 발전해 있었다.
“이것이 다 스탈린 동지 덕분입니다. 스탈린 동지의 탁월한 영도에 기반한….”
“그런 헛소리는 됐네! 자, 한번 분야별로 다시 검토해 보지.”
<스탈린이 있어 이긴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음에도 이겼다.> 56년의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가 한 연설 내용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스탈린의 대숙청과 무자비한 현지사수 명령, 무리한 진격명령은 죽지 않아도 될 수백만을 죽게 만들었다. 그렇게 쌓아 올린 중공업화 정책이 독일군을 막아 내는 데 효과를 발휘하기는 했지만, 소련은 엄청난 타격을 입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최소한 뒤의 두 가지가 없었다. 거기에 핵개발을 통해 독일과 일본을 격파하고 미국으로부터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대규모 경제지원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소련의 놀라운 경제성장은 절반 가량은 이 막대한 해외원조에 의한 결과였다.
“예, 알겠습니다. 일단 농업 생산량이 예년에 비해 2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이것이 경제성장을 일정 부분 견인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바빌로프 박사의 종자가 효과가 있었던 건가?”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거기에 농업 인프라의 확충으로 농촌부문에서 생산성 향상이 두드러졌습니다.”
바빌로프는 결국 난쟁이 밀 종자를 개량해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높은 밀 품종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리셴코를 숙청한 지 몇 년 만에 이뤄낸 소련 농학기술의 대성공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50년대에 개발되어 소위 ‘녹색 혁명’을 이끌어 낸 종자가 10년 일찍 도입된 것은 만성적인 농업부문의 저생산성에 시달리던 소련에는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다.
“농업 인프라라 하면 비료공장을 말하는 건가?”
“예, 서기장 동지.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 농약 공급, 철도와 사일로의 건설, 축사의 대규모 확충과 실험적으로 도입된 공장식 축산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음… 그것도 효과가 제법 있었나 보군.”
“그렇습니다! 일일이 다 계산할 수는 없지만 농업생산성의 획기적 증가에 분명 영향을 미쳤습니다. 선도적으로 설치된 농업공사들이 높은 실적을 낸 것도 일부 있었고….”
일단 농업 분야부터 소련은 점점 현대화 테크트리를 밟고 있었다.
국가총생산의 엄청난 부분을 잡아먹던 군수공업이 대규모로 감축됨에 따라 그에 들어가던 자원을 타 분야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팽창했던 군수공업분야 역량은 그대로 농업으로 흡수되었다.
화약을 생산하던 공장은 살짝만 공정을 바꾸어 농약과 비료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탈바꿈했다. 전차와 장갑차를 생산하던 공장 역시 트랙터와 컴바인 같은 농기계 공장으로 바뀌었다.
군수물자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강철을 콸콸 쏟아 내던 제철소들은 계속 더 많은 강철을 새로운 제강법을 통해 쏟아 내게 되었지만 강철은 총포탄이 아니라 철도선과 농기계가 되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병사들은 노동자가 되어 산업전선에 투입되었다. 강제노역형을 선고받은 수십만의 독일인, 일본인 포로들 역시 예전 굴라그 수감자들보다 나은 대우이긴 했으나 아무튼 혹독한 노동형에 처해졌다.
그렇게 산업의 혈관 같은 철로는 소련 곳곳에 깔리게 되었다.
“난… 난 이 숫자만 봐도 이렇게 배가 부르단 말이야….”
“저희도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하루에 몇 킬로미터의 철로가 깔렸고, 몇 톤의 비료와 농약이 생산되었으며, 트랙터와 트럭 몇 대가 보급되었다! 익숙지 않은 미국제 설비를 보며 어버버대던 초짜 노동자들은 이제 원숙한 베테랑으로 성장해 어설픈 발음이지만 영어로 매뉴얼을 척척 읽어 내려가며 공정을 다루었다.
그렇게 찍혀 나온 막대한 양의 기계들은 소련 농업을 그야말로 견인차처럼 끌어 올리고 있었다.
“아 그리고 모택동 동무와의 협상도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략 10만여 명의 남녀 노동자들이 내년 하반기까지 배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규모 역시 조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 그것도 참 희소식이군. 다만 조심해야 하네. 그들 때문에 우리가 중국화될 수도 있으니! 하하하하!”
미국은 소련에 자본을 퍼부어 주었고, 소련은 이 자본에 투입할 노동력을 먼저 귀향한 병사들로 충당했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업생산의 기계화는 아직 한참 먼일이었고, 그래도 적지 않은 사람이 독소전에서 죽었기에 노동력은 항상 부족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중국에서 노동력을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은, 특히 공산당이 장악한 농촌 지역은 저발전 상태로 생산성이 매우 낮았다. 이는 천천히 기초 인프라에 투자하고 교육과 산업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지만 모택동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당장 장개석의 수백만 대군이 몰려올 수 있는 상황에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고, 지금은 손에 쥘 수 있는 실물이 필요했다.
소련은 넘쳐 흐르는 중국 농촌의 노동력을 데리고 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돌려줄 때도 반드시 항목에 제한을 걸게. 한번 쓰고 소비되는 자원들 위주로 원조를 해 주고, 생산설비는 절대 통으로 넘겨주어서는 안 되네. ‘공정 국제가격’에 거래한 것처럼 서류를 조작해서라도 팔아넘기도록.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이걸 대가로 모택동은 자기네 게릴라들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물자들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우리 소련군이 쓰고 남은 군수물자는 ‘적절한 가격’에 팔려 전 세계로 향했다.
인도차이나 연방이나 프랑스, 알제리 같은 형제국이 내는 가격과 중국 공산당이 내는 가격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중화민국을 너무 자극해서는 안 되네. 양쪽을 적절히 조종하려면… 알겠나?”
“예, 서기장 동지. 서기장 동지의 지극한 중국 사랑은 저희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암, 암. 아주 좋네.”
같은 T―34 전차라 해도 신품의 가격과 소련군이 쓰던 중고품, 혹은 독일군이 노획해서 굴리던 노획품의 가격은 모두 다르게 책정되었다.
인도차이나 연방은 인도네시아 내전에 개입해 싸우는 만큼 저가에 노획 T―34 전차를 구매할 수 있었다. 물론 그 T―34 전차가 45년에 생산되었다는 인장이 찍혀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건 사악한 나치의 개입에 불과할 뿐이었다.
반면 중국 공산당이 쓰는 물자들은 성능이 보장되어야 하는 만큼 오직 신품만을 정가에 판매했다. 어차피 파견한 사람 1인당 얼마씩을 중국 공산당에서 가져가고, 또 중국인들이 송금한 돈에서 환율을 가지고 장난을 쳐 떼어먹으므로 공산당의 손해는 크지 않겠지만.
미국의 막대한 자본력과 중국의 막대한 노동력이 소련에서 합쳐지자 그 경제적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아까 이야기한… ‘농업 공사’의 효과는 어떤가?”
“예. 음… 각 소비에트 공화국별로 몇 개의 농장을 지정해서 실험적으로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한 곳에서 더 높은 생산성 증대가 확인되었습니다. 인센티브 방향은 조금씩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만….”
“알겠네. 이는 좀 더 지켜보도록 하지.”
그리고 소련 농업의 고질적 병폐로 지적된 집단농장에 대한 개혁 역시 추진되고 있었다.
일단 정확한 비교를 위해서 작물별로, 지역별로 몇 개의 농장이 선정되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보상체계하에서 비슷한 수준의 인프라 지원을 받고 농사를 지었다.
어떤 농장은 ‘자영농 연합체’ 방식을 채택했다. 예전처럼 각자 자기 구획에 대하여 알아서 농사를 짓되, 농사에 필요한 농기계는 단체 소유로 돌려 쓰는 방식이었다. 어떤 농장은 각 분야별로 분업을 하기도 했고 또 어떤 농장은 아예 더 큰 규모로 다른 농장과 합쳐 조직화된 농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중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몇 년간의 추적관찰을 통해 파악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판단했다. 그리하여 선정된 방식을 점차로 확대해 나가는 것이 장기적인 농업 플랜이었다.
집단농장화는 일단 스탈린의 철권으로 찍어눌렀던 만큼 잔혹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이었다.
“농장이 진짜 공장처럼 작동할 수 있을 때까지, 대규모로 기계화되고 분업화가 가능해질 때까지 집단농장은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오. 나는 비록 정치적 필요가 있었다지만 무리하게 집단농장을 추진한 과오가 있소. 이 자리를 빌려 자아비판을 하려 하오.”
“아닙니다 서기장 동지! 집단농장화를 통한 공출이 없었더라면… 그렇더라면 공업화가 늦어져 우리가 전쟁에서 패배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농촌의 생활수준이 낮아졌다고는 하나… 그것은 필요한 희생이었습니다.”
다른 정치국원들은 화들짝 놀라며 자아비판하는 나를 뜯어말렸다.
실제 역사에서도 스탈린의 공업화는 저런 명목하에 진행되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거둔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판이 필요했다.
“나는 지금까지 ‘전쟁’을 명목으로 너무 강력하고 비민주적인 권위를 유지했네. 하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지속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과오를 저지를 때 막을 수가 없네. 우리가 지금 전위당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 이상 좀 더 투명한, 그리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하네.”
“….”
과연 이 세상에서 ‘나’는 얼마나 신격화된 지도자가 될까?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실제 역사의 스탈린보다도 신화적인 성공을 이끌어 낸 지도자! 스탈린이 죽고서 30년이 넘도록, 고르바초프가 등장할 때까지 소련은 스탈린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과연 여기서는 얼마나 더 삽질을 하게 될까?
절대 그래서는 안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는 반드시 내 손으로 그 물꼬를 터놓고 가야 했다. 여러 방식을 실증적으로 실험해 보고 확대하는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상급 정치지도부의 주기적 물갈이 역시 곧 도입할 것이었고.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글라스노스트’(개방)가 필요했다.
서기장 집권 당시 쉰네 살. 70, 80대 노괴들이 지배하는 소련 정치국에서 가장 젊었던 풋내기 고르바초프는 너무 의욕에만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의 순서를 거꾸로 해 버렸다. 고르바초프의 생각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통해 정치행정을 투명화해 시민들의 지지를 확보한 뒤 이를 추진력 삼아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밀고 나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보의 개방, 정치의 투명화 과정에서 시민들은 정권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터트렸다. 기득권들은 자기네 밥줄을 흔든 고르비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래서 페레스트로이카는 시도해보기도 전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직 당과 정치인들이 고인물, 노멘클라투라가 아니고 혁명의 열기가 살아 있을 때, 개방은 진행되어야만 했다.
그 첫머리는 무오로 여겨졌던 나, 스탈린이 신적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었고.
“신격화는 멈춰야 하네. 나는 신이 아니야. 신이라 해도… 당신네들은 공산당원이 아닌가? 하하하하! 신 따위는 없다고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