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214화
“아무튼 그래서 결혼을 할 생각이다 이거니?”
“예! 어무니. 카티아가 얼마나 착하고 똑똑하고….”
“너하고 결혼해 준다는 사람이면 똑똑한 것 같지는 않지만… 둘이 좋다니 어쩌겠니?”
어머니는 끝까지 그렇게 한마디씩 하셨지만 니콜라이는 애써 무시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결혼보다도 다른 데에 더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았다.
“그래서 훈장은 어쩌다 받았냐? 너 그게 있으면 군대에 말뚝 박으면 되는 거 아니냐?”
“아… 음… 군대는 적성이 좀 아닌 것 같아요.”
“얘는… 월급 따박따박 주면 그게 적성이지.”
그래도 전차 운전을 배웠으니 농장에서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니콜라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름 글도 배웠고, 산수도 할 줄 알고, 예전에는 이 정도면 집단농장에서 제법 대우를 받을 만한 인재였다.
“저… 그래서 트랙터 운전을 하면 어떨까 한데….”
“트랙터?”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는 니콜라이를 놀랍다는 듯 바라보았다.
“요새는 운전할 줄 아는 얼라들이 한둘이냐? 거 이반네 아들 바실리도, 저기 세묜네 아들 아르툠도 다 땅끄를 몰다 와서 트랙터를 운전하고 있단다. 전차 몰다 온 애들이 한둘이 아닌데 아르툠은 손가락 몇 개를 잘린 상이용사랍시고 트랙터 운전수에 선발됐다.”
“예???”
“거 조금 전차가 많았어야지?”
아뿔싸. 비빌 언덕이 알고 보니 자그마한 흙무더기가 된 느낌이었다. 갑자기 억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듯한 느낌에 니콜라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스튜에서 스팸을 다시 입속으로 욱여넣었다.
“저… 글씨는 좀 배웠는데 마을 서기는….”
“군대 가서 다들 글씨 정도는 배워 왔더라! 아서라, 아들. 요새 밥 벌어먹고 살기가 쉬운 게 아냐… 그냥 군대에 남는 게 어떻겠니?”
당신 아들은 나름 인민영웅 훈장까지는 받긴 했는데, 설마 트랙터 운전수를 못 할까요? 그렇게 물으려던 니콜라이는 그냥 입을 꾹 닫았다.
그냥 인민영웅까지 된 참에 군대에 남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아버지가 물어보실 것만 같았다. 사실 별 공도 없이, 운이 좋아서 딴 훈장으로 손가락이 잘렸다는 아르툠 같은 친구들을 다른 일자리로 밀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농사일 도울 거는 좀 없을까요?”
“요새는 트랙터며 농기계들이 좀 많아야지? 파종은 끝냈고, 아마 수확 철이나 되어야 일손이 좀 필요할 것 같다.”
니콜라이가 생각했던 진로 아닌 진로는 다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바뀌어 있었다. 몇 년 만에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 버린 고향을 보며 니콜라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았어요… 그럼 내일 면서기 아저씨한테 가 볼게요.”
“그래. 그러려무나. 오늘은 그냥 푹 자거라. 저기가 네 방인데… 네가 하도 안 와서 창고처럼 내버려 두기는 했다. 적당히 치우면 잘만할 거다.”
그의 방은 온갖 잡동사니로 꽉 차 있었다. 푹신한 모포 하나를 던져 주신 어머니는 무심하게 방바닥에 걸터앉아 고민하는 아들의 등을 두드려 주셨다.
“아들, 뭘 그렇게 고민해? 너무 걱정하지 마. 요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네가 할 일 하나가 없겠니.”
“네, 어무니….”
진짜 없는 게 문제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어머니는 고향에 돌아와서 우울해 보이는 아들을 위로하시곤 그렇게 나가 버리셨다.
“하….”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그는 고민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딱히 잘난 게 없었다. 군대에서 배운 것들은 다른 사람들도 많이 배워서 써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고, 쓸데없이 오래 군대에 있는 바람에 괜찮은 자리들이 없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군대에 남기에는… 으으, 그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체르냐홉스키 사령관님께서는 뭔가 괜찮은 자리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니콜라이는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는 않았다.
“내가 진짜 전쟁에 나갔다가는 부하들만 죽이겠지….”
물론 지난 두 번, 소대장으로서 한 번과 중대장으로서 한 번 작전을 할 때는 부하들이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건 적수가 허접해서 그런 것이고 진짜 전쟁에 간다면 어찌 될지는 몰랐다.
항상 그가 마음속으로 미워했던 비겁하고 무능한 장교가 되지 않기 위해, 니콜라이는 그냥 평범한 노동자로 살고 싶었다.
솔직히, 그의 능력도 아닌 훈장으로 고평가받는 것도 양심에 거리꼈다. 카티아는 그런 니콜라이에게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거라며 이야기하곤 했지만.
“일단 내일 생각해야지.”
코 고는 소리나 남정네들의 땀내로 가득한 군 막사가 아니라 이런 곳에서 자는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니콜라이는 금방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은 뭔가 내일의 해가 뜰 테니까.
* * *
“여어! 니콜라이! 돌아왔구나!”
면서기 아저씨는 그 푸근한 인상 그대로였다. 주름살이며 흰 터럭이 머리와 수염에 더 늘어난 것 같기는 했지만.
“네, 아저씨. 하하하… 여전하시네요?”
“그럼! 나야 여전하지. 요새는 이렇게 뱃살이 늘긴 했는데….”
푸짐해진 뱃살을 두드리며 면서기는 끌끌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코끝에 걸린 안경을 들고 문서를 읽어 내려가던 면서기 아저씨는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 이게 뭐냐? 인… 민영웅? 니콜라이, 이거 너 맞니?”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으음… 그래… 잠깐만….”
아저씨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것저것을 따다다다 빠르게 쏘아 댔다. 인민영웅이라던가, 소비에트라던가, 뭔가 대체 저 말이 왜 나오지 같은 단어들이 오고 가는 도중 니콜라이는 뻘쭘하게 서 있어야 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페트로프 동지. 가시죠!”
“아저씨, 갑자기 왜 존댓말이세요? 그리고 어디로 가요?”
“그야 읍사무소지요! 인민영웅에게는 이 정도가 당연합니다!”
“아니 아저씨….”
당황한 니콜라이의 손을 꽉 붙잡고 면서기는 그를 농장의 공용 트럭으로 끌고 갔다. 마침 어제의 이반 아저씨가 트럭 뒤 칸에 당근을 실으며 니콜라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어 니콜라이!”
“이봐! 이반 이바노비치! 인민영웅에게 그렇게 무례한 태도라니!”
“에?”
이반 아저씨는 얼이 빠진 표현이었다. 소비에트의 공무를 위해 잠시 차를 빌리도록 하겠다며, 이반 아저씨의 두터운 손에서 트럭 열쇠를 턱 빼앗은 면서기 아저씨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게, 왜….”
“줘 보세요. 제가 할게요.”
몇 번 정도는 트럭을 몰아 본 적이 있던 니콜라이는 제법 능숙하게 트럭에 시동을 걸 수 있었다. 면서기 아저씨는 그 모든 모습을 경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인민영웅은… 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 표정에 니콜라이는 무한한 부담감을 느꼈다.
“아저씨… 제발….”
“하하하하, 우리 면에서, 우리 농장 출신으로 이런 영웅이 나왔다는데 참 자부심을 느낍니다! 자, 출발합니다!”
읍사무소에서도 반응은 비슷했다. 읍장은 호들갑을 떨며 우리 읍 출신으로 이런 영웅이 나왔다는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판에 박은 똑같은 소리를 했다.
그러면서 그는 큼지막하고 두꺼운 종이를 한 장 가져왔다.
“자, 사인하시지요.”
“이, 이게 뭔가요? 공산당… 당원증?”
“인민영웅이면 당연히 당원 자격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전역 이후 하실 일을 찾는다 하셨으니… 아! 이참에 읍 소비에트 선거에 나가 보면 어떻겠습니까? 전임 대표였던 아나톨리 동지가 건강이 나빠지는 바람에….”
면서기는 아나톨리 동지는 술주정뱅이여서 위아래로 평판도 좋지 않았고, 형편없는 무능력자였다고 속삭였다.
“제가요? 제가 읍 대표라고요?”
“그렇습니다! 마침 그 자리를 놓고 다투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인민영웅이 고향 소비에트 대표가 된다고 하면 두말없이 수긍할 겁니다. 일단 당원증부터 수령하시고….”
“아, 아뇨! 저는 군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예?”
그의 손에 만년필을 쥐여 주고, 손을 꾹 눌러 당원증에 사인을 하게 하려던 읍서기와 면서기는 둘 다 갑자기 실망한 눈치가 되었다.
“하, 하하, 저는 그… 음… 군대에서 할 일이 많아서….”
“혹시 읍 대표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거라면 군 대표는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인민영웅이면 단번에는 어렵겠지만 아마 잘 조정하면….”
“아뇨, 아뇨, 저는 꼭 군대로 다시 가고 싶습니다!”
당연히 그렇지는 않지만, 이 부담스러운 자리를 내려놓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체… 체르냐홉스키 사령관님께서 제게 음… 저, 그… 기밀입니다! 아무튼 기밀이지만 기밀 임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당원증과 대표 자리는 받을 수 없습니다.”
“으음… 그것참 아쉽군요.”
진짜 아쉬운 눈치들이었다. 우리 면, 우리 읍 출신이 높은 곳에서 한 자리를 해먹는다면 동향 사람들에게 뭔가 혜택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쪽 마을에 유리하게 도로가 놓인다던가, 혹은 큰 상점이 먼저 들어온다던가.
하지만 니콜라이는 스스로 그럴 깜냥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정치라고는 해 본 적도 없고, 이제 갓 군대에 다녀온 풋내기가 뭘 알겠는가! 수백 명의 삶을 감히 내가 대표한다니! 니콜라이는 아저씨들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크흠, 저는 빨리 부대로 복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이 바빠서….”
“알겠습니다, 페트로프 동지! 혹여나 전역하신다면 우리 고장을 위해 꼭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읍서기는 벌떡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니콜라이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은 니콜라이는 전해져 오는 부담감에 두 어깨를 떨었다.
‘이게 뭐람….’
읍 소비에트의 대표라면 중대장보다도 높은 자리였다. 그나마 전쟁에 나가지 않는다면 사람을 죽일 자리는 아닌 대위 따위보다는 마을의 대소사를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소비에트 대표가 더 큰 자리였다.
최소한 니콜라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반 아저씨가 ‘인민영웅’ 같은 소리를 들었으니 이제 이 내용이 마을에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괜히 깜냥도 아닌 놈이, 혹시 남의 전공을 훔쳐서 저렇게 된 게 아닌가 하는 뒷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빨리 군대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예! 감사합니다! 다음에, 나중에 뵙지요!”
* * *
“얘는, 군대에 다시 갈 거면 왜 또 와서 그렇게 딴짓에 눈을 돌렸니? 그러니 하던 일이나 잘하지….”
“아 거 애가 뭐 좀 해 보겠다는데 고만 좀 그러쇼!”
“당신도 똑같아요. 여기 기웃, 저기 기웃,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이렇게 됐지! 딱 한 우물만 팠으면….”
어머니의 잔소리는 여전히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잔소리조차도 이제 들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저, 그럼 금방 올게요.”
“오냐. 건강하게 잘 다녀와라.”
“밥은 잘 챙겨 먹고, 이도 잘 닦고, 그 아가씨한테는 우리 안부 전해 주고. 윗사람 말 잘 듣고 아랫사람들한테도 잘하거라!”
기차역에서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니콜라이는 기차에 올라탔다. 다시 임지까지 가는 길은 한참이나 멀리 남아 있었다.
이렇게 인민영웅이라는 과분한 칭호까지 받은 이상 평범하게 살기는 글렀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별것도 없는 졸병 나부랭이 출신이 인민영웅이니 레종 도뇌르니 뭐니 하는 번쩍번쩍거리는 걸 받았다고 그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는데.
칙칙, 기관차가 연기를 내뿜고 눈물을 닦으며 작별하는 어머니와 담배를 뻑뻑 피우며 손을 흔드는 아버지의 모습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저 걱정하지는 마세요~!”
“***!! *****!”
무어라 말하는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니콜라이는 더 세차게 손을 흔들었다.
기차역이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될 때쯤 다시 창문을 닫고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군대라니.
대체 체르냐홉스키 사령관이 보내겠다는 그 자리는 어디일까? 내가 그곳에 잘 적응할 수나 있을까?
아무튼 월급은 지금보다는 많아지면 좋을 것 같았다.
“후….”
니콜라이는 한숨을 쉬며, 가슴팍에서 자그마한 상자곽 하나를 꺼냈다. 이것 때문에 집에 보낼 편지와 우푯값까지 아껴서 돈을 모았다.
상자곽 안에는 작은 금반지 한 쌍이 들어 있었다.
“카티아….”
그래도 이게 있으면 뭔가 든든하지 않을까? 모신나강과 감자 수류탄을 들고 돌격하는 것보단, 불곰과 부됸늬의 엄호를 받으며 돌격하는 것이 낫다. 그의 선배 중대장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없는 월급을 털어 이 반지를 사긴 했는데….
앞으로 할 일이 까마득하게 많았다. 신혼집도 구해야 할 것이고, 세간살이도 구해야 할 것이다. 어디 가서 무엇을 할 지부터 일단 정해져야 했지만!
하, 니콜라이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사람이 전쟁이 끝났다고 하며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그만은 새로 전쟁에 뛰어드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행운이 그에게 입 맞추어 주기를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