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211화
“이, 이런 멍청한….”
보고를 전해 받은 영국 총리, 앤서니 이든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멍청한 개구리 새끼들! 그는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보고서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프랑스 놈들은 매일같이 ‘위대한 프랑스’니 어쩌니 하며 떠들어 댔지만 실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나마 정부가 탈출해서 식민지라도 건사했던 영국과 다르게 프랑스는 식민지들이 모조리 비시 편으로 넘어갔었다.
그렇기에, 프랑스에서 반―비시 반―나치 운동을 전개하던 이들은 전적으로 외국이나 조직원들의 한 푼 두 푼 모은 자금에 의존해야 했다.
영국 망명정부는 결국 그들을 따라온 자유 프랑스를 후원했고, 나치가 몰락하며 내심 이들이 한자리쯤 할 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 멍청한 떨거지들은 비시에 붙었던 떨거지들과 손을 잡는다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망했군… 망했어… 제기랄!”
쿠데타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쿠데타군은 파리에 진입하기는 했지만 주요 목표물들은 제대로 점령하지도 못했고, 공산당 총리가 빠져나가 항전을 독려하는 것조차 막지 못했다.
결국 마치 준비라도 되어 있던 것마냥 신속하게 개입한 소련군에 의해 쿠데타군의 주력이 박살 나며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이제는 그 배후에서 충동질을 친 영국이 대가를 받을 차례였다.
“우… 리 측 요원이 붙잡히지는 않았나? 꼬리를 잡힌다면….”
“송구합니다, 총리 각하….”
와장창! 이든이 내던진 보고서는 정보부장의 얼굴을 지나 저편의 꽃병을 맞히고 말았다. 꽃병이 바닥에 떨어져 와장창 깨지는 와중에도 정보부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자네가 저지른 일이 뭔지 아나?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도 있는 거야! 제기랄… 제기랄! 내가 이걸 어째서… 런던이 베를린 꼬라지가 날 수 있다고!!”
“송구합니다.”
현재 유럽의 정세는 영국이 가장 바라지 않은 형태로 흘러가고 있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대륙의 싸움에서 <위대한 고립>(Splendid isolation)을 지키며, 대륙의 패자가 나타나는 것을 경계해 왔다.
나폴레옹이 전 서유럽을 제 손안에 두고 동으로 진군해서 러시아마저 굴복시키려 했을 때 영국은 웰링턴과 넬슨을 앞세워 나폴레옹을 거꾸러트렸다.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세계 위에 군림하는 독일’을 내세우며 팽창을 시도했을 때에는 역으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독일을 밟아 놓았다.
하지만 미치광이 히틀러는 광인의 천재성으로 유럽 대륙에 강대국이라 할 만한 나라를 싸그리 짓밟더니, 종국에는 스탈린이라는 더 강력한 악마에게 패배함으로써 유럽은 소련의 붉은 손아귀 안에 놓이게 되었다.
대륙에 친구가 없는 영국은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같은 2류 국가, 포르투갈이나 반 토막 난 남이탈리아 같은 3류 국가만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을 뿐.
여기에 명실상부 최강대국인 미국이, 2등 소련을 견제할 생각은 안 하고 짝짜꿍 죽이 맞아서 3등 영국을 아예 뒷방 늙은이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그 빨갱이 월리스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어찌 보면 맞는 전략일 수도 있었다.
만약 2등이 자력으로 1등을 넘어설 수 없다면, 1등은 차라리 2등과 손잡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특히 2등과 3등의 사이가 불구대천지원수라면.
그러면 2등과 3등이 으르렁대는 동안 둘 사이에서 중재자 노릇을 하며 영원토록 ‘팍스 아메리카나’를 누릴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일 수도 있었다. 빌어먹을 스탈린과 추종자들이 2등 자리에서 만족한다는 가정을 할 경우에는.
아무튼 국가의 백년대계는 지금은 별 의미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분노한 소련의 붉은 군대가 프랑스군을 앞세워 영불해협을 넘어올 수도 있는 상황에서는!
* * *
쿠데타는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소련군이 개입했다는 것이 알려지자마자 쿠데타군의 절반가량은 정부군에 투항했다.
간을 보던 대부분의 부대들은 자기네들이 얼마나 충성스러운지를 과시하며 파리로 후다닥 달려와 진압군에 합류했다.
“저, 저희 부대 내부의 불순 반동분자들을 솎아 내느라 미처 출동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 그렇습니다. 저희는 정부에 대한 충정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환경이 적절치 못하여….”
결국 소련군이 파리에 도착할 때쯤, 북프랑스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군부대들이 가용 전력을 동원하여 진압군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들은, 프랑스인들의 피를 흐르게 하는데는 주저했지만 하찮은 외인부대의 ‘토인’들이 감히 파리를 불태운 데는 불타오르듯 분노했다.
“죽여! 모조리 죽여라!”
“발사!”
펑! 펑! 외인부대의 방어선 너머로 매운 가스를 뿜는 최루탄이 떨어졌다. 이미 시민들은 시가지에서 소개된 상황. ‘빛의 도시’를 포격과 공습으로 때려 부수고 싶지 않았던 지휘관들은 최루가스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거의 치사량의 가스가 뿌려진 후 전차가 방어선에 돌입했다. 데굴데굴 구르던 병사들은 말 그대로 방어선과 함께 짓뭉개졌다.
몇몇은 기관총이나 수류탄을 던지며 저항했지만, 강철의 야수들은 모기떼를 털어내듯 그저 튕겨내고 전진했다. 화염방사전차로 개조된 다포탑 샤르 B1 전차들은 차체에서 수십 미터의 화염 줄기를 뿜으며 숨은 병사들 하나하나를 소탕했다.
프랑스인이 아니기에,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장교들의 명령에 따라 싸웠을 뿐인 외인부대 병사들은 그렇게 죽어 나갔다.
“빌어먹을 개새끼들, 충성심이라곤 하나도 없는 개만도 못한 놈들!”
“???”
복수심에 불타는 프랑스군 하나가 바닥에 구르며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던 외인부대 병사의 가슴팍에 총구를 가져다 댔다.
외인부대원은 그 와중에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납탄이 흉곽을 으스러트리고 폐부를 찢어 결국 다시는 질문할 수 없게 되어 버렸지만.
그리하여 쿠데타군의 마지막 거점까지 함락되며 전투가 끝났다.
쿠데타군에 참여했던 몇몇 장성들은 목숨을 구걸하며 투항했다. 또 어떤 자들은 살아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자살을 선택했다.
그 편한 선택지들은 병사들에게도 해당하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와아아아아!! 반역도들을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성난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오는 외인부대 병사들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퍼부었다. 각양각색의 외양을 한 외인부대 병사들은 묵묵히 조롱을 온몸으로 받아 내었다.
프랑스인 병사들은 대부분 상부의 명령이 있었고,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으며, 결국에는 무혈로 항복했다며 면죄부를 받았다.
그러나 외인부대원들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은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다. 이 평화롭고 위대하던 나라를 어지럽힌 자들의 피를 보아야 했다.
물론 장군들 몇몇이 총살대로 끌려가겠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정권은 가장 힘없는 이들을 희생양으로 내주기로 결정했다.
“거참….”
소련 ‘구원부대’의 선발대로 여섯 개의 부대를 항복시키고 파리에 가장 먼저 진입한 니콜라이는 아직 전투의 여파가 가지 않은 시가지를 행진하며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카티아보다 조금 덜 예쁘지만 그래도 굉장한 미인이신 프랑스인 처자 하나가 그에게 꽃목걸이와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아… 메르시?”
“하하하하! vous êtes les bienvenus!”
“???”
어설프게 한두 마디 주워들은 프랑스어로는 현지인들의 따다다다다 쏘아 대는 말을 따라갈 수 없었다. 니콜라이는 어리벙벙해진 상태로, 싸움은 더럽게 못하는 주제에 군복은 잘 다려 입는 프랑스군을 따라갔다.
“여기입니다.”
“예? 예, 예….”
전투는 6일조차 걸리지 않고, 단 5일 8시간여 만에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찝찝함을 남겼기에 니콜라이는 어쩐지 가슴이 개운치 않았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통역관은 니콜라이의 옷을 갈아입히고는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런데 여기는 왜…?”
“예? 전달받지 못하셨습니까?”
“예?”
이런, 하는 표정으로 통역관은 얼굴을 감쌌다. 그러더니 기묘한 억양의 빠른 말투로 다시 쏘아붙였다.
“대위님은 소련 개입군의 대표로 사령관 동지와 함께 훈장을 수훈하실 겁니다. 공화국 서기장… 아니, 총리님께서 직접 훈장을 주실 테니 반드시 대표자에 걸맞은 품위를 갖추어 주십시오.”
“예????”
아니, 또 훈장인가?
지난번 스탈린 서기장 동지에게 받았던 인민영웅 훈장의 무게가 새삼스레 느껴졌다. 그의 옷매무새를 다듬고, 새로 훈장을 달 자리를 만들기 위해 훈장들을 정리해 주던 통역관은 인민영웅 훈장을 보고 눈에 이채를 띄었다.
이런 어리벙벙한 촌뜨기 대위가 인민영웅이라고?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보고 니콜라이는 어쩐지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대위도 아니지. 정상적으로라면 딱 병장 정도가 알맞았다. 특진을 거듭한 끝에 임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중대장씩이나 되어 버린 것이다.
“으음….”
통역관을 따라 작은 통로로 가자 시상식이 이루어지는 듯한 거대한 홀이 나왔다. 그의 위치를 안내해 준 통역관은 그대로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어? 왔나? 앉게.”
“예? 예!!!!”
그의 자리 근처에는 소련군 군복을 입은 사람이 보여 있었다. 앉으려고 다가가던 니콜라이는 옆자리 아저씨가 손짓하는 것을 보고 걸음을 빨리하다 그의 계급장을 보고 말았다.
‘왕별…?’
얼굴은 젊은데, 가슴팍에는 훈장이 가득했고 어깨에는 왕별이 달려 있었다. 얼굴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사령관님이…?’
대체 왜 일개 대위 따위와 사령관을 옆자리에 배치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금방 알 수 있게 되었다.
“하하하, 왜 그렇게 긴장했나? 그냥 훈장 하나 더 주려는 걸세.”
“시, 시정하겠습니다!”
“허허허허, 젊은 친구가… 뭘 그리 긴장을 했나? 훈장 많이 받아 봤나 본데 별거 없다는 거 자네도 알지 않나?”
사령관은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농담을 하다가 니콜라이의 가슴팍에 달린 인민영웅 훈장을 보고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나저나 그 인민영웅은 나도 없는 건데, 자네는 어디서 받았나?”
“예! 아… 베를린 점령 당시 자그마한 공을 세웠습니다.”
“아…!”
체르냐홉스키 사령관은 껄껄 웃으며 니콜라이의 등짝을 두들겼다.
“이거, 유명하신 분을 보게 되었군!”
행사를 하는 동안 체르냐홉스키 대장은 계속 니콜라이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고향은 어디냐, 결혼은 했느냐, 나이는 몇이냐….
계속되는 질문과 긴장에 니콜라이의 정신이 지쳐 떨어질 때쯤, 사령관은 당연하다는 투로 툭 던졌다.
“그래서, 말뚝 박을 생각이지? 자네 나이에 이 정도 실적이면… 아마 감군 때문에 나처럼 빠르게 올라가는 건 어렵겠지만. 하하하하!!”
“저… 그, 이제 고향에 돌아가려 했습니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니콜라이의 말에 사령관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왜? 예정된 출세를 놔두고? 대체 왜? 라는 표정을 너무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제 분수와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인 것 같습니다. 이 훈장들도… 운이 많이 따라 주었을 뿐이지, 제가 잘나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젊은 친구가 겸손하기까지 하군! 하하하하하. 좋아, 좋아. 흐음….”
체르냐홉스키는 턱을 매만지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다시 잠깐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럼 집에 한번 다녀와 보게. 사령관 재량으로 특별 휴가를 보내 줄 테니, 한번 가서 생각해 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전역원을 제출하게. 그리고 자네 같은 장교들을 위해서는 특별히 준비된 게 있으니, 휴가를 다녀와서 군대에 계속 있겠다면… 재미있을 거야!”
사령관이 말을 끝내자마자 단상 앞에서 체르냐홉스키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령관은 마지막까지 껄껄 웃으며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