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
210화
“각 중대와 소대마다 항명이 터지고 있습니다 장군! 어찌해야 할지….”
“….”
“외인부대는 상대적으로 항명 건수는 적으나 엘리제궁 주위에서 정부… 아니, 친공 부대들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격렬한 저항을 하고 있습니다. 외인부대는 일부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총리의 행방은….”
쿠데타는 실패했다. 르클레르는 알 수 있었다.
모리스 토레스가 누구인가, 그 서슬 퍼런 나치의 눈을 피해 숨어 레지스탕스 활동을 전개하고 결국 파리를 해방시킨 자다.
어설픈 쿠데타군의 첩보원들이 과연 숨어 버린 레지스탕스를 찾아내 획득한 정권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 아니, 안정이나 시킬 수 있을까?
친공산당 노조들은 벌써 알음알음 숨겨 두었던 무기를 들고 파리로의 진군을 준비한다고 했다. 수도 주변의 부대들은 사태를 몰랐던 척 관망하다가 어느 쪽에 붙을지 간을 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추가적인 병력의 동원이 어려운 쿠데타군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장군들은 절망한 듯 고개를 깊이 숙이거나 손에 얼굴을 묻고 아무 말도 없이 초조하게 구둣발만 바닥에 딱딱 부딪혔다. 애타게 르클레르를 올려다보았다가, 그마저도 아무 대책이 없는 것 같자 다시 고개를 숙이며.
‘항복이냐? 도주냐?’
햄릿이라도 된 것마냥 그는 고민했다.
지금 항복한다면 처형을 면할 수는 있을까? 그는 새삼 페탱 원수의 결단을 존경하게 되었다.
페탱 원수는 자기 자신 한 사람만을 처형하고 프랑스를 위해 쓰일 다른 이들을 살려 두어 달라고 노구를 이끌고 눈물로 사정했다. 재판정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노원수의 모습은 눈에 선했다.
하지만 그는 이따위 비겁한 버러지들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친 꼴이 되었다.
“하아아….”
항복하여 자비를 빌거나, 도주하여 구차한 목숨을 보전하느니 그냥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소련은 항복한 독일의 장군들을 갖은 혐의를 가져다 붙여서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대통령으로 지명받았던 총사령관 모델은 그렇다 쳐도 만슈타인, 구데리안, 호트, 렌둘릭, 만토이펠에 소련과 싸운 것도 아닌 팔켄하우젠까지!
소련의 복수심은 집요하고 철저했다. 그리고 프랑스를 이제 제 뜻대로 요리할 기회가 생겼으니 절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홀터의 권총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무엇에 홀린 듯 권총을 꺼내 살펴본 그는 어쩐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평소 딱히 권총에 관심을 가지지 않다가, 이제야 알아챘다. 영국제 스미스 앤 웨슨 10형 권총은 묵직하고 차가운 광택을 그의 손에서 발했다.
빌어먹을 라이미 새끼들.
영국 첩보부 놈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는 지원을 제시하며 나름의 조건을 내놓았다.
프랑스 애국봉기군, 타칭 쿠데타군이나 영국이나 추구하는 목표는 비슷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지의 식민지를 유지하고 열강으로서 세계에 국가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것. 소련과 미국이 식민지를 뜯어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면 지난 두 대전을 함께 싸워 온 두 나라가 손을 잡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자금과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우리나라 내에서 라이미 첩보원들이 설치는 꼴이 아니꼽긴 했지만 비시 시절 짱박아 둔 인원들이라니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부터가, 영국 망명정부를 따라다니며 ‘자유 프랑스’랍시고 깝죽대고 다녔던 게 아닌가!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영국의 손에 놀아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위대한 프랑스’는 그냥 광대놀음이 된다. 소련의 손에 놀아나지 않겠다며 한 발버둥이 다른 나라도 아니고 영국 손아귀로 떨어지는 꼴이라니!
“사, 사령관님 급보입니다!”
“그래, 인제 와서 뭔가.”
중년의 통신장교 하나가 사령부로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외쳤다.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의 장기판 위의 졸이 날뛰느니만 못했을 수도 있는데.
“소, 소련군이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아… 그래.”
르클레르의 손이 다시 오른쪽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이라도 이 빌어먹을 권총으로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싶어졌기에.
* * *
“아침 바람에 꿈이 휘날아 오르는 곳에서! 새날이 주저하며 기지개 펴는 곳에서~”
“사람들은 우리 기갑사단에 귀를 기울이네~ 전차들의 낮은 포효성에, 거칠게 울리는 소리에!”
전차부대가 달리기 시작했다. 전차병들은 흥겹게 새로운 군가를 부르며, 어떠한 저항도 없는 평원을 질주했다.
라인란트 공화국에 진주했던 소련군 기갑부대는 <사회주의 형제국의 간곡한 부탁에 따라> 프랑스 내부에서 발생한 불순분자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했다.
제4근위기계화군단을 선두로 한 소련군 부대는 순식간에 국경지대를 돌파했다. 처음에는 국경경비대가 막아섰지만, 상부에서 보내온 명령서와 수도의 상황에 대해 알게 되자 태도가 일변하여 소련군에게 협조하기 시작했다.
“그 빌어먹을 반동분자 새끼들은 꼭 머리통을 깨부수고 싸그리 쓸어버리십쇼! 프랑스 만세!”
“아, 하하, 예… 와아아 프랑스 만세~”
소련군은 프랑스인들이라고는 딱히 만나 볼 일이 없었기에 그들에게 별다른 악감정은 없었지만, 괜히 꿀 빠는 독일 주둔군 임무에서 차출되었다는데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았다.
전쟁도 끝났는데 고향은 가지도 못하고, 전선에서 굴러야 하는 신세라니!
제4근위기계화군단 선두의 중전차부대를 지휘하는 중대장,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페트로프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할 일이 많은데… 쩝….”
“예? 중대장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 아니네….”
중대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사였던 그에게 너무나 거대한 직책이었다. 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십수 대의 집채만 한 전차들이 오롯이 그의 관할하에 있다니! 그가 무슨 제스처를 취하기만 해도 그의 주변에 있는 수많은 병사들이 긴장했다.
니콜라이는 생경한 듯 가슴팍의 훈장을 매만졌다. 스탈린 서기장 동지께서 직접 달아 주신 인민영웅 훈장은 그가 받았던 그 어떤 훈장들보다도 높은 곳에서 금빛 광채를 뽐냈다.
‘내가 이걸 받을 자격은 되었나…?’
그는 운이 좋았다. 운이 좋아 살아남았고, 운이 좋아 장교가 되었으며 그 베를린 문 위에 깃발 하나 꽂았다는 이유로 특진해 대위가 되었다.
소위로 소대장 노릇을 하는 것만 해도 과분한데 중대장이라니? 몇 배로 늘어난 책임과 업무 때문에 압사당할 지경이었는데 이제는 전쟁 이후 첫 군사적 충돌에까지 끼어들고 말았다.
“자네 같은 우수한 장교, 인민 영웅이 우리 부대에 있어 참 영광이라 생각하네! 앞으로 자네의 활약 기대하겠네!”
심지어 여단장은 그를 따로 불러 그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여단의 핵심 전력인 중전차들을 지휘하는 중대장 보직에다가 초짜 대위인 그를 꽂아 넣은 데는 다 이유가 있던 것 같았다.
애초에 군사학 지식이 부족한 현지임관 장교인 그를 참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은 배려라고 봐도 좋았겠지만.
“어? 중대장님, 저기 웬 우리 전차가…?”
“엥? 그게 무슨 소리냐?”
갑자기 조종수가 딴소리를 하는 바람에 니콜라이는 상념에서 화들짝 깨어나야만 했다.
조종수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저 앞을 가리켰다.
“저… 저거 T―34 전차 아닙니까?”
“그렇네?”
분명히 프랑스 영토로 진입하는 선두부대의 임무는 니콜라이의 여단, 니콜라이의 대대, 니콜라이의 중대가 부여받았다.
그러니 그의 앞에는 원칙적으로 아군이 하나도 없어야 했다. 그런데 웬 T―34 전차가 떡하니 앞에 나타나 있는가?
쾅! 심지어 저놈들은 어딘가를 향해 포를 발사하기까지 했다. 니콜라이의 머릿속을 온갖 의문이 가득히 메웠지만, 그 때문에 중대원들에게 아무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이… 이대로 갑니까? 중대장님?”
“어, 어, 어…?”
육중한 덩치에 비해 신속한 부됸늬 전차는 생각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T―34 전차 앞으로 부대를 이끌었다.
결국 니콜라이의 중대는 T―34 부대 앞에서 멈춰서야 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니콜라이는 어떻게든 파악하기 위해서 전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달려 나온 수십 명의 프랑스군과 마주쳐야만 했다.
“Je me rends!! Je me rends!!!”
“????”
빠른 속도로 뭐라뭐라 이상한 소리를 떠들며, 그들은 니콜라이의 앞에서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며 읍소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달려드는 바람에 그가 전차로 밀려날 지경이었다.
프랑스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니콜라이는 당황해 권총을 꺼내어, 하늘을 향해 총을 한 발 쏘았다.
탕! 총성이 울려 퍼지자, 그의 앞에서 애걸하던 프랑스군은 모조리 땅에 바싹 엎드렸다. 그나마 한 명이 니콜라이가 알아볼 수 있는 짓을 했다.
“이놈들, 왜 항복하는거지???”
몸놀림도 재빠른 그 병사는 웃통을 벗어 던지고, 안의 흰 속옷을 벗어 마치 펄럭펄럭 깃발처럼 흔들었다. 하늘로 두 손을 번쩍 든 채 뭐라뭐라 지껄이는 내용은 어쩐지 간단하게 배웠던 이탈리아어의 ‘항복’(Mi arrendo)과 비슷했다.
하지만 니콜라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이 무리는 내게 항복하는가? 이놈들은 대체 정체가 뭔가?
* * *
“하… 이들이 그 흉악한 반란군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대위님!”
결국 그들의 정체는 몇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뒤따라오는 여단 본부에 무전통신을 넣어 상황을 설명하고 통역이 필요하다고 하자,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 결국 통역관이 도착했다. 물론 그 통역의 프랑스어 실력 역시 일천한 수준이었기에 한참 또 시간이 걸렸지만.
“요약해 보지. 그럼… 이들은 반란을 일으키러 파리로 가던 중, 반란에 참여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또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래서 접근하던 우리 부대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부대를 보고 나니 이기지 못할 거라 겁에 질려 항복했다, 이건가?”
“바로 그렇습니다 대위님!”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니콜라이의 감상은 그랬다. 뭐지? 이게 군대인가?
소련군에게 패배한 독일군에게 패배한 프랑스군다웠다. 그마저도 서유럽 제일의 육군대국이라고 깝죽거리다가 영국과 손잡고서도 단 6주 만에 털려 나갔다는데 어쩐지 그것이 이해가 되었다.
“으음… 그럼 우리는 계속 진격하면 되나?”
“그렇습니다! 현재 파리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군의 구원부대가 최대한 빨리 도착하기를 바란다고….”
“알겠네. 그럼 우리는 다시 진격하도록 하지.”
이런 잡졸들을 데리고 하는 격렬한 전투라 봐야 사춘기 계집애 둘이서 머리털을 쥐어뜯고 손톱으로 할퀴는 꼴밖에 안 될 것 같았지만 아무튼 명령은 명령.
전쟁 같지도 않은 이번 전쟁에서 공훈 같지도 않지만 공훈은 세웠으니 어쩌면 특별 휴가를 받아 고향에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할 일이 많았다.
부모님께 카티아를 소개해 드려야 했고, 또 분수에 맞지도 않는 군인 노릇은 때려치우고 고향에서 농사나 짓고 싶었다.
그때는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탈출하고 싶던 농사일이 이제는 왜 이리 또 그리운지!
“진격 앞으로! 목표는 파리다. 자, 가자!”
“우라! 우라! 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