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206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대통령님. 우리 소련은 미국과 루즈벨트 전 대통령에게 빚진 것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폴리오에 고통받았고 앞으로 그럴 수 있는 수많은 미국인들을 대신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월리스의 눈은 기쁨으로 반짝였고, 입가는 순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보았지만 정치인이기에는 너무 이상주의적이고 순수한 사람 같았다. 그러니 이상을 외치는 소련에 이렇게 우호적일 수 있었겠지만.
맥아더, 매카시, 그리고 트루먼 같은 다른 보수파 정객들은 이런 점을 이용하여 그의 약점이며 꼬투리를 잡곤 했다. 원래라면 보수파들을 위한 작업을 해 주었을 FBI의 반공파 국장 후버 같은 경우는 소련에게 이미 약점이 잡혀 있었기에 입을 닥치고 있긴 했다.
오히려 거꾸로 보수파들의 약점을 파헤쳐 보고를 올렸다는데 월리스는 ‘공작정치는 안 된다’라며 이 약점을 쥐고 거물들을 압박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향후 우리 두 나라가 협력하여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보여 주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서기장님에게 팬레터가 몇 통이나 도착했는지 아십니까? 하하하하하!”
“그것 참, 재미있군요!”
회담은 시종일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미국 대외개입론자들의 숙원이던 ‘구속력 있는 국제기구’의 창설에도 두 국가는 서로 긴밀히 협력할 수 있었다.
물론 사실상 다른 ‘강대국’들보다도 한 차원 위의 국력을 가진 만큼, 미소는 다른 열강들과 같은 반열로 내려갈 생각이 없다는 점에서 특히 협력하기가 쉬웠다.
“상임이사국은 우리 두 나라만이 하고 다른 국가들을 임기제 이사국으로 두자, 이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몇 개의 그룹을 두어 차등을 줄 수는 있겠지요.”
국제연맹, 즉 유엔의 전신은 4개의 상임이사국을 두었다. 미국이 윌슨 시절 의회의 부결로 가입하지 못했기에, 1차대전의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가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여기서는 영프는 독일에 짓밟혀 잠시나마 괴뢰국이 세워져 독일의 전쟁수행에 협력했다. 또, 중국은 승전국이라기엔 독일과 싸우지도 않았고 일본의 발목 정도나 붙들고 늘어지다가 소련에 의해 결정타를 입은 일본 육군을 정리하는 데 협력했을 뿐이다.
마침 핵무기를 가진 것도 미국과 소련 2개국뿐이며 국력도 한참 차이가 나니 둘만이 상임이사국이 되어도 될 것이다! 이 주장에 월리스는 혹하는 것 같았다.
사실 따져 보자면 궤변이나 다름없었다.
‘핵무기를 언제 개발할 지는 모르겠지만….’
소련 역시 국력으로 보면 미국과 한참 차이 나는 상태였다. 원 역사보다 피해를 훨씬 적게 입었으니 대략 2:1쯤 될까?
힘으로만 보면 미국이 그냥 우리 혼자 상임이사국 하고 다 해처먹겠다고 나와도 딱히 막을 방법은 없었다. 끽해야 공산권 국가들을 끌고 이탈해 우리만의 국제협력기구를 설치할 뿐.
그러나 월리스는 미국이 아직 혼자서 세상을 주무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영국과 프랑스? 영국은 지금 남아시아 식민지들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었기에 세계평화와 민족자결을 주장하는 국제연합의 상임이사국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또 하나의 전승국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는 국력의 격차도 있었거니와 공산당의 집권으로 시뻘겋게 물든 상태.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뭔가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으음… 그렇다면 비상임 이사국을….”
“영프중 등 국가에는 거부권이 없는 지위를 주고, 다른 국가들은 비상임이사국에 출마할 기회를 대륙별로 분배하면 어떻겠습니까?”
상임이사국, 핵확산 방지 조약, 구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의 신탁통치 같은 민감한 안건이 오가는 와중에도 월리스는 전반적으로 소련의 ‘제안’을 들어 주는 모양새였다.
월리스나, 아니면 미국인들이나 10년, 20년 후의 세상이 어떠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나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어느 정도의 그림을 가지고는 있었다.
‘서아시아/북아프리카, 남아시아, 동아시아 TO를 분리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직은 모르겠지?’
실제 역사에서 친미 친영 괴뢰국가들 일색이던 중동은 이스라엘 건국 이후 계속된 충돌 속에서 성향이 완전히 뒤집혔다.
예컨대 영국의 괴뢰국이던 이집트 왕국이나 이라크 왕국은 쿠데타로 인해 아랍사회주의자들이 집권했다. 대표적인 친미 왕정인 팔레비 왕가의 이란은 모사데크 집권기 친소로 기우는 듯하다 쫓겨났지만 다시 이슬람 혁명이 터지며 반미로 확 넘어가 버렸다.
이스라엘은 유태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친소인 척하다가 친미로 넘어가기도 했고, 이집트의 사다트는 다시 친미로 넘어가고… 이런 식으로 정권이 뒤집히고 엎어지고 하는 와중 양 강대국의 영향력은 등락을 반복했다.
소련은 그런 변동을 전제로 어느 정도 계획을 짤 수 있었다. 반면 미국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예측할 수도 없었다.
“아무튼 미국의 국익과도 전반적으로 일치될 듯하군요. 추가적인 검토는 실무자들에게 위임하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대통령님.”
이 정도면 정상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끝났다. 실무자들에게 검토를 맡기면 그들은 또 알아서 세세한 부분을 가지고 밀고 당기며 적절한 결과물을 만들어 올 것이다.
나는 가이드라인을 내려 주었고, 아마 외교부의 협상 전문가들이 나보다 설득 같은 건 더 잘할 테니.
월리스는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렸는지 하하, 서글서글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자리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저는 서기장님이 참 부럽습니다.”
그것이 안 선다는 것을 알면 조금 덜 부러워지겠지만. 아무튼 월리스는 한탄하듯 그렇게 말했다.
“아마 저 워싱턴의 빌어먹을 하이에나들이 고 루즈벨트 대통령님의 수명을 몇 년은 줄여 놓았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장례식에서는 마치 자기네들이 그분의 적자(嫡子)인 것처럼 행세하는 꼴이란….”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 위대한 분이….”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생전 스탈린 서기장처럼 통쾌한 숙청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맥아더를 굴라그로 보내 버리고, 매카시의 뒤통수를… 앗, 이건 실언했습니다.”
“하하하하하….”
크흠, 어쩐지 뒤통수가 간질거렸다. 이 세계에선 다들 좀 이상해져 버린 것인가?
히틀러뿐만이 아니었다. 루즈벨트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싸그리 모아다가 중서부 사막에 가두어 버렸다. 처칠이나 이든 같은 영국 수상들도 필요 이상으로 과격하게 굴었다. 특히 식민지에서.
“아무튼 건강은 잘 보전하십시오. 저도 요새 나이를 먹다 보니….”
“그러십니까? 딱 보기에도 정정하신데요! 저는 이제 최고지도자라는 자리의 무게를 약간이나마 실감하는 중입니다. 후… 그놈의 매카시….”
“음? 그자가 또 무엇을 저질렀습니까?”
또 매카시 이야기를 하며, 월리스가 이를 박박 갈았다. 대체 또 뭐를 했단 말인가?
“아직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자가….”
* * *
“이 백신이라는 것은 빨갱이들의 음모입니다! 빨갱이들이 미국인들 사이에 병을 뿌리려고 만들어 낸 것입니다! 애국지사들이여! 백신을 반대하십시오!”
매카시는 오른쪽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그의 지지자들 역시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며 외쳤다.
“빨갱이들을 죽여라! 죽여라!”
“이것은 공산주의적 무신론과 우리 미국의 기독교적 가치관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이겨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들이 우리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각종 구호가 울려 퍼졌다. 대부분은 공산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 내지 증오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저에게 하나 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이 미국을 수호하고자 한 용감한 학자 하나가 제게 알려 준 사실입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이 미국의 소중한 과학기술을 대학과 정부연구소에 숨어든 스파이들이 소련으로 빼돌렸다고 합니다! 빨갱이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사람들의 아우성이 점점 커졌다. 그렇다, 그럴 리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인 미국의 과학기술이 사악한 빨갱이들의 소굴인 소련보다 뒤떨어질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미국보다 엄청난 무기를 먼저 개발했다면, 분명 내부의 첩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매카시의 주장이었다. 그의 말이라면 물로 술을 만든대도 믿을 그의 열성적 지지자들은 다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꺼져라! 도살자는 꺼져라!”
“매카시 의원 만세! 맥아더 장군 만세!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자! 이제 우리의 주장을 저 무지한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행진을 시작합시다! 미국을 위하여! 빨갱이를 죽여라!”
집회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각종 과격한 구호가 쓰인 플래카드를 휘두르고 시끄럽게 구호를 외쳐 대는 그들에게 사람들의 이목만큼은 잔뜩 쏠렸다.
“어머, 어머, 저것 좀 보래요?”
“백신이 소련의 음모다… 그런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격분자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수군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설마 일말의 근거도 없이 저런 소릴 하겠냐며 의심했다. 항상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심정으로, 시민들은 매카시의 주장을 지켜보았다.
“진짜로 소련이 뭔가 있기는 한가 본데?”
“그렇다니까? 내가 마이클네 엄마한테 들었는데 말이지…?”
“어머머머머, 그 백신이라는 거 진짜 우리 애들한테 맞히면 안 되겠다! 그걸 맞으면 뇌가 변형되어서 공산주의자가 된다고?”
온갖 기괴한 소문들이 입에서 입을 타고 퍼져 나갔고, 황색언론들이며 각종 관심을 갈구하는 종자들이 이걸 받아쓰며 제 나름대로의 상상을 더했다.
[백신의 위험성?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
[수두를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 지금 당장 지역 수두 파티에 참여하세요]
여기에 이상한 사이비들이 달라붙었다.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은 시대에 ‘신문에 나왔다’나 ‘TV에서 그러더라’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각종 사짜들이 지역 TV 프로그램이나 신문에 광고를 실어 자기들의 신묘한 대체의학요법을 홍보했다.
역시, 시민들은 설마 아무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저렇게 하겠냐며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직장이나 모임에서, 사람들은 그런 대체요법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백신은 다 빨갱이들의 음모래요! 그래서 저는 존스 박사님의 이 약을 우리 토드에게 복용시켰어요. 그랬더니 잔병치레도 없잖아요?”
“어머, 어머, 진짜 그래요? 그게 효과가 있구나! 저도 한번 연락을 해 봐야겠어요. 우리 남편도 때만 되면 독감에 걸려서 골골대는데….”
그 약이 뭘로 만들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어떻게 내는지 따위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슨 ‘박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TV에 나왔다, 같은 내용들은 엄청난 권위를 부여했다.
매카시 의원도 그러지 않았나?
“이 나라는 빨갱이들이 곳곳에 숨어 사보타주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