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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205화 (205/300)

# 205

205화

“우리는 결코 그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시대에 우리는 합중국을 덮친 두 번의 거대한 파도를 이겨냈습니다. 우리는… 우리는… 흐윽….”

추도사를 읽던 영부인, 엘리너 루즈벨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옆에 서 있던 월리스는 허겁지겁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FDR은 더 이상 권력자가 아니었지만, 수천,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의 장례식에 운집했다. 의장대는 미국 국기에 덮인 관을 운구해 장지로 이동했고, 군중은 검은 정장을 갖추어 입고 가장 위대한 미국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여섯 마리의 백마가 끄는 마차는 결국 인디펜던스 홀 앞에서 관을 내려놓았다. 사람들은 줄을 지어 흰 꽃을 손에 들고 조문의 차례를 기다렸다.

“꽃이요! 꽃 사세요!”

“나 한 송이 주시오.”

그 와중에도 약삭빠른 이들은 검은 옷을 입고 한 바구니 가득히 흰 조화(弔花)를 팔았다. 순식간에 꽃 무더기는 사라지고 돈 무더기가 되었지만.

FDR은 수많은 이들에게 진심 어린 존경을 받았다. 미국의 가장 어려운 시대, 대공황의 시기를 뉴 딜 덕분에 이겨 냈다. 또 한 번의 세계대전에서 두 번의 기습을 당하고도 결국 이겨 내는 데 성공했다.

그의 시대에 미국은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이 되었으며, 자유세계의 수호신이 되었다. 단 10여 년 전만 해도 직장을 잃고 배를 곯으며 일자리를 찾던 사람들은 FDR의 시대를 놀라운 진보와 발전의 시대로 기억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각자 FDR의 시대를 추억하며 한마디씩을 늘어놓았다.

“뉴 딜 정책 덕분에 우리는 월세방이라도 얻을 수 있었지….”

“하하, 그 테네시강 댐 공사 말인가? 나는 저기 플로리다로 갔는데….”

“비록 반―린치 법안을 통과시키지는 못했지만 우리 흑인들도 제대로 된 교육이며 일자리를 얻을 수는 있었소.”

단상 위에서는 유명한 정치인이며 기업가들이며 한가락씩 하는 이들이 각자의 소회를 늘어놓았다. 아마 FDR에 대한 추모 열기를 자신에 대한 지지율로 넘겨 보려는 수작이리라.

그들은 FDR의 정책과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비슷하고 생전 그가 자신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를 끊임없이 군중에게 어필하고자 했다.

FDR의 사진 앞에 수북한 꽃 무더기가 쌓여 젊은 그의 사진이 더 이상 보이지도 않게 될 무렵, 한 사람이 단상에 올랐다.

그를 본 사람들은 깜짝 놀라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웅성거림이 인파 사이로 퍼져 나갔을 무렵, 단상에 올라간 키 작은 사내는 어설픈 영어로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조금 늦게 왔습니다.”

사람들은 멀리서도 그의 복장과 수염만으로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서기장이??”

워싱턴이나 타국의 여러 유력 정치인들이 왔다 가기는 했지만, 스탈린이 직접 이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더욱 놀랍게도, 서투르나마 영어로 사람들에게 연설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대통령이자, 추축국의 위협을 함께 상대한 전우인 루즈벨트 씨의 죽음을 진심으로 아쉽게 생각합니다. 그의 여러 탁월한 선택으로 우리는 함께! 나치 독일과 일본을 거꾸러트렸습니다. 아울러 전쟁에 함께한 여러 미국인들에게도 감사를 보냅니다.”

“뭐야, 영어를 왜 저렇게 잘하지?”

“그, 그러게?”

사람들은 이곳저곳에서 술렁거렸다. 진한 러시아 억양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의외로 스탈린의 영어는 유창했다. 사실 서기장을 따라온 소련 관료들 역시 충격을 간신히 숨기며 연설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 영어를 배우신 거지…?’

‘아니, 저분은 해외에 나가 본 적도 없는데?’

아무튼 이 사실은 미국인들에게는 대단한 호감을 자아냈다. 자국어를 타국의 최고위 인사가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사실은 꽤나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언젠가 고인이 된 루즈벨트 대통령을 직접 만나 이야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었지만, 그는 최고의 전우였지요. 또, 나는 항상 그의 통찰에 감탄하곤 했습니다. 슬프게도 병마가 그를 너무 일찍 데려가 버렸습니다.”

어조의 고저 없는 평탄한, 국어책 읽기 같았지만 그 안에는 진실된 아쉬움이 가득 들어 있었다. 최소한 워싱턴의 하이에나 떼들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이제서야 그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할 바 없던 그의 지성과 통찰은 더 이상 우리 곁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준비한 작은 ‘선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선물을 받아들고 놀라는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더 이상 어렵게 되었습니다.”

“선물? 무슨 선물이란 말인가?”

사전 통보를 받은 적 없는 월리스부터 숨죽여 연설을 듣던 평범한 사람들까지 스탈린이 이야기하는 ‘선물’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혈맹 미국의 큰 손실에 조의를 표하며, 이만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원한 안식이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찰칵! 찰칵! 펑!

대통령의 장례식을 취재하러 왔던 기자들은 뜻밖의 특종에 카메라 플래시를 몇 번이고 터트렸다. 사진기가 찰칵거리고 플래시가 펑펑 터지는 와중 스탈린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혹시나 그의 코멘트를 들을 수 있을까 하던 몇몇 용감한 기자들은 단상 아래로 내려온 서기장을 향해 녹음기를 들고 달려갔지만, 거구의 경호원들에게 막히고 말았다.

“서기장님? 서기장님! 대체 무슨 선물이십니까?!”

“이, 이거 놔! 아니, 놔 주세요! 으아아악!”

군중은 술렁거렸고, 정치인들은 자신에게 왔어야 할 관심을 빼앗아 간 스탈린에게 낮은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지금보다 관심이 더 쏟아진다면 아마 압사당했을 월리스는 그저 순수하게 스탈린의 ‘선물’이라는 게 궁금해졌다.

미국은 소련에 막대한 물자를 보내 주었다. 소련은 대신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 결정타를 먹임으로써 보답했지만. 미소의 관계는 세계를 반분하는 초강대국 간의 관계에 맞지 않게 서로 우호적이고 호혜적인 관계였다.

그런데 핵무기를 보내 주면서도 대중에는 기밀을 유지한 소련이 공개적으로 이렇게 자랑할 만한 선물은 대체 무엇일까?

이 다음 예정된 정상회담이 그는 참을 수 없이 기다려졌다.

* * *

<위대한 대통령을 기리다! 소련이 질병 퇴치 협력을 제안!>

장례식 다음 날, 모든 일간지의 헤드라인에는 FDR의 장례식에 대한 내용이 걸렸다. 그리고 조금 발이 빠른 신문들은 소련이 가져온 ‘선물’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었다.

주미 소련대사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소련의 이번 선물에 대해 짧은 기고문을 실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루즈벨트 대통령의 건강에, 폴리오(소아마비)가 악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폴리오로 죽거나 불구의 몸이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 소련은 이를 퇴치할 수 있는 백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혈맹국의 지도자이자 폴리오의 희생자였던 루즈벨트 대통령을 기려 우리 소련은 소아마비 백신을 미국에 무상으로 공급하고자 합니다.]

폴리오, 즉 소아마비는 전국적으로 매년 1만 건이 넘는 발병 사례와 1천 건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최악의 전염병 중 하나였다.

이 시대 대부분의 전염병은 위생수준의 향상과 약제의 개발로 수그러들었으나 폴리오만큼은 학자들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몇몇 대학의 공동연구 결과 폴리오가 건강한 보균자를 통해 전염된다는 것만은 알려졌었다.

그러나 신경계에서 배양되는 이 병원체를 어떻게 배양할 것이며, 실제로 실용화 가능한 백신은 어찌 생산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우리 소련은 이 백신의 생산기술 및 시설을 무상으로 미국에 제공할 것입니다. 아직은 제조설비가 부족하여 즉시 공급할 수는 없지만 미국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다른 국가들에게도 제공할 것입니다.”

하지만 소련은 백신 완제품 제공 수준이 아니라, 기술 및 생산설비까지 미국에는 무상으로 제공할 것을 선언했다.

“혹시… 소련이 이 조치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미국이 여력이 된다면, 세계적으로 소아마비 백신을 공급하는 작업에 협조해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또, 우리 소련은 올해 6월 조인식이 예정된 국제연합에서 전 세계의 건강 증진을 위한 세계보건기구 창설을 제안할 예정인데 이에 지지를 표명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기자회견에서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장관과 콜론타이 주미대사는 담담한 얼굴로 충격적인 내용들을 이야기했다.

분명 소련은 미국에게 많은 것을 얻어가기는 했지만 그에 준하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엄청난 양의 황금, 전쟁에서의 승리, 그리고 핵무기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저 모든 것을 무상으로 미국에 제공하며 그저 ‘대의를 위한 협력’만을 대가로 요구했다.

몰로토프 외무장관은 소련의 의도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두 강대국이 협력하는 것으로, 수많은 일을 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위협하는 전체주의의 공격을 우리는 함께 저지했고, 또 다른 분야로도 협력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폴리오 토벌은 소련과 미국이 협조할 수 있는 수많은 분야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 소련은 이를 통해서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이 있습니까?”

젊은 기자 하나가 손을 들고 그렇게 묻자, 몰로토프와 콜론타이는 둘 다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소련은 태양에 특허를 매기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인류의 공익을 위한 기술을, 왜 우리가 비밀로 한단 말입니까?”

기자는 입을 닫았다. 몰로토프의 대답이 끝나자, 카메라들의 플래시가 펑펑 터졌다. TV 앞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수많은 미국인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빨갱이… 아니, 공산주의자 친구들은… 대단하군.”

“그러게. 빨갱이들이 생각보다 나쁜 게 아닐지도 모르겠네.”

가장 먼저 지지성명을 내놓은 것은 미국 폴리오생존자 협회였다.

“우리 협회는 소련의 이 대승적인 결단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동안 각 학계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폴리오를 퇴치하기 위한 노력을 해 왔으나, 실마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이 놀라운 발견을 가장 먼저 해냈을 뿐만 아니라 공익을 위해 사용할 것을 천명했습니다. 이는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희망의 빛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대변인은 기자들 앞에서 벌떡 일어섰다.

“소련 만세! 스탈린 만세! 미국과 소련의 형제애여, 영원하라!”

수천 명분의 백신이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날아왔다. 수만 명분이 동프로이센의 부됸늬그라드항에서 선적되어 미국을 향해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월리스는 그의 취임 후 첫 공적 행보이자, 첫 정상회담에서 스탈린의 늙고 주름진 손을 꽉 붙잡았다.

“서기장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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