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204화
인도에서 폭풍이 몰아닥치고 있을 무렵, 지구 반대편의 미국은 생각보다 조용했었다.
“쉿, 조용히 하십시오. 당신이 본 내용을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되오.”
“예! 예! 아, 알겠습니다.”
육중한 체구에 검은 양복을 둘둘 만 떡대 경호원이 털이 부숭부숭 난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왜소한 체구에 바짝 마른 화가는 잔뜩 겁을 먹고 히익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화가는 TV를 거의 보지 않았다. 그는 그럴 만큼 부유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주로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이것저것을 주워들었을 뿐이었다. 지난 12년간 대통령이었던 FDR은 앞으로 4년 임기가 더 남아 있었고, 그는 언제까지나 대통령일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럴 수가…?’
그의 기억 속에 대통령은 언제까지나 카멜 담배를 물고 활짝 웃는 12년 전의 그 사람이었다. 지금 그의 눈앞의 늙고 지친, 금방이라도 죽어 나자빠질 것만 같은 이가 아니라.
“으음… 왔나?”
“예! 대통령 각하. 오수(午睡)는 괜찮으셨습니까?”
기록화를 남기기 위해 조지아의 별장까지 온 화가 앞에서 FDR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몽사몽 헤매고 있었다. 경호원은 익숙한 것인지, 그가 일어나는 것을 부축했다.
휠체어에 간신히 앉은 FDR을 밀고, 경호원이 화가 앞으로 다가왔다.
“…휠체어는 생략해 주시오.”
“예? 그…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잔뜩 검버섯이 핀 얼굴과 축 처진 눈 밑의 다크서클과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얼굴도 알아서 생략하라는 그 말투를 못 알아들을 화가가 아니었다.
캔버스 앞에서 밑그림을 그리며, 알아서는 안 될 것을 안 것이 아닐지 손을 떨던 화가는 문득 뭔가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각하…? 각하!”
“…머… 머리가 아파… 많이 아파… 의사를….”
두려움에 그의 손이 떨리는 것보다 FDR의 앙상한 손마디가 더욱 벌벌 떨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손을 들어 머리를 짚은 그는 그대로 의자에서 앞으로 무너졌다.
“각하! 각하! 의사를 불러!!”
머리가 아파. 그것은 FDR이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 * *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습니다.”
“!!!!”
급한 용무가 있다는 것을 듣고 백악관으로 돌아온 월리스는 영부인, 엘리너 루즈벨트의 애써 침착한 말을 듣고 얼어붙었다.
방금까지도 소련 대사 및 외교관계자들과 상의하에 새로 창설될 ‘국제 연합(United Nations)’을 어찌 이끌어야 할지를 논의하던 그는 뜻밖의 소식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가 부인을 위하여 뭘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남편을 잃은 슬픔을 꾹꾹 눌러 놓으려는 영부인, 아니, 전 영부인에게 월리스는 가까스로 충격을 숨기고는 말을 더듬지 않는 데 성공했다. 당차기로 유명한 엘리너 루즈벨트는 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히려 제가 뭘 해 드릴 수 있을지 여쭙고 싶군요.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대통령님? 앞으로 하실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온 세상이 제게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로군요.”
월리스는 짧은 한숨을 토했다.
거목이 너무 일찍 무너져 내렸다. FDR은 끝끝내 자기는 4년 임기를 끝마칠 작정이라고 농담을 하곤 했고, 말하는 것은 지켰던 그였기에 월리스 역시 마음속으로 그럴 줄만 알았다.
단 두 달 만에, 45년의 이른 봄에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대통령 자리를 지킨 정치인이자 시대를 풍미했던 거인,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죽고 말았다.
“일단 이 사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 미국의 향후 외교노선, 국제연합의 창설, 소련이 제안한 미소우호 및 협력 증진을 위한 공동사업, 국내적으로는 여전히 미친 듯이 날뛰는 매카시와 당장이라도 군부를 끌고 쿠데타를 일으킬 것만 같은 맥아더까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그는 새로운 직함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영부인께서는 국장을 위해 장례준비를 맡아 주시겠습니까?”
“예, 그러지요. 대통령님.”
엘리너 여사는 꼬박꼬박 그에게 대통령님(Mr. President)이라는 경칭을 붙였다. 그 단순한 단어의 조합 속에서 월리스는 무한한 중압감을 느꼈다.
그는 지지율이 낮았다. FDR의 후광 없이 독자 대선을 치렀다면 아마 듀이나 맥아더를 이기지 못하고, 혹은 둘 다 이기지 못하고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꿈도 꿔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3년 10개월이나 남은 기나긴 임기를 물려받고 말았다. 밖에서는 동남아와 인도 식민지와 제국주의 열강 간의 대립이 점점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고 안에서는 막대한 해외원조에 대한 반대와 극렬 반공주의자들의 마녀사냥이 판쳤다.
“저는… 저는 국회로 가야겠습니다.”
이제 국회의원들과 워싱턴의 들개들은 그를 물어뜯고 무너트리려 할 것이다. 공화당의 들개들은 다음 대선을 위해, 민주당의 들개들 역시 다음 대선이나 당내에서의 자기 입지를 위해.
그래도 그는 버텨야만 한다. 그가 지켜야 할 것들, FDR의 유산과 세계평화와 이제야 가능해질 열강 간의 우호와 협력을 위해.
* * *
“뭐? FDR이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방금 전해진 급보입니다.”
이런, 제기랄. 조금이라도 더 버텨주길 기대했는데….
실제 역사에서도 FDR은 이맘때쯤 죽었다. 그래도 전쟁이 조금 더 일찍 끝난 바람에 업무강도가 낮아져서 버틸 수도 있을까 했더니, 오히려 더 일찍 죽어 버렸다.
빌어먹을 매카시 때문일까? 가슴이 답답해 왔다.
“알겠네. 일단 공식 루트를 통해 소식이 전해지는 대로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어 조전을 보내게. 내가 직접… 미국으로 가도록 하지.”
“예???”
“급작스럽지만 방미 사절단을 준비해보게나. 아무래도 내가 가는 게 제일 좋을 거야.”
사실 루즈벨트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한번은 보고 싶었다.
실제 역사에서든 여기에서든 스탈린과 함께 세계를 반분하여 이끌어 갔던 거물 중의 거물. 스탈린과 루즈벨트라는 두 거인이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1940년대는 인류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고, 우리가 아는 그 세계(The World as we know it)를 만들어 냈다.
다행히도 역사가 뒤바뀌는 바람에 반소주의자인 트루먼이 아니라 친소파인 월리스가 대통령이 되었다.
소련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전쟁에서 이기는 등 지금 가장 강성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가장 취약한 시기나 다름없었다.
수백만이 죽고 다쳤다. 명목상 경제성장률은 엄청나게 높게 집계되고 있었으나 고정 인프라 투자였기에 인민의 생활이 급격하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징집되었다 돌아온 수백만은 금방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으나 불만이 없을 수는 없었다.
“내가 없는 동안… 일단 생필품은 넉넉하게 공급하게. 그것만 해도 절반은 해결될 거야.”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보로실로프, 주코프, 바실렙스키. 자네들은 승전국 군부의 대표로서 참여하도록 하게. 몰로토프가 의전을 총괄하는 것으로 하고 콜론타이 누님과 긴히 협의하여 실무선에서 최대한 빠르게 회담 안건을 처리하도록. 믿고 있겠네.”
“예!!!”
군부 쿠데타를 예방하기 위한 다자간 견제체제는 NKVD가 쪼개지는 바람에 아직 완전하다 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친위군이나 다름없는 스페츠나츠 사령관 겸 정치위원인 보로실로프, 국방장관으로 실전부대는 손에 없지만 군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코프, 그리고 전 총참모장 겸 서부군정 총사령관으로 막대한 실전부대를 손에 쥔 바실렙스키 셋을 모두 데려간다면 안심할 만했다.
이외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 미국과 조율할 문제는 넘치도록 많았다. 지금까지 월리스를 본다면 이쪽에서 핵심적인 사안 몇 가지에 대해 양보한다면 소련의 노선을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관철할 수 있으리라 추측했다.
일단 실무선에서 분석한다면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동안 다시 검토할 시간이 있겠지.
“아! 그리고….”
정치국원들은 내가 강조사항을 말하려 하자 귀를 쫑긋 세우고 주의를 기울였다. 항상 이러고 나서 중요 내용을 공지하는 게 버릇이 되어 그런가?
어쩐지 나도 긴장이 되었다.
“내가 부재중일 동안은 흐루쇼프, 자네가 임시의장을 맡아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게. 알겠나?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예에에???”
“신명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서기장 동지이이!!!”
흐루쇼프는 긴장이 폭발했는지 벌떡 일어서 하늘이 떠나가라 고함을 치며 경례를 붙였다.
현재 흐루쇼프의 직책은 정치국 후보위원 겸 ‘인민생활위원회’의 수석인민대표였다. 새로 만든 직함이기에 사람들은 이 직책이 구체적으로 뭘 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인민 생활 수준의 향상’을 위해 설치된 이 기관은 소련의 수많은 분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먼저 중공업 및 농업 분야에서의 생산관리, 경공업 제품의 해외 수입과 예산집행, 건설, 국토개발, 발전소 설치 같은 것이 흐루쇼프의 손을 지나 내게 올라왔다.
처음에는 이게 대체 뭘 하는 것인지 모르고 숙청의 전조라 생각하며 벌벌 떨던 흐루쇼프는 이제 제법 능숙하게 행정업무를 다루고 있었다.
광부 출신에 문맹이었지만 각고의 노력을 통해 이 자리까지 올라온 흐루쇼프는 다혈질에 급한 성격만 빼면 제법 머리도 좋고 유능했다.
FDR도 죽는다는 것은… 그에게 어쩐지 기대를 걸게 했다.
‘내가 천년만년 이 자리에 있지는 않겠지.’
의사들은 내 건강 수준이 60대 중후반의 그것은 아니라고 몇 번이고 안심을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첨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긴 했지만.
육신의 죽음이 다가올 53년까지는 불과 8년이 남아 있었다. 75세라면 이 시대 기준으로 충분히 천수를 누린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나는 그 이후가 걱정이 되었다.
흐루쇼프, 말렌코프, 주코프 등이 권력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다 이 나라를 말아먹는 게 아닐까? 내 계획대로라면 그때쯤은 미국과 경제력으로는 대등하지 못해도 외교적, 정치적으로는 대등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계획은 시작한 순간부터 엇나가는 게 문제였지만.
분주히 각자의 위치로 달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회의실을 떠나 집무실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거인들의 시대도 저물어 가는군….”
“예? 서기장 동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서실장 포스크레비셰프는 다시 서류에 고개를 박고 검토해야 할 내용에 밑줄을 치기 시작했다.
양차대전은 놀랍도록 복잡해진 사회를 관리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들의 충돌이었다.
1차대전은 제국들 간의 싸움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영프 식민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한 편에, 독일과 오헝, 오스만 제국이 나머지 편에 서서 싸운 이 전쟁은 참여한 제국들을 모조리 몰락시켰다.
다민족 제국인 오헝과 오스만, 그리고 러시아는 사회구조의 후진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산산조각났다. 영프는 조금 더 견고한 체제를 갖추었기에 흔들리는 데 그쳤고, 독일은 흔들리다 못해 극단주의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충돌 속에서 사회를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현대적 의미의 ‘민족국가’들이 탄생했다. 2차대전은 이 민족국가―이데올로기의 싸움이었다. 제국의 군살을 덜어 내고 더 똘똘 강하게 뭉친 민족국가와 충돌한 구 식민제국인 영불은 승리했을지언정 박살 났다.
결국 유사 제국주의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스탈린의 소련과 루즈벨트의 미국. 그러나 두 거인은 자기네들이 만들어 낸 시대의 시작을 보지 못하고 스러져 갔다.
그 이후에는 거인이 없었다. 드골, 모택동, 나세르, 티토 같은 ‘작은 거인’들이 제각기의 영역 내에서 약진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결코 시대를 창조하지는 못했다.
‘세기의 장례식이라….’
그리하여 창조주의 죽음으로 단기 20세기는 차오른 보름달이 이지러지듯 기울기 시작했다. 마지막 달빛에 흠뻑 젖어 볼 생각에 가슴이 아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