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203화
“빌어먹을, 엿 됐군.”
인도네시아 개입이 네덜란드에게만 부담이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인도 독립 만세! 인도에서 꺼져라!”
“꺼져라! 꺼져라!”
마하트마 간디는 결국 단식 도중 의식을 잃고 쓰러져 모처의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 소식이 인도인들 사이로 퍼지자 각종 시위며 봉기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여기야? 여기라면서?”
“그래 맞다는데? 가자!”
“와아아아아!! 간디 선생님을 내놔라!!!”
와장창하는 소리가 나면서 병원의 문짝이 뜯어져 나갔다.
낫과 쇠스랑, 그리고 횃불로 무장한 성난 시위대 수백 명이 병원으로 들이치고, 그보다 열 배는 많아 보이는 인원들이 횃불을 들고 밖에서 웅성거리자 의료진들은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랐다.
“선생님 어디 가셨어! 개새끼들아!”
“애… 애초에 여기 계신 적도 없었소!”
“거짓말 마! 우리가 다 듣고 왔는데!!”
시위대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허름한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흰 가운을 입은 의사의 멱살을 잡고 버럭버럭 을러대었다.
진짜 없는 간디를 만들어서 내줄 수도 없는 노릇. 병원장은 막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나, 나도 간디 선생님 존경합니다! 여기 계셨으면 얼마든지 빼내어 드렸을 텐데 이쪽으로 안 오셨소! 아마… 로열 빅토리아 병원으로 가셨을지도 모를지도… 아무튼 영국 개새끼들이 다 잘못한 겁니다!”
“그, 그런가? 에잇, 가자! 거기로!”
온갖 시위대 무리들이 인도 내의 유명, 대형 병원들을 습격했다. 당연히 대부분이 영국인들에 의해 세워진 인도 내 영국인들을 위한 병원이었기에 환자들은 간디를 내놓으라며, 간디를 찾겠다며 병원을 헤집고 다니는 수백 명의 ‘폭도’들을 보며 벌벌 떨어야 했다.
그리고 병원들이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아니 대체 무슨 소문을 냈길래 그런 거지 떼들이 병원으로 몰려오게 내버려 둔 거요! 제기랄, 내가 당신네 경찰청장이랑 어! 이것도 저것도 그것도 다 했는데!]
“아이고, 일이 이렇게 되어 정말 뭐라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병원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빨리 가서….”
[됐고, 내가 본국에 우리 어머니의 사돈의 팔촌의 고등학교 동창에게 연락할 거요. 그분이 어떤 분이시냐 하면 군의 아주 고위급인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현지 경찰서장은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전화통을 붙잡고 빌어야만 했다. 인도까지 와서 병원을 하고 있다지만 대부분 ‘어퍼 미들 클래스’의 자제들로 영국의 지배층과의 연줄 정도는 한두 개쯤 있었다. 그래서 서장들에게도 땍땍거릴 수 있었지만.
서장들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야! 너는 뭘 했길래 그렇게 폭도들이 설치게 놔둬! 내가 얼마나 개망신당했는지 아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들은 또다시 아랫사람들의 조인트를 까며 똑같은 말을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병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각하….”
“하… 제기랄! 자네들은 총은 뒀다 뭐 하나? 폭도들이 그렇게 날뛰며 떼도적 짓거리를 하고, 사람들을 폭행하는데 자네들한테 총을 쥐여 준 이유가 무엇일 거라 생각하나?”
“….”
실무자들은 온갖 닦달 속에서 자체적인 판단을 해야 했다.
만약 발포를 한다면? 그렇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갈 것이다.
간디, 간디가 설파한 ‘비폭력 무저항’이야말로 시위대가 아직도 영국인들을 향해 총칼을 들지 않는 이유였다. 하지만 간디가 의식불명인 데다가 인도인들의 피까지 본다면?
‘그때는 끝장이다….’
치안경찰들이 수천수만 시위대를 모두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중무장을 한 것도 아니었다. 끽해야 권총이나 무기고 안에 처박아 둔 구식 소총 몇 자루. 그들이 가진 총알보다 저들의 머릿수가 더 많았다.
“씨발, 꼬라지가 이런데 무슨 또 정글에다 파병을 한다고….”
여차하면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해야 할 군대는 인도네시아의 정글 속으로 파병 나가 있었다. 그마저도 소련제와 독일제 무기로 무장한 반란군들에게 탈탈 털리는 중이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내 인생 꼬라지 참 처량도 하다….”
무기고를 점검하던 경감은 손질이 제대로 안 되어 소복하게 쌓인 총기 위의 먼지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도로 가면 워낙 가려는 사람이 적어 빠르게 승진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듣고 왔는데, 현실은 개판이었다.
전쟁 때문에 탈탈 털린 본국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인도에서 벌어지는 각종 소요는 복지부동을 간절히 원하는 공무원인 그를 괴롭게 했다.
“경감님! 경감님!”
“뭐, 뭐야!”
다행히 영국인 공무원의 월급은 인도 물가와 비교하면 제법 되었기에 여기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럽긴 했다. 얼마 전 새로 바꾼 인도인 가정부의 풍만한 가슴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그는 그러나, 곧 들려온 부하의 목소리 때문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저, 저, 그… 큰일 났습니다!”
자세히 보니 부하는 눈에 멍이 들어 있는 데다가 코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어디서 흠씬 두들겨 맞고 오기라도 했는지 제복은 흙투성이에 피며 온갖 오물들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인도 놈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 * *
시위대는 고요했다.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빽빽하게 모인 사람들 위로 들것 하나가 지나갔다. 사람들은 경건한 자세로, 혹은 간혹 울음을 터트리며 들것을 머리 위로 조금씩 밀어 보냈다.
들것에는 사람이, 아니 시신이 한 구 있었다.
“깃발을….”
“깃발을 올려라!”
피처럼 붉은 깃발이 사람들 사이에서 솟아올라 들것을 감쌌다. 낮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하지만 분노를 담아 시위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민중의 기 붉은 기는 열사의 시체를 감싼다.”
“시체가 식어 굳어 가며 깃발은 붉게 물든다!”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숨진 청년이 실린 그 들것을, 한 땀 한 땀 인도의 여인네들이 짜낸 붉은 천이 친친 감았다.
“붉은 깃발을 높게 올려라! 그 아래서 죽으리라!”
“겁쟁이들아 떨어라, 배반자들아 비웃으라, 적기는 끝까지 휘날린다!”
“인도 독립 만세! 만세! 만세!”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경찰들에게 달려가 쳐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을 끝까지 참아 내는 것 같았다. 경찰들 역시 그것을 알았기에, 감히 추가적인 발포를 하지 못했다.
“제기랄, 어떤 놈이 쏜 거야!”
“오, 오발사고라는 것 같습니다….”
“우린 망했어!”
인제 와서 오발이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사과하고 끝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 이미 넘실대고 있었고, 경찰들은 총구를 겨눈 채로 신에게 기도해야만 했다.
“일단… 어이! 아르준! 라주!”
“예? 예! 경감님?”
“너희들은 무기 내놔. 그리고 존! 이 두 녀석들 데리고 가서 유치장에 가둬 둬라.”
“예???”
그 와중, 영국인 경찰들은 제 나름대로의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한 줌 영국인들만으로 수억에 이르는 인도인들을 모두 통치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현지 사정에 능통하고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현지인들을 관료체계에 편입해 말단직으로 부려먹곤 했다.
총을 빼앗기고, 난데없이 유치장으로 끌려가게 생긴 두 인도인 경찰 역시 그런 사례 중 하나였다.
“저, 저희는 아무 잘못한 것 없습니다!”
“맞습니다! 저희는 결백합니다!”
“…뭣들 하나? 끌고 가!”
방금까지 같이 어깨를 맞대고 시위대에게 총을 겨누던 동료들이 쭈뼛거리면서도 총구의 방향을 바꿔 들자 인도인 경찰 둘은 당황해서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인도인들은 믿을 수가 없다.’
경찰 내에 프락치들이 있다. 시위대에 대한 심정적 동조자들이 있다. 상부는 한참 일찍부터 이런 결론을 내려 둔 채였다.
분명히 누군가가 시위대에게 정보를 빼돌리고 경찰 내에서 사보타주를 저지르고 있었으며, 본국 정보부마저 이렇게 판단했다.
지금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믿을 수 없는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생각한 경감은 인도인들에게서 무기를 압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랬다간 우리도 죽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경찰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 없는데….”
하지만 인도인 경찰들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적지 않은 인도인들은 마음속 깊이 영국에 충성했다. 영국 치하에서 낮은 카스트 출신들도 사회적으로 출세할 수 있었으며, 거들먹거리던 브라만이며 귀족들도 그들이 뒤에 업은 영국의 권위 앞에서는 한 수 접어 주곤 했으니.
하지만 지금 영국인들이 그들을 내친다면? 저질러 온 일이 일이니만큼 더욱 격렬한 증오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영국과의 끈이 떨어졌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아마 몇몇 과격한 상위 카스트들은 보복을 시도할 수 있었다.
“끌고 가라니까! 무기 내려놔!”
“이것마저 없으면 저희는 진짜 죽습니다! 경감님! 저희도 같은 경찰 아닙니까?”
“같은…?”
억울하다며 호소하자, 영국인 경감은 얼굴을 찌푸리다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같은? 지금 너희와 우리가 ‘같은’ 경찰이라고 했나?”
“….”
“너희와 우리가 어떻게 같아! 빌어먹을 놈,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너희 놈들 사이에서 꺼드럭거리고 다녀서 우리가 이 꼴이 된 것 아니냐! 미개한 토인이 권세를 뒤에 업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지… 빼앗아!”
“…예!”
사태가 험악해지자 명령을 복창하고 슬슬 좁혀오는 어제까지의 동료들을 보면서, 인도인 경찰들은 이를 악물었다.
“진… 진짜 이러실 겁니까?”
“그럼 가짜로 할까? 일단 너희들은 명령 불복종으로 해직이다! 해직! 무기 내….”
탕!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경감은 말을 잇지 못하고 붉게 물들어 가는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충격에 젖은 눈으로 총구를 바라보았다.
화약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총구를 쥔 인도인, 아르준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스스로도 충격을 받은 듯했다. 역시 아무 말도 못 하고, 뭔가를 말하려던 그와 그의 동료의 몸뚱이에 수십 발의 납탄이 박혔다.
“인도 놈이 영국인 경찰을 죽였다!”
탕! 타타탕! 탕! 탕 탕! 예상 밖의 상황에 경악한 경찰들은 부족한 총탄을 아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마구 쏴 댔다.
“난 왜….”
다른 한 명, 무기를 내려놓을 생각이 있었던 라주는 피범벅이 된 채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한 발의 총탄이 그의 두개골을 부수자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총성이다! 총성이야!”
“어디냐? 누구냐?!”
“저쪽이다 저쪽!”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참 흥분해 있던 군중들은 총성을 듣자 화들짝 놀라면서 다시 한번 분노를 불태웠다.
안 그래도 경찰의 오발이라 주장하는 발포 때문에 청년 하나가 죽었다. 그의 시체를 들고 행진하는 와중에 또 경찰은 총을 쏴제낀 것이다.
시위대를 자극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예상 밖의 상황에 넋이 나가 있던 영국인 경찰들은 겁에 질리고 말았다.
“…진짜, 진짜 좆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