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202화
<자바식 처형>
짤막한 이름과 함께 AP통신을 통해 전해진 사진 한 장이 전미를 뒤흔들었다.
인도네시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자바섬은 영란 연합군과 인도네시아 독립군이 가장 첨예하게 격돌하고 있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AP통신의 사진기자는 자신이 촬영한 사진 한 장을 본국에 송고했다.
영란 연합군이 장악한 수라바야시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순식간에 입에서 입을 타고, 신문 지상과 방송 전면을 강타했다.
[네덜란드 치안경찰의 게릴라군에 대한 잔혹한, 재판 없는 즉결처형이 현재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네덜란드 정부는 현지의 부득이한 사정으로 일어난 불행한 사건이며 유감을 표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으나….]
<다시 돌아온 나치? 가해자가 된 피해자>
<누구를 위하여 전쟁범죄는 계속되는가?>
미국인들은 얼마 전에 끝난 전쟁에서의 잔혹행위를 질리도록 보고 들어 기억하고 있었다.
나치 독일군은 전 유럽에 걸쳐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밝혀진 ‘절멸수용소’나 학살공장들은 전쟁의 참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대다수 미국인들을 경악하게 하기 충분했다.
타블로이드지들부터 워싱턴 타임즈 같은 주요 신문들까지 나치와 일본 등 추축국의 학살들을 대서특필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리고 영란 연합군이 저지른 이 ‘학살’은 그 불쾌한 기억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온몸에 피를 묻힌 채 무력하게 묶인 포로들을 처형하는 경찰대장의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은 마치 악귀 같던 일본인들을 연상시켰다.
한창 전쟁이 끝나고 더욱 자극적인 기사들이 없나 헤매던 각종 황색언론들은 여느 때처럼 이 사건을 부풀리고 제 입맛대로 가공해 쏟아 냈다.
“들었나? 저기 인도양 쪽에서는 영국과 네덜란드인들이 수용소를 운영하면서 매일매일 수백 명씩을 죽인다던데….”
“나도 들었네! 아니, 나치를 자유의 적이라며 비난할 때는 언제고 자기네들이 똑같은 짓을….”
미국 정부 역시 본국에 도움이 된다면 학살을 얼마든지 방치했겠지만, 연합군의 행패를 묵인하는 것이 결코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미국 정부는 자유의 친구를 자처했던 영국과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인들의 민족 자결에 기반한 독립의지를 무시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며….”
국무성이 낸 성명은 양국의 정부가 소름이 쭈뼛 돋게 하기에 충분했다.
미국은 소련과 협력하여 일본 국토를 그야말로 철저하게 파괴했으며, 그런 일이 두 번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핵을 가장 처음 개발한 소련은 다른 열강들을 모두 무시하고 오직 미국과만 핵무기의 비밀을 공유했으며, 전후재건과 복구비용에 허덕이는 열강국들은 핵무기 같은 것을 생산하기 위해 미소처럼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을 여력이 없었다.
핵을 가진 미국과 소련의 의지는 존중되어야만 했다. 최소한 핵이 없는, 더 이상 ‘열강’이라 불리울 자격을 잃어버린 국가들은 그리해야만 했다.
실제로, 상부에서의 강력한 압력이 있었는지 ‘빨갱이들의 책동’이라면 학을 떼고 경계하며 잡아들이던 미국 FBI조차 민족자결이니 반제국주의니 하는 단어가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두는 게 아닌가!
* * *
“제길! 여기 현지 사정도 모르는 새끼들이….”
영란 연합군 사령부는 온통 한숨과 담배 연기뿐이었다. 본국 정부들은 강력한 보도통제를 통해 충격적인 사진이 유포되는 것을 막고는 있었지만, 미국의 분노는 쉬이여길 수 없었다.
특히 재건을 위해서 소정의 원조나마 공급해 주는 미국이 원조를 끊는다면 경제상황이 악화되고 정권의 인기가 급락할 것은 당연지사. 정부는 어떻게든 군대를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정부와 국민으로서는 당연한 판단이었지만 실전에서 장병들의 사기는 바닥을 모르고 낮아지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 왜 왔냐고 의문을 품는 장병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번 주만 해도 수 건의 병영 내 총기 난사와 자살시도가….”
“…낸들 어쩌란 말인가! 우리가 솔직히 잘못한 건가?”
게릴라들은 대부분 군복을 입지 않고, 무기를 숨기고 있었다. 1929년 체결된 제네바 협약에서도 이럴 경우 교전권을 인정받지 못해 전쟁포로로서 대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경찰대장은 자기 가족들이 폭탄 테러에 의해 산산이 박살 나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아야 했고, 그 주범과 일당들 앞에서 분노를 숨길 수 없었을 뿐이다.
한평생 치안관료로 청렴하고 정직하게 근무해 온 그는 부하들에게는 모범이 되었고, 부패하고 뒷돈이나 챙기는 식민지 관리들과는 다른 이였다.
하지만 사진은 그런 ‘사실’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사진이 보여 주는 진실은 오직 하나였다.
연합군은 팔이 위로 묶인 채 매달린 포로를 하나하나 권총으로 처형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문명인들이 그토록 고심하고 노력해 만들어 낸 사법 절차도, 심판 체계도 없었다. 오직 자의적인 폭력뿐.
적나라하게 드러난 참상 앞에서 사람들은 말을 잊었다.
많은 말을 하려는 자들은 눈초리를 받고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든 변명으로 보일 뿐. 그 누구의 눈에도 사진은 잔혹한 실상을 담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솔직히 억울하군그래….”
“….”
“우리가 한 게 뭔가? 그거야말로 사소한 일탈 아닌가? 어차피 사형시켰을 범죄자를 권총으로 한 발씩 쏴 죽이든 목을 매든 무엇이 다른가! 제기랄, 사람을 죽이는 것이 총과 밧줄이 다른가?”
다를 바가 없기는 했다. 애초에 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한 번쯤 더 생각해본다면 의견을 바꿀 수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제국주의자들에게 식민지란 너무나 당연하게 그들의 것이었다.
“좆 같은 토인 새끼들, 배은망덕한 새끼들. 누가 법이며 행정이며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 인제 와서 우리들에게 그걸 들이대며 꺼지라 한단 말인가? 우리 없이도 이 지역에서 제대로 된 문명이라는 게 유지될성싶은가? 다시 미개한 원시사회로 되돌아가겠지!”
“우리는 백인의 의무를 다할 뿐인데, 저 은혜를 모르는 원주민 아랫것들이라고는… 좀 배워 먹은 원주민들이 아마 저희들이 이 나라를 자기들끼리 해처먹으려고 그러나 봅니다.”
물론 그들의 감상이 어쩌든, 그들은 군인이었다. 상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그리고 상부는 이제 가만히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방어거점들이 하나하나 함락당하며 물러나던 저 반란군 새끼들에게 시간을 벌어 줄 뿐이었지만 명령은 명령.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합니까? 이렇게 시간만 죽이며? 갈수록 병사들은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모르네.”
사령관은 뒷목을 연신 주무르면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뭐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것이 없었다.
마침 그때 사령부로 전령 하나가 들이닥쳤다.
“급보입니다! 급보!”
“뭐? 무슨 일인가?”
전령은 헉헉 숨을 몰아쉬다가 전보 하나를 사령관에게 건넸다. 특급 명령을 지시하는 붉은 인장이 겉표지에 찍혀 있었다.
뭔가 큰 사건이 일어났음에 틀림없었다. 사령관은 긴장된 표정으로 인장을 뜯고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하아… 자네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중 뭐가 먼저 듣고 싶은가?”
“예???”
“둘 중 하나 골라보게.”
편지를 책상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아예 의자에 몸을 파묻은 그는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 좋은 소식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축하하네. 우린 이제 곧 집에 갈 수 있게 됐어.”
장교들의 표정에도 잠시간 기쁨이 스쳐 갔다. 그 누가 머나먼 해외에서 이렇게 더운 날씨, 모기들에게 물려 불어 터져가면서도 싸우고 싶어 하겠는가? 장교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정부가 이런 명령을 내린 배경이 있어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갑자기 이 소중한 식민지를 버리고 귀국한다는 것인가!
“아니, 대체 무슨 소식이길래… 식민지보다 소중한 게 있습니까? 지금 본토를 재건하기 위해선….”
“그 본토가 바로 문제라네.”
“예?”
사령관은 맥빠진 목소리로 편지를 직접 읽어 주었다. 장교들은 다 같이 표정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구 독일령 현 라인란트 공화국에 주둔한 소련군 30만 명이 국경으로 전진배치됨. 추가적인 증파가 불가능하며 주둔군을 철수시킬 것을 내각에서는 결정.]
* * *
“포병대여~ 스탈린 동지께서는 명령을 내리셨노라! 포병대여! 인민들이 우리를 부르노라~”
“수천 문의 포신으로부터, 인민들의 눈물을 위해 발사! 발사!”
에센, 도르트문트, 뒤셀도르프, 아헨에 이르기까지 네덜란드 국경 근처의 독일, 라인란트 공화국령 도시들에서는 수십, 수백 명의 소련군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동안 소련군은 독일 영토를 분할하고 군정하에 놓았으면서 그다지 무력시위라는 것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수 명, 수십 명씩 소련군이 시 외곽의 주둔지에서 튀어나와 시내를 활보하자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각종 군가를 기묘하게 개사해서 부르는 것까지 시민들이 알 수는 없었으니 더더욱. 동부전선에 끌려갔다가 간신히 살아서 귀환한 귀환병들이 돌아와 이야기했던 공포의 중전차, 부됸늬가 시내를 쿠르릉거리며 행진하자 시민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자, 여기 독일인들에게는 절대, 아무것도 하지 마라. 다만 통행증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외국인 같다 싶으면 무섭게 굴도록. 대신 무섭게 굴기만 하고 실제로 뭘 하진 마라!”
“예!!”
이들의 표적은 바로 독일과 네덜란드를 오가는 이들이었다. 네덜란드는 피점령국이었으며, 엄연히 연합군의 일원임이 인정되었기에 소련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전쟁 중 그랬던 것처럼 네덜란드 본토는 여전히 독일의 영향권에서 다 벗어나지 못했으며 특히 국경 근처에서는 양국 사이에서 활동하며 먹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제 독일 시가지에서 무력을 과시하는 것을 네덜란드인들이 보면 오금이 저릴 것이다.
“영국이고 네덜란드고 바보가 아니라면야 우리가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아예 모르지는 않겠지.”
소련이 내정간섭을 한다고 따질 수 있는 여지, 예컨대 반란군에게 직접 무기를 쥐여 주었다던가… 같은 내용은 최대한 차단해 두었다. 하지만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지배하에 있는 인도차이나 연방군이 참전한다던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련군이 노획한 독일제 무기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 모를 리가 없다.
간접적으로 식민지인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후원하는 것을 넘어 직접적인 군사행동의 가능성을 내비친다면 과연 네덜란드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놈들은 그래서 어떻게 반응하던가?”
“예! 서기장 동지. 명백히 군사행동의 빈도가 줄어들고 단계적 철수를 준비 중이라 합니다. 인도네시아 독립군 사령부에 교섭 요청도 했다고….”
“좋아, 좋아. 아주 좋아….”
영국은 건드리기 어려웠다. 독일과 싸운 ‘전우’인 데다가 실제로 연합군 내에서 기여도를 꼽으라면 미국과 소련 다음으로 3위에는 들어갈 수 있었으니.
하지만 네덜란드같이 기여도도 낮은 데다가 명백하게 명분까지 만들어 준 쪽에 무형의 압박 정도는 얼마든지 가할 수 있었다.
미국의 여론은 지금 제국주의 침략군들을 향해 부정적으로 돌아가고 있기도 했고, 국무성이 비판까지 발표했다면….
“흐흐흐. 자, 저놈들이 어찌 나오나 보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