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195화 (195/300)

# 195

195화

천황제 해체!

어디서 흘러나갔는지 모르지만 소련이 천황제를 해체할 것이라는 선언은 일본열도 전체를 강타했다.

마셜 참모총장과 맥아더 원수의 추천으로 미국 측 일본열도 군정사령관이 된 아이젠하워 중장은 하루가 다르게 끓어오르는 미군 군정구역, 즉 남일본 측의 분노에 직면해야 했다.

“제기랄… 또?”

“그, 그렇습니다. 편지를 보내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물론 일본인들은 승자에게 철저히 비굴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양대 열강의 강대한 힘을 온몸으로 체감한 바 있었다.

소련의 핵폭격을 십수 발은 얻어맞은 대도시에서는 감히 반기를 들 마음을 품지도 못했다. 미국의 고엽제 폭격이며 전략폭격을 경험한 시골 사람들도 그들의 어마어마한 힘을 잘 알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철저히 ‘절제된’ 방식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미군정 청사 앞에서 할복을 하거나, 단지혈서를 보내거나, 아니면 둘 다 하거나. 미군 헌병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처참한 방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체들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본국에서는 뭐라 훈령이 없었나?”

“아직은 없었습니다. 본국에서도 심각한 논쟁이 되고 있는 듯합니다.”

일본 천황이야말로 정부의 수괴로서 일본의 대외전쟁을 계획하고 승인한 주체로 보아 폐지해야 할지, 아니면 실제로 변명하는 것처럼 군부에 끌려다닌 것일지.

본국에서는 두 가지 주장 중 어느 것이 맞느냐, 그리고 어느 쪽을 채택하느냐가 유익한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

천황제를 인정하여야 대다수의 일본인들을 미국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며 천황제를 유지하자는 이들은 소련이 무리하게 공화제를 이식하려 하는 것이 극심한 반발을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대로 천황제를 폐지하지 않을 경우 일본은 어느 순간 미국의 통제 밖으로 뛰쳐나가 다시 군국화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유지론자들은 일본은 다시 군국화될 산업기반조차 남지 않았다고 반론했고.

어디까지나 극동전략에서 남일본이 어떤 위치에 있을지를 먼저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중화민국은 부패했고, 남일본은 적성국이었던 데다 산업기반이 황폐화되었고… 대한민국은… 너무 친소일 공산이 크지.’

소련과 친하게 지내더라도 아시아, 최소한 서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핵심 이익을 보장하려면 반드시 현지의 주니어 파트너가 필요했다.

일단 그동안 미국의 파트너로 대일전을 함께 수행해온 중화민국은 극도의 부패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장개석을 비롯한 ‘4대 가문’은 미국이 원조한 물자를 빼돌려 팔아먹고 제 이권을 챙겼으며, 그 결과 일본은 허약한 군사력으로도 중국군에게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여기에 미국의 중재를 계속 거부하고 자기 고집만 피우는 장개석에게 미국 국무성의 관료들은 점점 답답함을 표하고 있었다.

“그자는 우리를 무슨 수도꼭지로 보는 게 분명합니다. 틀면 돈이 나오고 시끄럽다 싶으면 닫아 버릴 수 있는.”

“장개석은 무능합니다! 그자에게 전권을 넘겨줄 경우 중국은 다시 갈가리 찢어져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장개석의 고문 노릇을 했던 스틸웰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를 비난했다.

“장개석이 먹어치운 돈이 최소 1억 달러는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조한 돈의 50%는 장개석과 그 측근들의 주머니로, 나머지 반의 50%는 또다시 부패한 장군들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군벌들의 주머니를 미국인의 피땀으로 불려 줄 뿐입니다.”

“그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중화민국에서 반드시 민주적인 선거를 치러 중국인들의 지지를 받는 청렴하고 유능한 지도자를 선출해야 합니다. 오직 그 방법만이 장개석의 부패한 정부를 대체할 수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장개석은 나라를 공산당에게 넘겨줄 셈이냐며 펄펄 뛰었다지만 국무성은 여전히 스틸웰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중국 공산당이 점령 구역의 토지에 대한 무상몰수―무상분배 정책으로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총선에서 실제 세력보다도 약진할 가능성이 컸기에 장개석 정권을 밀어주자는 주장이 결국 승리했지만, 미국에서는 점점 장개석과 그 군벌 수하들에 대한 불신이 자라났다.

“우리 대한민국은 미국이 생각하는 것처럼 ‘빨갱이’가 아닙니다. 하하하! 제 개인적으로는 장로회 신자이며, 급진적 좌익이론이 만민의 복리를 보장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에 비해 신생 대한민국의 수상으로 선출된 여운형은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동양인으로는 대단히 당당한 체구에 카이저 수염을 멋지게 기른 그는 미국 외교관들과의 접촉에서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해 미국인들의 호감을 샀다.

소련이 길러낸 토착 공산주의자 정도로 그를 파악하고 있던 미 국무성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우리 대한민국은 다당제 국가가 될 것입니다. 공산당은 그 정당 중 하나(One of them)로서 정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의견을 탄압할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제국주의에 협력한 파시스트들은 정계에서 반드시 축출할 것입니다.”

“그것 참 듣던 중 반갑군요.”

“앞으로 대한민국은 미국과의 우호적인 협력을 기대합니다. 선발 민주주의 국가로서 미국은 대한민국이 따라가야 할 이상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예스맨을 좌우에 거느린 채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떽떽대는 장개석에 비해 여운형은 먼저 영어에 능통했다.

미국식 매너를 갖추고 매력적인 미소를 짓는 그는 극동, 특히 한반도 문제에 그다지 아는 것이 없는 미국 외교관들의 호감을 굉장히 쉽게 따낼 수 있었다.

또한, 걱정했다시피 공산당 일당독재 국가로 전락해 소련의 앞마당이 될 줄 알았던 대한민국이 다당제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는 것은 미국 국무성을 안도하게 했다.

소련은 어쩐 일인지 대한민국에는 그다지 내정간섭을 시도하지 않았다. 첫 번째 자유총선에서 여운형이 이끄는 기독사회민주당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손을 잡고 연립정부를 구성했지만 볼셰비키식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는 명확히 선을 그었다.

“하지만… 소련 출신의 군인들이 과연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들은 소련과 협력하여 장비를 제공받는 등 몇 가지 원조를 받았을 뿐 소련군이 아닙니다. 김원봉 총사령관은 민주적이고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우리 정부는 그들을 철저히 신뢰합니다.”

조선독립을 주도한 것은 조선공산당이 주류가 되는 ‘건국준비위원회’였으나 대중정당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다수의 우파 인사들이 합류했다. 제헌의회 이후 건준은 좌우가 갈라져 각각 조선공산당과 기독사회민주당으로 분열했다.

이들 사이의 갈등으로 신생 독립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했던 이들도 결국 군은 문민정부에 절대 충성을 바칠 것이라는 선언을 보고 시름을 덜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여운형과 대한민국 정부가 유화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국무성의 신중파들은 대한민국 신생 정권이 구체제 인사들에게 벌이는 대대적인 ‘숙청’을 스탈린주의가 아니냐며 경계하기도 했다.

“이 ‘반민특위’는 무엇입니까? 공산당 인사들이 다수 참가하여….”

“그것이 스탈린주의라고 하셨습니까? 하하하하, 스탈린 서기장은 고마운 사람이지만 그분을 기술적인 면에서까지 따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한반도가 일제에 35년간 지배당하는 동안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인사들을 처벌할 뿐입니다. 원한다면 미국 측에서 옵저버를 파견하여도 좋습니다.”

결국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마저도 조사결과 대한민국은 미국과의 우호적 협력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하였다.

“사실 소련 측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명분으로서라도 미국에서 원조를 제공했으면 합니다. 소련의 원조 덕분에? 때문에? 라도 소련의 영향력이 너무 이쪽에서 커지는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하하하하! 제가 이 말을 했다는 것은 비밀로 해주시지요.”

“그렇습니까? 대한민국에서 미국의 원조를 바란다, 이 말입니까?”

“그것도 좋지만 미국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명분이 있었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독립 과정에서 받았던 도움이며, 다수의 빈민들이 있어 으음… 급진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운형의 저 말은 미국 측에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소련에 협력하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알려졌던 인물이 소련의 영향력에서 은밀히 벗어나기 위한 지원을 요청한다?

극동아에 정치적으로 안정적이고 경제적으로 부패하지 않은 파트너를 물색하던 미국은 쾌재를 부르며 종전으로 가동률이 낮아지기 시작했던 공장들을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 * *

“서기장 동지, 지금 이렇게 상황이 돌아가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오! 우리 소련은 현재 상황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판단하오. 우리는 대한민국이 미국과의 관계 증진을 위한 교두보가 되기를 바라오.”

“그렇습니까….”

즉 미국의 ‘극단적 선택’을 방지하는 완충지대로서 한반도가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미국이 대외 협력 파트너로 대한민국을 선택했는데, 과연 이곳에서 미국의 영향력이며 투자한 자산이 모두 증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놔두고서 소련과의 대결 구도를 선택할 수 있을까?

이곳에 자기 돈을 투자한 주주들이 가만히 놔둘까? 이런 완충지대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이 시대에는 아직 나오지 않은 이론이지만 <코카콜라를 마시고 맥도날드를 먹는 국가들끼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 말은 경제적 교류가 일정 이상 진행되면 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상호파괴적인 전쟁에 돌입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했다.

생각해 보라. 기껏 싼 임금이며 우호적인 조건을 노려 공장을 지었는데 전쟁이 터져 그 나라에 지은 시설들이 모조리 날아간다니! 무역이 끊기고 상품 단가가 올라가는 상황이 어찌 세계 시장을 노리는 미국에게 불리하지 않을까.

“수상께서는 걱정 말고 본국의 재건과 경제개발을 위해 필요한 수단들을 강구해 보십시오. 우리 소련은 한국의 평화적인 발전을 최대한으로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련 역시 전쟁 이후의 재건이 어려울 텐데 이렇게 도와주어 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하, 우리는 우리의 방법이 있지요.”

진짜다. 미국이 원조와 차관 형태로 보내주는 실로 막대한 대금은 소련의 국가경제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제4차 5개년 계획의 목표를 훨씬 초과달성할 정도로.

전후 재건과 해외 원조대금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목표를 잡았건만, 직접적으로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분야에 투자하면서도 목표 초과달성이 아른거렸다.

“아무튼 신생 대한민국의 건투를 빕니다! 영원한 소―한 우호와 사회주의 형제국들의 전진을 위하여!”

“고맙습니다! 다음 통화 역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여전히 소련의 영향력이 더 강력하게 유지될 것이다.

왜? 우리가 해준 게 얼마나 많았는데. 이 ‘소련 물’을 빼려면 최소한 시간으로는 한 세대 이상이 지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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