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194화
독일과 일본에 원폭이 투하된 이후, 패배를 직감한 각 정권의 고위층들은 제각기 다른 결말을 선택했다.
선택할 수 없었던 자도 있었지만.
“괴벨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마… 핵폭발에 휘말려 사망한 듯합니다.”
“그자만큼은 반드시 끌어내어 교수대에 매달아야 했는데… 아쉽군.”
적잖은 수의 고위층들은 수도에 떨어진 핵폭탄에 휘말려 한 줌 재가 되었다. 평소에 말하듯 ‘죽음까지도 함께하겠다’라고 말한 것이 사실이 된 것일까?
괴벨스의 관용 차량의 잔해로 추정되는 것이 폭심지 인근에서 발견되자 소련군, 그리고 복수심에 불타는 유태인 조직은 결국 괴벨스에 대한 추적을 그만두었다.
그의 아내, 마그다 괴벨스 역시 유언장을 남겨 둔 채로 여섯 아이들과 함께 음독자살했다. 소련의 전략폭격으로 제3제국의 선전장관 집에마저 휘발유가 부족했기에 미처 다 화장되지 못한 그들의 시신을 소련군은 가까스로 회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치 고위급들은 생포되었다. 도쿄와 달리 베를린에는 단 한 발의 원자폭탄만이 떨어졌었고, 도시 중심가만 파괴당했기에 외곽에 저택을 가진 대부분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뉘른베르크에 설치된 국재 군사재판소에 끌려온 전범들은 다들 수척해져 있었다.
“…이렇게 독일 제국이 끝장났다니….”
“….”
“독일 국가가! 독일인이! 독일의 아름다운 문화유산과 이 문명이!”
“거 좀 닥치쇼!”
소련 경비병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외치자 괴링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을 꽉 악물었다.
이 자리에서 전범들의 대표 노릇을 하는 것은 바로 괴링이었다. 히틀러의 생존 당시, 괴링이야말로 사실상 제국의 2인자였으며 발터 모델이 대통령으로 지명된 이후에도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당당하오. 나는 그저 독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내 최선을 다했으며, 또 독일인들 역시 내 국가에 대한 헌신을 알아줄 것이오.”
그는 시종일관 당당하게 자기가 죄가 없음을 역설했다.
물론 재판정에 선 수석 판사, 소련의 이오타 니키첸코와 미국의 프랜시스 비들은 그런 시도를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당신의 위치는 나치 독일에서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나? 나 말인가? 나야말로 제국의 2인자였지! 독보적인 권위를 총통이 가지고 있었으나 나야말로 총통 각하의 차석이었으며 국민들은 구름 속의 신과 같은 그보다는 나를 더 따랐네.”
피식, 소련 판사는 비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가 다시 그를 근엄하게 내려다보았다.
“평화에 대한 범죄를 공모한 것, 그리고 침략전쟁을 기획하고 실행한 것을 인정하십니까?”
“하! 침략전쟁이라. 평화에 대한 범죄? 그것으로 내 행위를 설명하려 하는가? 국가와 민족은 강철로서 단련되는 것이네. 버터와 라드는 인간을… 나약하고 뚱뚱하게 만들지.”
괴링은 가슴을 쭉 펴고 자기의 지론을 늘어놓았다. 이곳이 그의 마지막 연설장인 것을 아는 것처럼.
하지만 그의 말을 들어 줄 청중은 얼마 없었다.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는 검사와 비웃는 판사. 그리고 함께 끌려와 체념한 전범들. 깡마르고 수척한 독일인 서기가 하나 있었기에 괴링은 마치 그에게 연설하듯, 연극적인 어조로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50년, 혹은 60년쯤 지나면 독일 전역에 헤르만 괴링 동상이 있을 거요! 뭐, 동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와 총통의 초상화 정도는 걸려 있을 것이오.”
“푸흐흐흡… 크흠.”
다시 한번 실소를 터트린 소련 판사를 괴링은 불쾌하다는 듯 노려보았다. 시종일관 싸늘한 표정을 짓던 소련 검사마저 얼굴이 웃음 비슷한 찌푸림으로 일그러지자 괴링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고민하는 듯했다.
소련 판사는 양해를 구한다는 듯 미국 판사에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잔뜩 근엄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피고인이 주장하는 바는 본 법정에서 이해할 수 있으나… 피고인의 주장에는 한 가지 허점이 있소.”
“그게 뭐요?”
“독일이란 국가는 이제 존재하지 않소이다. 원래 존재했던 독일국은 3개의 국가로 분할될 것이오.”
!!!!
감방에 갇혀 외부로부터 제대로 정보를 전해 받지 못하던 전범들은 다들 눈을 크게 뜨고 기겁한 듯했다.
“뭐… 뭐라고?”
“판사님, 추가적인 설명을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예의 바르게 미국 측 판사에게 양해를 구한 소련 판사 니키첸코는 잔혹한 미소를 띤 채 전범들이 그토록 애정을 가졌던 독일의 미래를 선고했다.
“이미 결정된 사항이지만 혹시 모르셨다니 알려 주도록 하겠소. 구 독일국의 영토 중 오데르―나이세강 동편 영토는 신생 폴란드 공화국에 할양될 것이오. 알자스―로렌과 자를란트는 프랑스에 할양될 것이며….”
최종적으로 독일이 3분할 될 것이라는 것을 들은 전범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느님 맙소사….”
누가 했는지 모를 짧은 코멘트와 함께 판사들은 휴정을 선언했다.
* * *
“미국 측에서는 해당 범죄자들에게 어느 정도 형량이 적절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까?”
“으음… 일단….”
사실 재판은 반쯤 요식행위나 다름없었다.
이미 증거는 대부분 존재했다. 증언 몇 가지로는 뒤집을 수 없을 만큼 확고한 증거들이.
이제 그 증거에 기반해 판결을 내리는 것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 강대국이 결정할 내용이었다.
생긴 것은 대단히 무뚝뚝했지만, 이오타 니키첸코는 굉장히 살가운 얼굴로 미국 측 판사를 바라보며 미국 측이 제시할 형량을 기다렸다.
어쩐지 부담스러운 그 눈길에 슬쩍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미국 판사 비들은 하나하나 전범에 대한 처우를 체크해 나갔다.
“헤르만 괴링, 사형. 알프레드 요들, 사형.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사형….”
사형, 사형, 사형, 20년형, 종신형, 10년형, 사형… ‘행방불명.’
대충 준비한 내용이 있는지 신속하게 적어 내려간 리스트를 보며 소련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미 상부에서 받은 지령이 있었다.
‘어차피 대어는 확보했다. 미국측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서 판결하라.’
‘최대한 존중’은 그냥 그대로 따라가라는 말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최소한 소련에서는 그게 그거였다.
검사의 의견을 존중하라! 라는 지령이 내려올 경우 검사의 구형을 그대로 따른다. 판사의 자율성을 존중한다! 라고 해도 웬만해선 구형을 따라가는 게 좋았다.
그것이 특히 크렘린에서 내려온 지령이라면 더더욱.
스탈린 서기장은 전범들에게 보복하는 것 역시 하나의 수단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분의 장기판 안에서는 한때 최강대국을 쥐락펴락하던 자들 역시 졸일 뿐이었다.
“아주 좋습니다. 저희도 여기에 별다른 이의가 없습니다. 역시, 미국인들은 합리적이로군요.”
“하하, 감… 사합니다.”
굉장히 어색하게 입에 발린 말을 들은 미국 측 판사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소련인들은 요새 미국인들만 보면 과하게 친한 척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만… 이자의 경우는 사형까지 구형할 것은 없을 듯합니다. 저희는 30년형, 혹은 종신형으로 감형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예??? 이자를…?”
“하하하, 그… 당황스러우실 수도 있겠지만 이자는 전쟁범죄 자체에는 그다지 관여를 하지 않아 우리 승전국들이 부당한 처형을 한다는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서기장이 시켰다. 왜?’
미국 판사는 이마를 찌푸리며 소련 판사의 손끝이 향한 이름을 바라보았다.
“발터 모델… 총사령관을….”
“그는 전쟁 말기에 취임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야전 지휘관으로나 총사령관으로나 소련인들을 학살한 전쟁범죄 혐의와는 관련이 없음을 우리 측 수사관들이 확인했습니다. 시베리아 강제노동 30년 정도면 충분하리라 사료됩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미국 측 제안을 전부 수용하는데 그 한 명마저 내주지 못할 것도 없다. 다만 대체 무슨 저의가 있나 의심이 될 뿐.
소련측 판사는 부담스럽게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미국 측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소련 측의 의사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실 최대 전범인 히틀러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데 잔챙이들 몇 잡아 보아야 어디에 쓰겠냐마는… 미국 판사는 그렇게 스스로 변명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틀러와 그의 개인비서 마르틴 보어만은 베를린에서 찾을 수 없었다. 몇몇은 그들이 베를린을 미리 빠져나가 어디론가 도피했다고 주장했다. 좀 더 낙관적인 이들은 조심스레 지하 벙커 아래에 파묻힌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미국에서는 이미 학살당한 동포들의 참극을 보고 분노한 유태계 반나치 운동가들이 펄펄 날뛰며 독일인들, 특히 나치들을 모조리 갈아 버릴 것처럼 굴고 있었다.
‘히틀러만 잡아다 목을 매달아 버릴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소련도 아마 복수심에 불타고 있을 테니. 아마 그들이야말로 가장 히틀러를 애타게 찾고 있을 것이다.
일본은 워낙 철저하게, 자근자근 짓밟은 바람에 처형해야 할 핵심 전범인 히로히토가 죽어 버렸기에 반드시 히틀러만큼은 승리를 보여 주기 위해서 처형하는 게 필요했다.
비들 판사는 어쩐지 아쉽기까지 했다.
그가 미국 측 대표로 히틀러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장면이 TV로 방송된다면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명성을 바탕으로 정치에 뛰어들 수도 있을 법했는데… 사람들은 히틀러나 괴벨스는 알아도 괴링이나 힘러 같은 짜잘한 자들은 잘 몰랐다. 총살이 아니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모르고들 있었고.
“아무튼 좋습니다. 재판을 계속하도록 하지요.”
* * *
일본에서도 비슷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일본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천황폐하를 옹위하지 못한 죄, 죽음으로 갚도록 하겠다.]
[먼저 가신 그분을 따라 황국의 영령이 되겠다. 대일본제국 만세!]
살아남은 자들은 천황의 죽음을 알고 늦든 빠르든 상당수가 자결했다. 소련과 미국에 항복의사를 타진하고 자기가 최고 책임자라며 죽음을 기다리던 도조 히데키를 제외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제 배를 가르든 목을 매달든 독을 마시든 권총으로 머리통을 쏘든 자살하고 말았다.
당연히 일본의 끔찍한 학살의 피해자였던 중국이나 미국, 네덜란드인들은 펄펄 뛰며 광분했지만 곧 더 먹음직스러운 처벌감이 생겨나자 입을 다물었다.
“천황제를 어찌할 것입니까?”
‘일본 전쟁범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극동군사재판’에 소련 측 대표로 파견된 자라노프는 툭 하고 충격적인 단어를 던졌다.
천황제. 일본의 국체 그 자체이며 수많은 일본인들이 지키기 위해 제 목숨을 바쳐 죽어 갔던 그것.
이제 처벌 대상인 천황이 없어 재판부는 새로 즉위할 10세의 어린 제1황자 아키히토를 처벌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의한 바 있었다.
그러나 명백히 10세라는 어린 나이에 전쟁에 대한 책임이 없는 자를 연좌할 수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이제 소련은 일본의 국체 그 자체를 들고 나왔다.
소련은 일본에 ‘민주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미국의 대원칙에 동의했으며, 그것이 입헌군주정일지 아니면 민주공화정일지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논의한 바가 없었다.
“천황이라는 국가 기관이 죄를 물을 수 있는 대상이 되겠습니까?”
네덜란드 판사는 그렇게 되물었지만, 소련 판사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 된다면 되도록 해석해야지.’
그의 눈빛에 담긴 의사를 읽은 다른 국가의 대표들은 모두 놀란 듯했다. 어차피 군정지역에서의 소요를 감당하는 것은 미국과 소련 두 나라겠지만 과연?
하지만 소련 판사의 입장은 굳건해 보였다. 미리 지령을 받았을 미국 판사가 당황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