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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192화 (192/300)

# 192

192화

“저… 서기장 동지?”

“왜 그러나?”

“다름이 아니오라… 서기장 동지의 노선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동지의 의중을 여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명령에 따라 불철주야 세계를 종횡무진하다가 돌아온 몰로토프는 뭔가 미심쩍은 것이 있는지 내게 조용히 질문을 해 왔다.

항상 생각 없는 관료 타입에 가까웠던 그가 질문을 한다는 것도 새로웠다. 무언가를 시키면 늘 예! 서기장 동지, 혹은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따위를 외치며 골몰했지만… 그동안 훈련한 것이 빛을 발휘하는 것인가?

“그래, 뭔지 들어 보지.”

“저… 미국과의 관계노선은 그래서 화친노선입니까? 아니면 대립노선입니까? 저희 외교부와 해외공작부서에서는 정확하게 갈피를 잡지 못하여….”

“둘 다.”

“둘 다… 그렇… 예?”

내가 그렇게 딱 잘라 말하자 몰로토프는 납득하려다가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둘 다. 대립하면서 화친하는 관계라.

하지만 이 전략, 소위 화전양면전술(和戰兩面戰術)이야말로 우리 노선을 상징할 단어가 될 것이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외교는 미국과 친하게 지내는 것일세. 미국이야말로 이 시대의 최강대국이며 우리가 핵폭탄 몇 발 가지고 있다고 상대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야. 자네도 봤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

그 넓은 땅에서 쏟아져 나오는 식량과 물자와 공업생산력이란! 작정하고 생산에 돌입하니 단 몇 년 만에 진주만에서 상실한 함대보다도 더 거대한 함대를 건설해 내는 미국의 저력을 본 고위층들은 상당히 쫄아 있었다.

호전적인 몇몇은 그래도 육지에서는 소련 육군과 그 동맹군들이 미국을 압도할 수 있다고 했지만.

하지만 굳이 싸울 필요나 있는가?

“괜히 싸우면서 국력을 낭비하기보다는 여러 수단으로 화친을 도모하면서 우리 국력이 미국에 비견할 정도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네.”

“그… 렇습니까….”

아마 미국을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비슷한 경제수준만 갈 수 있어도 승리하는 것은 소련이다.

왜냐고?

“저들의 내부 모순은 역설적으로 전쟁을 통해, 긴장을 통해 해결되네. 자네도 알지 않나. 자본주의의 최후단계로서 제국주의는 군사력이라는 전혀 쓸모없는 소비를 통해 과잉 생산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예, 예. 물론 저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밝지 못한 몰로토프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곧 떠올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랬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이 증가하는 만큼 소비가 항상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기에 과잉 생산에 빠지고 만다. 누가 노동자들의 월급을 올려 주고 싶어 하겠는가? 이런 과잉 생산으로 종국에는 공황이 오며 파멸에 이른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조금 다른 해법이 존재했다. 루즈벨트의 뉴 딜 정책처럼 국가가 지출을 확대해 소비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공황을 해결한 것이다. 그리고 국가지출에서 참 쉽고 빠르게 늘릴 수 있는 것이 바로 군비지출이었다. 히틀러가 그랬던 것처럼.

반면 소련은 생산력을 국가에서 통제하기에 과잉 생산 문제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다만, 한정된 생산력을 외국과 군비경쟁을 통해 낭비한 결과 발생한 경공업 분야의 취약성으로 인한 시민들의 불만이 심했을 뿐이지.

결국 미국과 소련이 싸우면 미국은 더 오래 버틸 힘을 얻지만, 소련은 제 살을 깎아먹고 망한다. 이게 내 결론이었다.

“우리는 그 판에 어울려 줄 필요가 없네. 대신!”

“대신?”

“저들의 내부 모순을 자극해야지.”

어느 체제나 내부 모순은 존재했다.

소련은 아직은 덜한 편이지만 소위 노멘클라투라라는 공산귀족이 출현할 예정이었고, 미국은 뭐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다.

빈부의 격차, 인종 문제는 아직 수면 아래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사회를 뒤집어 놓을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라! 저 나라를! 저들은 우리보다 가난하고 못 먹고 못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과 의료는 무료이며 아프다는 이유로 극빈층으로 추락하는 사람이 없다. 어디처럼 여성이 사회에서 2등 시민 취급당하지도 않고, 어디처럼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이 짐승 취급받지도 않지. 애초에 레닌 동지부터 ¼ 몽골계가 아니었던가?”

“…!”

“백인이고 아비가 돈이 많고 명문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로 명문대학을 졸업해 돈과 권력을 거머쥐는 것이 아니라, 아비는 문맹 농부요 본인은 광산노동자였던 자가 능력을 증명하여 이 나라의 서기장이 될 수 있는 나라! 이 소련이야말로 이상향에 더 가까움을 저들에게 보여 주면 되네.”

나는 그렇게 믿었다.

편집증적인 침략공포증과 적색 제국주의에서 벗어난 소련은 미국보다는 조금 더 나은 패권국이 될 수 있으리라고.

소련이 존재했을 때 수많은 피압박민족들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제국주의 열강들을 떨쳐 낼 수 있었다. 소련이 존재했을 때 자본주의 국가들마저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복지제도를 도입해야 했고 노동자들은 꽤나 괜찮은 사회에서 살 수 있었다.

소련이 사라지고 난 이후? 러시아는 눈 내리는 나이지리아로 전락해 버렸다. 중동은 전쟁으로 지옥이 되었고, 남미는 끝까지 바나나 공화국을 탈출하지 못했다.

“미국이 우리를 적대할 수 있을 것 같나? 미국인의 최소 절반 가까이가 우리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면 그럴 수 있겠나?”

“으음….”

“여자들, 유색인종들, 노동자들, 그리고 우리 대학들에 유학을 왔었던 수많은 인텔리겐치아들까지. 그들이 있는 이상, 그들이 소련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상 결코 ‘적대’가 시작되지는 않을 걸세. 그동안 우리는 세계의 더 낙후된 곳에서 우리 이상을 실현하면 되는 것이고.”

적지 않은 소련 유학생들이 미국 대학에 유학을 가 있었지만, 또 적잖은 수의 미국인들도 소련에 유학 와 있었다.

주로 가난하거나 능력은 있는데 몇 가지 조건 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한 이들이었다.

“미국이 전쟁을 한다면… 자유의 나라라는 제 이름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셈이 될테고.”

* * *

“이봐! 돈 내놔! 지갑 꺼내!”

“으음… 여기 지갑은 있소만.”

복면강도가 권총을 겨누는 데에도 중년 사내는 태연자약했다. 천천히 지갑을 꺼낸 그는 씨익 웃으며 지갑을 열어 보였다.

“가진 돈이라고는 고작 이것뿐이오. 괜히 나한테 이 돈을 뜯으려다 전과기록을 추가하느니….”

“추가하느니 뭐?”

“식사는 하셨소?”

“???”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는 강도를 뒤로하고 사내는 휘파람을 불며 휙 뒤로 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오시오! 저쪽에 베이컨과 팬케이크가 맛있는 집 하나 있소이다.”

“….”

강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다가, 고소한 베이컨 냄새가 바람에 실려 풍겨 오자 배가 꼬르륵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씨부럴, 이게 뭐람….”

복면과 권총을 적당히 뒷주머니에 찔러 넣은 그는 허, 허, 어이가 없어 웃으며 사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여기 진짜 맛있다니까?”

“…우물우물….”

입에 꾸역꾸역 팬케이크를 욱여넣는 앳된 청년을 사내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불그스름한 곱슬머리에 생각보다 앳되다 못해 어린 얼굴. 반항기 가득한 눈매에는 배고프니 먹지만 네놈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자네 몇 살인가?”

“…19살이요.”

“하하하하, 대단한데?”

열아홉 살짜리 권총강도라. 사내는 뭐가 우스운지 허탈한 듯 껄껄 웃었다. 팬케이크 다섯 장을 기어코 먹어치운 소년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아니, 이 나라 꼴이. 어린애들한테 이런 일까지 하게 만드는 나라 꼴이라니….”

“깜둥이 새끼한테 언제는 안 그랬대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쳇….”

팬케이크를 해치우고 베이컨과 계란 후라이를 케첩을 뿌려 기어코 먹어치운 소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걸어 나가려 했다.

“어어? 어딜 가나?”

“다시 일… 하러 가야죠.”

“커피 마시고 가.”

“….”

또 한 번 콧방귀를 뀌기는 했지만 결국 자리에 다시 앉은 둘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겁고 진한 커피가 올라왔다.

“으음… 이 맛이야….”

“아저씨는 근데 왜 남의 인생에 참견이에요?”

“그게 내 일이거든.”

“예?”

남자는 가슴께를 뒤적이더니 이제 동전 몇 개가 남은 지갑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어 주었다.

“존 윌리엄스? 미국… 공산당? 아저씨 빨갱이에요?”

“음, 보통 사람들이 날 그렇게 부르곤 하지. 내 스스로는 사회주의자라는 명칭을 더 선호하지만.”

“으, 난 빨갱이들이 싫어요.”

“왜?”

툴툴대는 소년에게 사내는 정색하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소년은 이마를 찌푸렸다.

“왜냐뇨, 사람들이 다 나쁘다고 하는데요?”

“그럼 많은 사람들이 흑인들이 게으르고 멍청하기 때문에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 넌 그걸 믿을 거니?”

“…그건 아닌데요….”

순식간에 말문이 막힌 소년을 보고 남자는 껄껄 웃었다. 여기 커피 한 잔 더! 설탕과 크림을 듬뿍 타서! 호탕하게 외치고 남자는 다시 소년을 바라보았다.

“남들 것을 빼앗아서 나눠 주는 건… 그 사람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거잖아요.”

“오, 그 단어는 어디서 배웠니?”

“학교에서요.”

“공부를 잘 했나보구나.”

학교 이야기가 나오자 소년은 얼굴을 확 찌푸렸다. 인자하고 푸근하게 미소짓는 사내를 보고 금방 다시 얼굴을 풀었지만.

“네. 제법 했어요. 지금은 때려치웠지만.”

“그래? 왜 그랬니?”

“…학교에서 선생이 그랬어요. 내가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하니까…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하더라고요. 현실적으로, 깜둥이 놈이 어떻게 변호사가 되겠어요? 그래서 그냥 때려치우고 나왔죠.”

사내는 이제 미소를 지우고 정색한 얼굴로 소년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목사였지만 사고로 죽었고,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보호시설에서 자랐다. 거기서 다닌 학교에서도 공부를 꽤 잘해 반 1등까지 했지만 선생은 그의 꿈을… 짓밟고 말았다.

소년은 한풀이라도 하듯 자기 인생사를 쭉 늘어놓았다. 사내는 조용히, 커피 한 잔을 더 시켜 주고는 묵묵히 그의 한탄을 들어 주었다.

“…아저씨 말이 맞아요. 빌어먹을, 내 인생은 벌써 꼬여 버렸네요. 누가 이런 강도질이나 하는 놈을 변호사로 만들어 주겠어요! 운이 좋으면 경찰의 총에 맞아 순식간에 죽고, 운이 나쁘면 평생 철창 안에서 썩다 뒈지겠죠.”

“학교에 다녀 볼래?”

“예??”

“학교에 다녀 볼 생각이 있니?”

뜬금없는 사내의 말에 소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에서 운영하는 야간학교가 있어. 주로 초중등 과정이긴 한데 고등학교 과정도 이수할 수 있을 거다. 고등학교 학력인정을 받고 법률학교에 다니면… 뭐, 변호사가 될 수도 있겠지.”

“아니, 아니, 그게 진짜라고요? 난 돈이 없는데요?”

“우리 빨갱이들은 말이야… 돈을 뜯어도 부자의 돈을 뜯지 가난뱅이들한테는 안 뜯는다고! 하하하하하하! 사실 저기 소련에서 보내 주는 돈이 있단다. 아마 이런 곳이 몇 곳 더 있는데 너는 운이 좋구나.”

“…할게요, 꼭 할래요. 나, 그 학교 꼭 다닐 거에요. 인제 와서 말 바꿀 생각 하지 말아요.”

“그래! 좋다. 음… 이름이 뭐니?”

소년은 잠시 머뭇거렸다. 진짜일까? 진짜이기에는 너무 꿈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잃을 게 없는 인생이었다.

“맬컴. 맬컴 리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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