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186화 (186/300)

# 186

186화

“끝났군….”

일본열도에 떨어진 핵폭탄은 일본의 전쟁수행 역량과 가능성을 짓밟아 놓았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담담하게 올라오는 통계들은 너무 담담한 나머지 더 충격적이었다. 도쿄에서 추정 몇십만. 오사카에서, 요코하마와 고베에서 또 몇십만.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십만의 죽음은 통계가 된다.’

내 안의 스탈린은 조소했다. 그것 보아라. 해보니 쉽지 않으냐?

아니면 나는 내 안의 스탈린이 있다고 믿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것은 그저 내가 내린 판단일 수도 있었다. 루즈벨트는 미국이 위력자료를 수집할 수 있도록 ‘융단 핵폭격’을 요청했고, 나는 렌드리스와 향후 원조 확보라는 핑계를 대고 결정을 내렸을 뿐.

나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어머니는,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어머니의 주름지고 마디진 손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어린 시절 악동들과 어울려 다니다 사고를 치고 들어오면 어머니는 ‘소소, 신부가 될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라고 하면서 등짝을 때리곤….

“?!?!”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쳐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심장이 갑자기 쿵쿵 뛰기 시작했다. 왜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하자… 스탈린의 어머니 얼굴이 생각난 것일까?

왜 내가 겪어 본 적도 없는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이 이리 생생하게 기억난 것일까? ‘나’는 천연두에 걸려 앓아 본 적도 없었고, 신학교에 다녀 본 적도 없었고, 37년에 이미 죽은 스탈린의 어머니는 직접 만나 본 적도 없었다.

“….”

내가 스탈린인가, 아니면 스탈린이 나인가.

인생은 연극일 뿐이라지만, 배역을 최선을 다해 연기해 주겠다고 마음먹고 지금 여기까지 왔지만….

나는 뭐가 된 것일까?

어쩐지 내 상황을 처음부터 재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 * *

“이것이 끝나면… 어찌 될 것인가?”

작은 메모지에 지금의 상황을 하나하나 적어 내려갔다.

‘전쟁은 끝났다.’

‘소련은 역사보다 훨씬 더 잘나가는 중’

‘냉전? 가능? 불가능? 아직 모른다.’

그리고 그 내용들을 찍찍 지워 버렸다. 아니,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빙의가 끝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스탈린은 계속 느끼고 있다시피 60대의 노인이었고, 실제 역사대로라면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은 죽는다. 사인에 대한 여러 이론(異論)들이 있기는 했지만 뇌출혈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는 정설이었고, 이 시대의 의학기술로는 치료가 어려웠다.

나는 돌아갈 수는 있을까? 돌아간다면 어떤 시대에서 깨어나게 될까?

“개변된 역사인가… 아니면 내 원래 살던 시대일까….”

그저 한낮의 꿈이었던 것처럼 깨어나 또 하루의 일상을 살아가게 될까? 아니면 내 이 모든 행동들이 무언가 변화를 만들어 냈을까.

어쩐지 그동안 익숙해진 내 집무실의 정경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마저도 신기루에 불과할 수도 있다.

“서기장 동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상념에 젖어 있던 동안, 내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그래, 바실렙스키. 뭔가 보고할 내용이 있는가?”

“예, 서기장 동지. 그동안 명령하셨던 내용에 대하여….”

손수 묵직한 서류 뭉치들을 들고 바실렙스키가 체구에 맞지 않는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이것저것 맡겨 둔 게 한두 개가 아니었기에 아마 처리할 일이 많을 것이다. 피식, 씁쓸한 웃음이 났다.

꿈인지, 현실인지, 내가 어찌 될지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의 내 앞에는 산적한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군대를 다시 감축하여 수백만 명은 될 소련인들을 집으로, 일터로 돌려보내는 문제부터 시작하여 전후의 외교관계를 조정하고 제3세계 식민지인들을 훈련시켜 제국주의에 엿을 먹이는 작업들이 남아 있었다.

그걸 총참모장으로 책임지고 끌어가는 중인 바실렙스키도 상당히 피로해 보였다.

“자네, 연극을 좋아하나?”

“예??”

뜬금없는 질문에 바실렙스키는 당황한 것 같았다. 요새야 훨씬 나아졌다 해도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별별 구실을 붙여 사람들을 숙청하던 독재자였으니. 갑자기 한 저 질문에 무슨 의도가 있을지 궁금할 법도 했다.

“아… 그다지 접할 기회가 없었으나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연극이 끝난 이후에, 배우는 본인의 연기에 어떤 책임을 지게 될 거라 생각하나?”

“….”

명석한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간파했는지 대답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기장 동지께서는 훌륭하게 직무를 수행하셨습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바실렙스키는 그렇게 대답했다. 뭔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일본에 핵폭탄을 뿌린 것은 내 직무를 위해서 합리적인 판단이었노라, 나는 그렇게 확신할 수는 있었다. 이것을 요청한 루즈벨트도 아마 같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변명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는 이걸 존나 짱 쎈 최신형 폭탄 정도로 생각했고, 나는 이게 뭔지를 알고 있다는 차이가 있긴 했지만.

하지만 남의 입에서 그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 그런가….”

“예, 서기장 동지. 그 누가 오더라도 서기장 동지께서 하신 것보다 더 잘 전쟁을 이끄시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바실렙스키는 내가 내리는 판단을 전쟁 초기부터 가장 지근거리에서 지켜봐 왔다. 총참모장으로서 내가 내린 지시들을 실현시킨 것이 바로 그였으니까.

이번 폭격 지시에 대해서도 그는 좋다 나쁘다 말하지 않았다.

일본 파시스트들을 자본주의, 제국주의자들이 괴뢰로 삼아 조종할 가능성이 있다. 맥아더에게 공을 돌리고 싶지 않은 루즈벨트가 일본을 파괴할 것을 요청했다. 이 기회에 소련이 가진 힘을 과시하는 것이 여타 핵이 없는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위협이 되어 제3세계의 해방운동이 더 가열차게 진행될 수 있다.

명분은 얼마든지 있었다.

물론 자녀가 있고, 가족이 있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수만 명의 민간인들을 그렇게 없애 버린 것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할 만도 했지만….

“군인은 원래 그런 직업이더군요. 먹고 살기 위해 이 길에 들어섰지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바실렙스키의 아버지는 사제였고, 어머니 역시 사제의 딸이었다. 그런 독실한 가정에서 자라났기에 공산당에 투신한 그와 형제들 몇몇은 가족과 의절한 채 연락을 끊고 살았다 했다.

그런 그에게 가족과 다시 연락할 것을 제안한 사람이 바로 스탈린이었다. ‘가족은 가족이지 않느냐?’, 결국 제 가족마저 모두 버린 자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바실렙스키는 내 마음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하는 일이 옳은가? 내가 하는 일이 어떤 후과를 가지고 올 것인가? 그런 것을 일일이 고민하기에는 시간은 너무 부족했고 할 일은 많았다.

“…고맙네.”

“별것 아닙니다 서기장 동지. 제가 오히려 항상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푸근하게 웃는 그와 어느 정도 시름을 던 나는 또다시 이 거대한 국가를 좌지우지해 나갈 것이다. 중도에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다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나를 원망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쩌겠는가! 나는 전지전능하지도 않았고, 모든 것을 모두에게 좋은 방식으로 이루어 나갈 힘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아마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면… 그가 나를 심판하겠지. 맨 처음 스탈린의 몸에 들어왔을 때 생각한 것처럼, 나는 이 순간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럼 일본을 계속 정리해 나가도록 하지.”

일본에는 수만 명의 소련군이 진입한 상태였다. 핵의 영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북일본 지역에서 멈출 테지만.

* * *

“세상에….”

안전하다고 하는 북쪽으로, 수만 명의 피난민 대오가 꾸역꾸역 올라오고 있었다.

핵폭격은 도시와 그 인근을 모두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지옥도가 인세에 강림하자 살아남은 이들은 추가적인 파괴를 피하기 위해 북으로, 북으로 느릿느릿하게 이동했다.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이어진 행렬을 보고 소련군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이봐! 이봐! 여기로 오면 안 돼!”

원칙적으로 남일본은 미국에게 넘어갈 영역이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 그러했다. 자기 것이 될 곳에 재를 뿌려 달라는 미국의 요청을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무튼 그랬다.

괜히 수만 명의 피난민들을 받았다가 외교적 분쟁이 발생하면 덤터기를 쓰는 것은 군인들. 하지만 일본인들은 멈추지 않았다.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저기에는… 죽음만이….”

“뭐?”

직접 물리적으로 제지하자 일본인은 무릎을 꿇고 엎드리면서 자기네 말로 뭐라뭐라 이야기했다. 혼란에 빠진 소련군은 일본인 통역사를 불렀다.

“도시가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미군의 대공습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으음….”

“재산을 내놓으라 하면 내놓고, 시키는 것이 있으면 모두 할 테니 제발 저기서 떠나게만 해 달라고 합니다.”

“아니다, 그냥 올려보내.”

소련군 장교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돌려보내라는 말인 줄 알았던 일본인 피난민은 울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머리를 찧다가, 통역사가 상냥한 말투로 이야기해 주자 이번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제기랄, 우리가 뭘 하는 건지….”

“어? 저기….”

한 어린 병사가 저만치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언뜻 보아도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이고, 젠장할. 가 보자!”

“예!”

그곳에서는 피난민들 몇몇이 피를 흘리며 죽어 나뒹굴고 있었다. 다 떨어져 누더기 비슷한 일본군복을 입은 자들 두엇이 칼을 뽑아 들고 겁에 질린 피난민들에게 외쳤다.

“천황 폐하의 신민으로서 끝까지 옥쇄하지는 못할망정 비겁하게 피난이나 가다니! 너희들은 국민이라 불릴 자격도 없다! 죽어라!”

“으아아아악!!!!”

총도 없이, 그들은 군도와 죽창으로 피난민들을 베고 찔렀다. 겁먹은 양 떼처럼 피난민들은 저항할 생각조차 못 하고 그저 무력하게 죽어 갔다.

공포를 학습한 자들의 모습은 그러했다. 항상 ‘무사 계급’과 동치된 군인들을 윗전으로 여기고 살았으나 그들마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파괴되어 버린 세상에서, 피난민들은 말 그대로 세계관의 붕괴를 겪고 있었다.

“사살해! 민간인들 다치지 않게!”

“예! 쏴라!”

탕! 탕! 탕! 총성이 울리고 군도로 막 울먹이는 어린 여자아이 하나를 내리치려던 일본군의 가슴팍에서 피가 튀었다.

핏발 선 눈으로 끄르륵거리며 총알이 날아온 쪽을 바라보던 그는 결국 피를 울컥 토하며 쓰러졌다.

“괜찮으냐? 괜찮나?”

“꺄아아아아악!”

피를 뒤집어쓰고도 멍하니 울먹이던 아이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아니면 칼을 들고 자기를 베어 죽이려는 자기네 나라 군인보다, 폭격이 이루어져도 가만히 자기 자리에 있으라는 윗대가리들보다 그냥 험상궂게 생긴 소련군이 무서웠던 걸까?

“아니, 아니다! 일단 빨리 군의관 불러와! 사람들 자상 치료할 거 가지고!”

“알겠습니다!”

“다들 진정하십시오! 우리는….”

우리는, 뭘까. 적이 아니다? 결국 이 참상을 만든 근본 원인은 우리인데?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통역사는 피를 보고 하얗게 질렸다가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여러분들을 돕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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