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184화
총독부의 ‘잔해’는 무조건 항복에 동의했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이 조선반도에 조선인이 주인 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건국함을 엄숙히 선포합니다!”
“와아아아아아!!”
경성을 점령한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는 대한민국 건국 선언을 발표하며 새로이 정부를 구성했다.
소련군 휘하 독립 조선 기갑군단 사령관 김원봉은 대한민국 국군 총사령관이 되어 한반도 남부를 여전히 강점 중인 일제를 토벌할 것을 선언했다.
국군이 해방했던 지역의 일본인들은 포로가 되어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었고, 일본 정부는 순식간에 조선총독부가 궤멸당하고 경성이 점령당한 것에 경악했다.
“일본열도에 가 있던 우리 동포들은 원산항을 통하여 귀국 중이라 합니다. 2만 명의 선발대가 먼저 귀국 중이며….”
더 이상 저항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을 파악한 그들은 본토에서의 결전을 대비하기 위해 최소한의 병력이라도 불러들이기로 결정했다.
경성에서 격파당한 120사단은 논외로 하더라도 여전히 3개 사단과 1개 여단이 배치되어 있었고, 여차하면 추가적으로 징집 가능한 인구가 70만 명 넘게 있었다.
그 모두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전장이 된 본토로 돌아가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분노한 사람들에게 쫓겨 달아났다. 땅을 빼앗기고 상권을 빼앗기고 모든 것을 빼앗겼던 조선인들이 다시 돌아오자 일본인들은 도망쳐야만 했다.
남으로, 남으로, 피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국군은 전차포와 기관총을 들이대고 감히 ‘피난민’들이 허투루 무언가를 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물론, 피난민에게 돌과 오물을 던지는 국민들을 제지하는 역할도 있었지만.
“자, 자, 지나갑니다!!”
“와아아아아! 대한민국 만세!! 국군 만세!!”
“하하하하, 감사합니다! 자, 이제 길을 비켜 주십시오!”
귀국하는 수만 명과 떠나는 수만 명. 전쟁의 그림자는 이제 민간인들에게도 피할 수 없이 깊이 드리워 있었다.
대부분의 귀국하는 조선인들은 일본 본토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에고. 그 나쁜 쪽발이 놈들, 이제 끝이 가까우니 별의별 발악을 다 합디다?”
“도시는 온통 불바다에 시골은 온통 벼며 보리며 다 말라 죽고….”
미국은 고엽제 투하와 기뢰 설치 등에 맛을 들였는지, 일본열도에 대한 제공권 확보 이후 더 독하게 온갖 것들을 일본에 뿌려댔다. 기뢰, 제초제, 항공폭탄에 소이탄까지. 최신형 B―29 중폭격기가 배치된 이후로 폭격은 한층 더 심해졌다.
관동평야는 더 이상 수확을 기대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누렇게 말라 죽은 작물들로 가득한 상황에서 농민들은 통곡했고, 그 와중에도 마지막 식량을 공출하는 정부 관리들을 향해 낫과 쇠스랑을 들었다.
노동자들 역시 폭격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자리를 사수하며 공장을 지키라는 명령에 반발했다. 내일까지 생산량을 채우지 못하면 월급을 모조리 삭감하겠다는 공장장, 도저히 먹고살 수 없다며 파업하는 노동자들에게 총을 겨누는 군대와 정부. 폭등한 쌀값과 굶어 죽어가는 국민들….
“아무튼 거기는 완전히 지옥이었다… 에휴,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지.”
“대한민국, 만세다 만세! 살려 줘서 고맙습니다!”
귀향자들은 지옥 같은 일본열도에서 교섭을 통해 자기네들을 꺼내온 정부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생활기반을 버리고 온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거기서나 여기서나 먹고살 길이 막막한 것은 매한가지인 데다 쌀값이 급등하고 식량부족이 심각한 일본보다는 조선이 낫다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일본은 점점 더 지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발사! 발사!”
쾅! 콰쾅! 쾅!
소련군의 구축함과 순양함에서 함포가 불을 뿜었다. 하늘에서는 상공에서도 육중한 체구를 자랑하는 Tu―4 중폭격기가 폭탄을 뿌리고 지나갔다.
“이 해안에는 일본군의 방어병력이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절대 주의를 놓아서는 안 된다. 시가지에 진입한 이후 주민들이 사소한 적대행위를 할 수 있지만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폭력행위는 엄금한다.”
“예! 알겠습니다!”
“만약 대민 물의를 일으킬 경우… 최대 즉결처형이다. 전 장병, 이에 유념하도록.”
소련 극동해군은 지극히 빈약한 수준이었지만, 미국의 압도적인 항공세력에 격멸당한 데다가 미국을 막아 내기 위해 거의 모든 군함이 남부로 차출된 상황이었기에 홋카이도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미 사할린에서는 대일전이 개전하자마자 2개 기갑군단이 남으로 달리며 일본군의 군사거점들을 모조리 무력화시켰다. 주둔하던 일본 구축함들은 소련군의 손에 떨어지거나 자침했고, 결국 소련 극동함대는 홋카이도 앞바다에 유유히 나타나 포격을 시작했다.
“여기에도 현지 협력자들이 존재한다고 했었나?”
“예, 그렇습니다. 일본 공산당의 현지 지부가 이후 군정을 지원할 것입니다. 빈농과 피착취 원주민들이 많아 지역 여론은 소련에 우호적이라고 합니다.”
“잘됐군. 여기를 독립시킬 것이라고는 들었는데 그런 배경이 있었나?”
일본 공산당의 당원은 불바다가 될 남부에서 탈출해 북으로 북으로 피난했다. 워낙 전국이 혼란상태인지라 핵폭격이 이루어질 36도선 이북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검문검색조차 없을 정도였다.
“아무튼 좋네, 좋아. 우리는 그럼 여기 섬의 중심 도시라 하는 이곳….”
두터운 손가락이 지도 위의 위치를 짚었다. 삿포로는 소련군이 상륙하는 서북해안에서 대략 250km 정도 떨어진 거리 위에 있었다.
삿포로를 점령하고, 혼슈로 가는 최남단의 하코다테를 점령한 이후 본토 폭격을 기다리라고 사령부는 명령을 내렸다.
“흐음… 이렇게 보니 입지가 꽤 괜찮군그래?”
“그렇습니까 각하?”
“음, 블라디보스토크와 위도는 비슷한데 부동항인 데다가…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최적의 입지가 아닌가?”
부동항을 찾아 헤매 온 러시아 확장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홋카이도는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물론 블라디보스토크나 캄차카반도의 페트로파블롭스크, 사할린 같은 거점도 있지만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이 되면 외항이 얼어붙는 곳이었다.
반면 홋카이도는 따뜻한 해류의 영향을 받아 사철 얼음이 얼지 않는 항구가 여럿 있었다.
거기다가 다른 열강의 견제를 받지 않고 태평양으로 직접 진출할 수 있다니! 사령관은 흘러가는 말로 위에서 주워들은 내용을 자랑하듯 참모들에게 이야기했다.
“서기장 동지의 뜻은… 일단 미국과의 불필요한 긴장을 피하기 위해 함대를 바로 증강하지는 않더라도 곳곳에 해군과 공군기지를 확보하여 향후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하더군?”
“과연… 그렇습니까?”
“그래. 그리고 이 섬이야말로 저기 조선… 크흠, 신생 ‘대한민국’과 함께 극동 영향력 투사의 전진기지가 될 거라 했네.”
차르시대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갈라져 내려오는 만주, 그리고 그 끝에 있는 대련과 여순항을 차지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벌였다. 물론 패하는 바람에 만주, 사할린 등을 빼앗기고 말았지만.
많은 장교들은 지금의 전쟁을 2차 러일전쟁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극동에서의 영향력 확보를 위해선 극동 제1의 열강 일본을 거꾸러트려야 했고,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대국인 중국 역시 찍소리 못하도록 눌러놓아야 했다.
“자, 이만하면 됐고 한번 가 볼까?”
저항이 없어 포격은 이미 끝나 있었다. 검은 제복을 입은 소련 육전대는 총알 한 발 날아오지 않는 해안을 유유히 지나 항구에 붉은 깃발을 게양하고 있었다.
“우라! 소비에트 우라!! 우라!!”
* * *
이와 달리 일본 남부에서는 지옥 같은 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오지마 공방전에서 숨 돌릴 틈도 없이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은 <작전명 몰락>을 가동시켰다.
“먼저 이 섬, 규슈의 남부지역을 확보해 가장 큰 섬 혼슈에 집중적으로 폭격을 가할 수 있는 공군기지를 만들 것입니다.”
‘몰락 작전’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올림픽 작전’으로 일본을 구성하는 4개 섬 중 가장 남쪽에 있는 규슈에 상륙하는 작전이었다.
“중국 대륙에 전개된 일본 육군은 대부분 소련군과 중국군의 합동 공세로 인하여 분쇄되었습니다. 소련군은 한반도와 홋카이도를 점령….”
“그 새끼들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음 이야기하게나.”
“예, 각하. 크흠… 올림픽 작전은 상륙을 통해 이 두 곳을 확보하는 것으로 종료됩니다. 보급을 위해 가고시마 만에 임시 부두를 설치하고, 미야자키 평야에 비행장을 건설한 이후 20일 이내에 다음 작전인 코로넷 작전을 개시할 것입니다.”
아이젠하워는 무안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작전을 브리핑했다. 이런 초거대 상륙작전은 한 번도 치러진 적이 없었기에 모든 장군들은 다 긴장한 것만 같았다.
동원되는 병력만 40만에 전함 수십 척, 순양함에 구축함 수백 척과 3천 기가 넘는 항공기를 투입하는 작전이니 긴장될 만도 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파이프를 질겅이는 맥아더 역시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 듯 손을 꿈지럭거렸다.
“그다음 코로넷 작전은… 본토, 도쿄 앞바다에서 두 지점에 상륙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최대 100만 명의 병력과 5천여 대의 각종 항공기가 투입될 예정입니다. 사전 포격 역시 규슈 상륙 이후 해당 작전에 투입된 군함들을 해안의 적성세력이 제거되는 즉시 동원할 것입니다.”
자릿수부터가 다른 어마어마한 규모의 병력에 다들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맥아더는 달랐다.
“뭣들 하나? 빨리 가서 준비나 해!”
“예, 예! 알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되면 이 정도 스케일은 일상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하는 것일까? 긴장한 것이 역력해 보이면서도 그는 부하들을 독촉했다.
“저 빌어먹을 빨갱이 새끼들이 다 처먹기 전에 우리가 일본을 점령해야 해! 도쿄에 누가 깃발을 휘날릴 것인가, 우리 위대한 미합중국이 해야지!”
이오지마에서도 그는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이오지마의 화산재 풀풀 날리고 발이 푹푹 꺼지는 해안가에 상륙한 수만 명의 해병대원 중 거의 10% 가까이가 부상당하고 그 몇 배가 부상을 입어 후송되었다.
이제 이 작전에는 10만 명이 넘는 해병대원과 수십만의 육군이 투입된다. 맥아더의 야심에 대체 얼마나 많은 해병이 죽어야 할까?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낯선 섬의 해안가에서 죽었고, 또 죽게 될까?
“소련… 으로부터의 지원은 없습니까?”
“아, 예. 그 문제에 대해서는 상부에서 아직 논의….”
“그 무슨 개소리야! 저건 우리 전리품일세! 우리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맥아더는 파이프를 집어 던지고는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일본은 이미 미국의 손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소련 놈들이 독일을 조각조각 내서 뜯어 가는 것을 보게. 일본 내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게 얼마나 많겠나! 그걸 다 소련 손에 또 넘겨줄 생각인가?”
자본가들에게 로비라도 받았는지, 맥아더는 입에 거품이라도 물 듯 난리를 피웠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적잖은 수는 여전히 꿍한 듯했다. 그 와중에 몇 명의 병사가 죽어야 할지는 맥아더의 계산에서 제외되어 있었기에. 지금까지의 사례로 보아 최소 수만, 아니면… 그 이상.
“저… 사령관 각하?”
“또 뭔가 드와이트?”
“본국으로부터의 전문입니다. 여기에 보면… [소련군의 폭격이 예정되어 있으니 상륙 작전의 결행을 1주 이상 늦추라]고 합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