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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181화 (181/300)

# 181

181화

각지의 항구는 패닉에 빠진 일본인들로 가득했다. 흉악한 소련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수많은 민간인들은 세간살이를 내팽개치고 귀중품만 챙겨 항구로 향했다.

“여기! 여기요! 표 삽니다!”

“내가 사겠소! 두 배! 아니, 세 배라도 주겠소!”

대부분의 수송선들이 미군의 폭격과 기뢰에 격침되어 여객선은 극히 부족했다. 그렇기에 일본인들은 더더욱 발악하며 본토로 돌아갈 마지막 기회라도 잡아 보려 했다.

앙앙 우는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커다란 보따리들을 손에 꼭 쥔 채 여객선의 표를 파는 암표상에게 달려가 사정사정하는 모습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물론, 일본인들만 조선을 탈출하려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절박한 것은 조선인들이었다.

“나, 나한테 어찌 이러실 수 있소!”

“송구합니다만… 조센… 아니, 조선인은 표 판매 대상이 아닙니다.”

“나는 황국신민이오! 그 누구보다 더 천황폐하와 일본제국에 충성했는데… 어찌 이럴 수 있소이까!”

죄송하지만 명령입니다. 짧게 응수한 해운사 직원은 아우성치는 다른 고객을 응대하기 위해 총총 사라져 갔다.

실크 옷으로 비대한 몸을 둘둘 만 조선인 부호는 털썩,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서류가방에 들어 있던 막대한 돈도 여기서는 쓸모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충성했는데!”

친일파들은 철저히 일본에게 버려졌다. 일본제국의 고위 관료들과 군인들, 혹은 일본인 부자들을 빼내는 것도 부족한 여객선에 부자이든 어쩌든 식민지인을 태워 줄 자리는 없었다.

내선일체, 내선일체. 내지(일본)와 조선은 하나다 그토록 떠들어 댔건만 인제 와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친일파들은 어안이 벙벙한 듯싶었다.

부자들, 그것도 적국에 부역한 이들은 소련이 가만히 남겨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친일 부호들에게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양쪽에 줄을 대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 항구에서 우리를 받아 주지 않는다고?”

“그렇습니다! 도망갈 방법이 없습니다! 꼼짝없이 갇혔습니다!”

시가지는 분노한 인파로 넘실거렸고 승냥이 떼 같은 소련군이 저만치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기네들이 저지른 죗값이 있는 것을 아는 친일분자들은 살기 위해 각종 방법을 모색했다.

“아니, 이거 최판득 사장 아니십니까? 하하하, 이런 누추한 데는 무슨 일로?”

“아이구야, 선생님. 민족을 위해 불철주야 고생이 참 많으십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것을 좀 받아 주십사 하여….”

배가 불룩하니 나오고 턱에 두둑이 살집이 잡힌 최판득 사장이라는 자는 청년들로 북적이는 사무실에서 연신 굽실거렸다.

그의 옆에는 비쩍 곯은 사환 하나가 제 몸통 크기는 될 만한 묵직한 가방을 낑낑거리며 들고 바닥에 털썩 내려놓았다.

“야! 이 녀석아, 그 귀한 것을….”

“허, 무엇을 가져오셨길래 그렇습니까?”

“예! 허허허, 선생님들께서 활동 자금이 필요하시지 않을까 하여 약소한… 그저 약소한 성의입니다.”

약소한 성의라기에는 그 안에 든 현금이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당사 사무실 안에 있던 청년들은 그 막대한 금액을 보고서도 별 감흥이 없는 듯 피식피식 웃었다.

은행에서 자기 앞으로 예금된 현금을 모두 꺼내 몽창 들고 달려온 사장은 예상 밖의 반응에 대머리를 시뻘겋게 붉히고 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사무실의 우두머리뻘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껄껄 웃더니 비쩍 곯은 사환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우리, 형제님은 저기서 간식 좀 드시고 계시지요. 갑자기 천지가 바뀌어서 그런지 원, 무슨 화과자며 양과자며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 좀 많아야지! 이빨 다 썩겠습니다그려.”

“예에?”

“하하하하, 저기서 가배나 한 잔 하십시오. 자, 자, 사양치 마시고.”

사환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당원 청년들의 손에 이끌려 옆 방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사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성서를 읽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하, 하하, 제가 견문이 짧아서….”

신을 부정한다는 공산당이 성서라니?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속내는 그러했지만 그는 연신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굽실거렸다.

물론 여운형 노선을 추종하는 적잖은 이들은 기독교도였으며 기독사회주의 등에 깊이 감화된 이들도 상당했지만, 그런 ‘사소한’ 빨갱이들 간의 차이를 사장 같은 대부호가 눈여겨보았을 리 없었다.

“너희들 중 가장 작은 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

“….”

“사장님, 인제 와서 이게 다 무슨 쓸모인 줄 아십니까?”

가방 안의 돈뭉치를 꺼내 휘리릭 쓸어 본 중년 사내는 돈다발을 박박 찢어발겼다. 사장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새파랗게 변했다.

“아니, 저, 그….”

“일제의 엔화가 해방이 될 조선에서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하하하하하!!!”

그렇다. 가방에 든 엔화는 일본에서나 쓸모가 있는 법. 이제 일본 땅이 아니게 된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종이쪼가리나 다름없었다.

“뭐, 뭐든 드리겠습니다. 땅문서도 있습니다! 황금도 있습니다! 보석이며 귀물이며 달라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그것은 또 무슨 쓸모입니까. 사장님, 사장님. 새 세상이 왔습니다! 그따위 것이 아니라 본인이 얼마나 잘 사셨는지를 시험받을 세상이 왔습니다. 그따위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오히려 노동자들, 조선 민중의 피고름을 짜 모은 더러운… 더러운 물건이지요.”

악덕 자본가들, 악질 사장들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여공들의 월급을 떼먹기 일쑤요, 일본인 관리들과 사바사바해 월급이라도 제때 달라고 파업을 한 노동자들을 잔혹하게 진압한 자가 인제 와서 그 피눈물 묻은 돈으로 제 명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러니 덕을 쌓으셨어야죠. 일제가 얼마나 가리라 생각하신 것입니까?”

“…살, 살려 주시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제가 살려 드릴 수나 있겠습니까? 동양흥업 최판득이를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는 우리 당원이며 조합원들이 한둘이 아닌데….”

“허어어어억!”

“늦으셨습니다. 늦어도 한참을 늦으셨습니다. 하하하하….”

스스로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새 시대의 지배자가 될 조선공산당에게 와서 재물이며 모아 온 온갖 보화를 바치며 목숨을 구걸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저 모든 것이 한갓 바람 앞의 모래성만도 못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 봐야 압수당할 겁니다. 저들이 땅문서가 사장님 금고 속에 있다고 그게 사장님 땅이라고 할 것 같습니까? 아니면 경작하는 사람의 땅이라 할 것 같습니까? 하하핫, 이거 원….”

“아… 아….”

“거, 그러게 잘 좀 하시지.”

밖에서 아련하게 노랫가락이 들려왔다. 분노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노랫가락이.

새 세상이 왔다. 불의와 비겁한 자들이 처벌을 받고 그동안 군홧발 밑에서 신음하던 이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 * *

조선 군단은 압록강을 넘어 평양에 입성했다. 두만강을 넘은 부대는 함흥을 해방시키고 흥남공단을 접수했다.

군단의 선두병력, 101 중전차대대 ‘야수대대’는 질풍과도 같은 속도로 쾌속하게 남하했다.

대동강을 건너면 순식간에 개성이 나온다. 별다른 지형지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이 흐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전차대대 병력을 선두로 한 조선 군단의 남하는 거칠 것이 없었다.

끽해야 권총이나 소총 몇 정 가지고 있는 일제의 경찰병력은 적수조차 될 수 없었다. 대부분은 어디론가 도망가거나, 맞서 싸우려다가 전차 주포가 경찰서 건물을 개박살 내는 것을 보고 항복하거나, 자살돌격을 감행하다가 기관총에 갈려 나갔다.

그렇지 않더라도 수천 명의 군중이 전차부대의 보병 역할을 해 주었다. 흰옷을 입고 팔뚝에 붉은 띠를 두른 공산당원들은 조선 군단에게 열렬한 환호를 터트리며 그들을 이끌고 주요 지점들을 점령했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독립군 만세!!”

“만세! 만세! 하하하하!”

“저기 쪽발이 놈들 좀 봐라! 으하하하하하!”

항복한 일본인들에 대한 처우는 가차없었다.

조선 군단은 전투병력 위주의 편제였던지라 수많은 포로들을 관리하기 위한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그리하여 현지의 보조인력, 즉 건국준비위원회 조직원들이 이들의 관리를 도맡았다. 일본제국의 경찰과 관료들, 그들에게 협력한 조선인들, 일본계 민간인들까지 매 도시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줄줄이 끌려 들어왔다.

평소에 그토록 경멸하고 낮잡아 보던 조선인들의 손에 굴비 두름 묶이듯 질질 끌려 들어온 이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어머니….”

“아,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시여….”

“다들 조용히 해라!”

험상궂은 얼굴에 구식이지만 기관단총을 든 장년 거한 하나가 버럭 조선말로 소리를 질렀다. 조선에 오래 있어 조선말을 아는 이들이나, 아니면 일본말만 할 줄 아는 이들이나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우,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너희들? 너희들은….”

꿀꺽,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누군가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장년인은 이렇게 사람들이 잔뜩 겁먹은 것이 우스운지 껄껄 웃다가 툭 던졌다.

“너희들은 다 일본 열도로 돌려보낸다.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네놈들이 무슨 쓸모가 있겠나? 고향으로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해탄을 건너 보내 주기는 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눈물을 질질 흘리며 고개를 숙이고 비굴하게 손을 마주 비볐다. 조선인들에게 했던 짓을 떠올리면 갈가리 찢겨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소문들이 퍼져 나갔지만, 최소한 조선인들의 과도정부는 일본인들을 학살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어린 아이를 끌어안은 새댁은 눈물을 닦으며 아이의 얼굴에 볼을 부볐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장년인의 표정은 편치 못했다.

‘아무리 동포들을 꺼내오기 위해서라지만….’

그는 제법 귀가 밝았고 일본에 무엇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었다.

건준은 총독부와의 교섭을 통해 일본에 있는 동포들을 꺼내오려 준비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팻감으로 활용될 이들이 바로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일본인들이었다.

고향, 혹은 한 번도 밟아 본 적 없는 모국. 지옥일 줄 알았던 조선 땅을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 일본인들은 기뻐했지만 저들의 미래가 과연 평안할지. 그것만은 알 수 없었다.

조선인들 중에서 악질 친일파들이 존재했듯, 일본인들 중에서도 선량하고 좋은 이들은 있었다.

어린 고아들을 자선의 마음으로 도운 사업가, 조선 학생들을 차별 없이 가르친 선생, 아니면 법 앞에 무력한 조선인들을 도와준 법률가….

그런 자들은 개별적으로 건준이며 조공이 접촉해 조선에 남을 것을 권유하고는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끈이 닿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친일파 놈들을 그짝으로 보낼 것이지….’

친일 부역 모리배 놈들만큼은 단죄를 위해 절대 일본에 보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여기를 탈출해 보려는 작자들이 거길 갔다가 지옥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과연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것 하나만큼은 아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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