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
180화
세차게 불어오는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전차병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앞을 도도히 흐르는 저 강은 떠나왔을 때와 같이 하염없이 바다로 바다로 흐르고만 있었다. 민족의 영산 백두에서 발원하여 황해로 흘러 들어가는 거대한 강, 압록강.
“아, 아, 아!”
“압록강아! 내가 돌아왔다! 우리가 왔다!”
독립 조선 기갑군단은 만주벌판을 질주하여 압록강에 이르렀다.
어릴 적 눈물을 흘리며 고향을 떠나온 병사들은 아련한 어릴 적을 회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독립군에 합류하여 고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 입대한 자들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마주친 관동군은 일본제국 최강이라는 명성이 다 허명이었던 것처럼 약체에 불과했다. 전선군의 창끝으로 일제의 군대를 짓밟고 전선을 돌파해 여기까지 이르른 조선 군단은 이제 고국으로의 돌입을 앞두고 있었다.
“2여단은 저쪽 함흥으로 간다지?”
“그렇습니다! 일단 함흥과 원산 등을 확보하고 영동으로 내달릴 계획이라 합니다.”
중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함흥 옆에는 한반도 최대의 공업도시인 흥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제 본토에 있는 것을 제외하면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큰 중화학 공단을 손실 없이 접수해야 했다.
“거, 소련 동무들 진짜… 고맙기 그지없군그래.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말이야.”
이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것은 사실 전부 소련 덕이라 해도 좋았다. 소련에서 만든 전차와 비행기를 타고, 소련에서 공급해 준 석유를 태우며 소련에서 제공한 무기를 왜놈들에게 쏴대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한반도에 진입하는 데 있어서는 아예 조선인들에게 자기네 병력까지 맡겨 준 것이다.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 17방면군을 처리하는 데는 조선 군단의 압도적인 화력이면 충분할 수도 있겠지만, 혹시나 피해가 클까 우려하여 김원봉 사령관 휘하에는 추가적으로 소련군 2개 기계화군단이 배속되었다.
“하하하하! 중대장님, 그런 말 마십시오.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아서 조국 독립을 얻으면 된다고 생각한 게 어제 같은데….”
“그래! 자네 말이 맞군. 자! 이제 도하준비가 완료되었나 보네. 가자!”
우르르르릉, 전차들이 하나하나 시동을 걸어 진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리운 조국 땅을 다시 밟는 병사들은 다 같이 환성을 터트렸다. 이제, 조선 군단의 구호는 단 하나였다.
“대한 독립 만세!!!”
* * *
압록강을 넘어 조선 기갑군단 본대가 한반도 땅을 밟았다. 이미 하루 전 두만강을 건넌 2여단은 청진을 점령하고 동해안을 타고 남하하여 함흥을 향했다.
그리고 본대는 가장 먼저 평양을 향해 진격했다.
“제기랄! 무적 관동군이 벌써 무너졌단 말인가!”
조선에 주둔한 17방면군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는 패닉에 빠져 부하들에게 마구 고함을 쳐 댔지만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 그렇습니다. 관동군 사령부에서 들어온 무전으로는 이미 하얼빈이 함락당했고, 장춘은 포위당하여 항전 중이라고….”
“심, 심양은 어떠한가!”
“심양 역시 지근거리까지 소련군이 쇄도했다고 합니다! 이쪽을 지원할 수 있는 군대는 본토의….”
본토에서 바로 달려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본토는 미국의 함대가 언제 들이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와중이라 식민지 주둔군을 빼가면 빼갔지, 증원을 해 줄 방도가 없었다.
17방면군의 원래 임무는 관동군이 공세를 펼치면 후방에서 대기하다가 예비전력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관동군의 주력부대들은 순식간에 초전박살이 나 버렸고, 이제 2선급 예비부대인 17방면군이 저 소련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와 버렸다.
“본대가 저렇게 밀려났는데 우리 부대만으로 어떻게 막으란 말인가?”
“….”
야전군이라고 하여도 인력이 부족한 데다가, 후방부대에까지 남겨 둘 인력은 더더욱 없었기에 17방면군은 고작 4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마저도 소련군이 직접 쳐들어오는 곳이 아니라 남부의 주요 도시들에 배치되어 있었다. 정세가 수상하여 조선 총독부에서는 유일한 ‘군대’를 폭동을 진압하는 데 사용할 수 있기를 원했고, 방면군은 안전하리라 믿었던 북방을 텅 비워 놓았다.
“120사단은 경성에, 150사단은 군산, 160사단은 광주, 그리고 320사단은 부산에 있습니다. 추가적으로 127혼성여단이 부산에 주둔 중이기에 이를 남겨 놓는다고 하면 총 4개 사단을 동원 가능….”
“그 전에 소련군이 먼저 들이치겠네! 대체… 이 어찌하란 말인가?”
사령관은 쾅 탁자를 내리쳤다. 부대 현황을 보고한 참모는 자기더러는 어찌하라는 것이냐는 표정으로 사령관을 바라보다 눈을 슬며시 내렸다.
후방에 주둔한 부대들을 데려와서 방어선을 형성하려면 최소 1주일은 걸릴 터. 그 많은 인력을 실어나르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있으면 소련군을 막을 수는 있느냐?
당연히 아니었다.
“병력은 예비군 수준만도 못하고, 들려줄 무기라고는 구식 고철떼기들에… 이자들을 가지고 어떻게 소련군을 막아내야 하나!”
‘그걸 저희한테 물으실 거면 왜 사령관을 하셨습니까?’
여러 참모들은 사령관을 그렇게 한심하게 쳐다보았지만 누가 저 자리에 있든 뾰족한 답이 없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작전참모! 소련군이 경성에 도달할 때까지 얼마나 걸리겠나?”
“지금까지 그들이 만주를 주파할 때의 속도로 생각해본다면… 빠르면 사흘 정도 걸릴 것으로 예측됩니다.”
허어, 사흘. 모두가 탄식했다. 동부국경의 요새지대를 놀라운 속도로 무력화시켰기에 일본군은 미처 준비할 틈도 없었다.
애초에 소련이 이렇게 빨리 개전을 하리라 예측한 이도 몇 없었다. 그야말로 허점을 찔렸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경성을… 경성을 요새화할 수 있겠나?”
“가능하겠습니다만….”
이번에도 참모는 말끝을 흐렸다. 요새화는 가능하지만 그걸로 소련군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기야, 천연의 방벽이 되어 줄 줄 알았던 대흥안령산맥 역시 순식간에 넘어와 만주의 심장이라 할 만한 장춘을 함락시킨 자들이다. 조선반도에 있는 자연방벽들이라고는 그곳들에 비하면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개울이나 다름없었다.
아니지. 저 막강한 독일군을 무찌른 데에서 이미 소련군은 충분히 강하다 할 수 있었다. 중국군 같은 잡병들과 투닥거리고, 조선인 시위대나 진압하던 일본군이 감히 도전하기 어려울 만큼.
대체 어떤 멍청이가 작전계획을 그 모양으로 짰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벌써 소련군이 들이쳐 시베리아로 끌고 갔을 것만 같았다.
“교섭… 교섭을 해 볼 수는 없겠나?”
“예? 교섭 말입니까?”
자네는 아까부터 왜 자꾸 딴지냐고 참모에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것이 자기 위엄만 손상시킬 것을 안 사령관은 불편하게 기침했다.
“그 왜… 소련군이나… 저기 그 조선인들?”
“건국준비위원회 말입니까? 여운형 씨의?”
“그래! 그 친구들 말이네.”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어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만약 진짜 교섭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조선 총독부나 정부에서 할 일이지, 군대가 할 일인가?
군대의 일은 싸움인데 싸움을 회피하고 교섭부터 찾는 비겁한 그의 모습에 그나마 군인 비슷한 이들은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의 수는 많지 않았기에 순식간에 겁쟁이들은 교섭을 하자는 사령관의 의견에 찬성하기 시작했다.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 병법에도 원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또, 몇몇 시대에 밝은 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도이치의 모델 원수라 하는 명장은 필사적으로 소련군에 저항하면서 시간을 끌었지만, 결국 독소전쟁은 소련의 승리로 끝나 버렸다.
그것도 수도가 폭탄 한 방에 폐허가 되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였다. 그들은 사실 본국도 무익한 싸움을 접고 미국, 소련과 협상에 나서라 요구하고 싶었다.
다만 본국의 항전파들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이 1억 총옥쇄를 외치며 전투속행을 주장했지만.
“그래, 그래. 그… 그런데 누구와 교섭해야 하나?”
“사, 사령관 각하! 급보입니다!”
“뭐야! 무슨 일인가!”
겁쟁이들이 이제 막 항복을 논할 대상을 찾으려 할 무렵, 전령 하나가 급하게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숨을 헉헉거리던 그는 사령관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자 허겁지겁 이야기했다.
“밖, 밖을 보십시오! 밖에….”
“밖? 밖에 대체… 흐어어억!”
수많은 인파가 바깥에 모여 있었다. 흰옷을 입고 검은 머리를 한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들은 조용했다. 안에서 회의를 하던 17방면군 사령부 인사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구호를 외치거나, 깃발을 들거나, 혹은 플래카드를 내걸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왜 저기에 나왔는지, 저기서 뭘 하려는 것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제기랄… 제기랄!”
* * *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독립군’이 조선 땅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조선공산당의 지하통신은 이틀 전부터 줄기차게 강력한 기갑군이 일제를 무찌르고 무적이라 하던 관동군을 물리치고 대전과를 올렸다고 선전했다.
각지의 점조직을 통해서, 입에서 입을 타고 승리의 소식이 퍼져 나갔다.
“온다, 그들이 온다!”
“하하하하! 빌어먹을 쪽발이 놈들을 몰아낼 날이 온다!”
마침 날짜는 조선 최대의 명절인 구정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일제는 양력에 따른 신정을 쇨 것을 엄히 강요했지만 조선인들은 여전히 구정을 쇠곤 했다.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북적거려도 일제는 그저 그러려니 하던 이때, 수 명, 수십 명씩이 몰려 거리로 나오기 시작하자 경찰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들어가! 들어가라고!”
“삐이이이이이익! 해산하라! 불법 집회는 해산하라!”
경찰들은 호각을 불고 곤봉을 휘둘렀지만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몰려나왔다.
대오의 선두에는 붉은 띠를 하나씩 팔뚝이나 머리에 두른 청년들이 서 있었다. 무섭게 침묵하면서, 그러면서도 일제의 경찰을 노려보며. 곤봉이며 군홧발에 얻어맞아도 그들은 비명 하나 지르지 않으며 앞으로 앞으로 걸었다.
“물… 물러나!”
사람들도 그들을 따라 침묵했다. 일제의 주구들을 겁먹게 하는 데에는 무기나 구호가 필요하지 않았다.
겁쟁이들, 제국주의라는 종이호랑이에 기대어 자기네들이 영원토록 위세를 부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비겁한 작자들.
경성뿐만 아니라 주요 대도시들에서는 이와 같은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흰옷을 입고 묵묵히 거리로 몰려나왔다. 몰려나와 일제의 지배기관, 도청이나 군부대, 혹은 각종 시설 앞으로 전진했다.
‘저들은 감히 총을 쓸 수 없습니다.’
감히 이 상황에서 발포를 명령할 만치 간이 큰 자는 없다. 전황이 기운 것을 아는 자들이, 내일이면 이 땅에서 물러가야 할 자들이 감히?
시위대는 그래서 침묵을 택했다. 알아서 꺼져라. 더 이상 이 땅을 더럽히지 말고 물러가라.
“찍소리 못하고 살던 굴욕의 세월, 더 이상 우리에게 강요할 수 없다. 조선 독립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