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178화
일본 관동군의 작전계획은 일본군다운 방식으로 짜여 있었다.
먼저, 연해주 방면으로 침공을 개시해 극동 소련군의 지상 및 공중전력을 격파하고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보로실로프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한다. 이후 서쪽, 자바이칼스크 방면에서 지구전으로 버티다가 공세로 전환하여 소련군을 격파한다.
요약하자면, 껄끄러울 수도 있는 후방(동쪽)을 먼저 정리한 후 서쪽으로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북쪽으로는 양동작전을 걸어 소련-만주 국경을 돌아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끊어 연해주 방면으로 추가적인 증원을 막거나, 대규모 기습을 통한 소련군 공세역량의 파쇄라든가. 여러 가지 계획이 존재했다.
급속 기동으로 소련군의 주 방어선을 우회하여 취약지점을 돌파, 소련군을 포위하고 섬멸하는 것을 기본 골자로 했던 관동군의 작전계획안은 전쟁의 시작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다.
“이게 관동군의 작전계획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총참모장 각하. 42년 작전계획이기에 변경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바실렙스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오만하고 불같은 성격의 주코프에 비해 적을 항상 신중하게 평가하려고 노력하는 지장(知將) 타입의 그도 이번만큼은 일본군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아니, 대체 뭘 가지고 우회를 한단 말인가? 보병? 기계화된 병력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우회해서 누굴 어떻게 포위섬멸을 하는 건가?”
“그것이… 저도 잘….”
“고작 이런 경전차 1천 대 가지고 어디 투입한다고… 이 너른 전장에서?”
소련식 기동전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기계화군단의 장갑차량 보유는 통상 250대 이상이었다. 소련 기갑군단/기계화군단이 독일이나 서방군으로 치면 사단급 편제였기에 관동군의 전차전력은 고작 4개 사단 규모.
그마저도 74mm도 아닌, 47mm 유탄포 따위를 장착한 경전차 몇 대를 가져온다고 해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을까?
부패한 관동군 장교단에게서 빼돌린 일본군의 전차전력 자료에는 미제 경전차인 M3 스튜어트를 ‘강력한 중형전차’, M4 셔먼 중형전차를 ‘엄청난 성능의 중전차’로 표기해 두었다.
동부전선에서 독일의 판터, 티거 같은 진짜배기 괴수들과 싸워 온 소련군으로서는 기가 찰 정도였다.
“내가 아는 셔먼과 같은 셔먼 맞나? 저게 왜 ‘중전차’인 거지…?”
소련 역시 렌드리스로 몇 대 받아온 셔먼 전차들이 있었기에 셔먼 전차의 성능 정도는 알고 있었다.
T-34-85 전차와 비교했을 때 여러 비-카탈로그 성능 면에서는 충분히 우수했지만, 기본 화력이나 장갑 면에서는 개량된 T-34 전차가 절대 밀리지 않았다. 그런 T-34 전차를 소련은 만 대 단위로 생산해서 배치했고.
여기에 T-34보다 한 체급 위, 독일 중전차들을 상대하기 위해 개발한 부됸늬 중전차까지 생각한다면 셔먼 따위를 중전차라고 부르는 일본군은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자네들, 솔직히 말해서 이 작전계획은 기만 같지 않나? 이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모든 정보는 저것이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총참모장 동지.”
“아니! 최소한 저기 대흥안령산맥에 몇 개 사단 정도는 배치해야 공세를 방어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바실렙스키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군사학을 배운 이들이 이런 계획을 짠다고?
일본군은 군대도 아니란 말인가? 이런 놈들이 어떻게 미군과 잠시라지만 대등하게 싸웠단 말인가? 독일은 무슨 생각으로 머릿수라도 미칠 듯이 많은 중국을 버리고 이놈들하고 손을 잡았나?
아, 애초에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졌다면 소련을 침공하지도 않았겠지.
“으으음… 첩보라인을 재기동해 보게. 반드시, 반드시 뭐가 있을 게 틀림없어!”
“알, 알겠습니다. 다만….”
“다만 뭔가?”
참모가 말꼬리를 흐리자 바실렙스키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대답을 독촉했다. 하지만 참모는 여전히 의아한 듯했다.
“이미 현지 정찰결과 대흥안령산맥에는 방어군이 없다고 합니다. 일본군은 작계상으로나 실제로나 그곳으로는 기갑부대가 기동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아르덴 고원을 보고서도?”
“…그렇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것이 바실렙스키의 감상이었다.
소련군의 기갑부대는 스칸디나비아 북부의 험지에서도, 카르파티아산맥에서도, 발칸의 산악지대에서도 적군을 격멸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발 2천 미터까지 이르는 대흥안령산맥이 쉽지는 않았건만, 단 몇 개 사단만 배치해도 소련군을 능히 저지할 수 있는 이 요지를 그저 ‘돌파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리고 비워 둔다고?
“하지만… 저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
이제는 그가 할 말이 없었다.
발터 모델,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 같은 혁신가들, 명장들을 상대하다가 일본군의 졸장들, 잡병들이 나타나니 적응이 어려웠다.
당연히 이 정도는 대응책을 마련해 두었겠지! 하고 작전을 짰더니 당연히 안 해 놓는 신기한 족속들. 그가 느낀 일본인들이 바로 그러했다.
“…알겠네. 일단 그럼… 사할린과 쿠릴 열도, 그리고 홋카이도에 대한 상륙 작전은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서기장은 독일을 찢어 버리며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찢어 먹을 계획을 세워 두었다.
표트르 대제 이후로 러시아가 원했던 부동항으로의 진출을 위해 사할린, 쿠릴 열도, 홋카이도를 점령하고 일본을 남북으로 분할하여 미국과 함께 군정을 세운다. 독일을 뜯어 먹은 것처럼 일본을 뜯어 먹는 것도 염두에 두었지만…
“모조리 불태워 버린다면….”
해양수송이 어렵고, 일본의 공업 능력을 책임지는 대도시들이 대부분 미국이 영유할 남부 지역에 집중된 만큼 가지지 못할 것은 불태워 버리기로 결론이 났다.
소련은 그 대신 만주에 있는 각종 공업시설들을 장악하여 극동의 파트너가 될 조선인들에게 제공하기로 하였다.
너무 많이 먹으면 미국한테 돈 받아올 때 눈치가 보일 수 있다나? 아무튼 그랬다.
* * *
“허… 어떻게 여기에 방어군 하나가 안 보이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대흥안령산맥은 험하기는 했어도 역전의 용사들에게는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독일이 항복하기 이전, 미리 철도를 통해 제1 발칸 전선군이 극동으로 이동했다.
자바이칼스크 전선군으로 개칭된 이들은 서부 소련-만주 국경을 따라 도도하게 평야를 굽어보는 대흥안령산맥을 돌파해 러일전쟁의 한이 서린 요동 반도, 대련까지 점령할 것을 명령받았다.
만주 진공작전의 주공으로, 가장 험악한 지형을 돌파하고 가장 강력한 방어선에 마주할 것을 예상했던 자바이칼스크 전선군은 그러나, 거의 소풍을 나온 듯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이곳으로 소련이 기동할 수 없으리라 정말로 믿은 듯했다.
“하하… 우리를 막을 수 있다고? 이까짓 산맥 따위가?”
“프리퍄티 습지 정도라면 모릅니다….”
카르파티아산맥을 넘고, 발칸의 고원지대에서 독하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SS 부대들을 토벌하던 이들에게는 만주는 그저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자 진격하자!”
하늘에서는 종종 일본 전투기들이 소련군을 마중 나왔다. 마중 나왔다 표현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소련 지상군에게는 전혀 피해를 입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악! 뭐가 저렇게 단단해!”
[분명히 맞혔는데, 맞혔는데 끄떡도 안 합니다!]
그렇다고 소련 공군의 피해가 큰 것도 아니었다. 불곰 전투기들은 비슷한 시기에 개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설계 측면에서 한참은 유리했다.
일본 육군의 하야부사 전투기가 1,150마력짜리 엔진을 얹고 최대한 장갑이며 기체하중을 줄여 저고도에서의 선회전을 노리고 개발되었다면, 불곰은 그 두 배가 넘는 최대 2,600마력까지 뿜어내는 고출력 엔진을 얹었다.
남아도는 출력은 모조리 맷집에 투자한 데다가 무장마저도 훨씬 더 대구경으로 갖춘 불곰 전투기는 하야부사를 얼마든지 사냥할 수 있었다.
“저놈들 뭘 쐈길래… 맞아도 맞은 것 같지가 않은데?”
[그러게….]
20mm 칼라시니코프 중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불곰 전투기보다 체급이 반절밖에 안 되는 데다가 금속재에 문제가 있는지 하야부사는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어 활활 타며 추락했다.
매(하야부사)와 불곰의 싸움은 이미 그 결과가 결정되어 있었다. 체급도 두 배, 무장의 구경도 두 배, 그리고 숫자도 두 배. 동부전선에서 살아남은 독일군 에이스들을 상대로 다굴을 쳐서 기어이 격추하는 데 익숙했던 소련군 파일럿들은 킬마크를 올릴 기회에 신이 나서 달려들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지상지원을 위해 대지공격용 항공폭탄이나 집속탄 등을 장착해야 했겠지만, 지상에 공격할 목표물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대공화기만을 장착한 불곰들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비실거리는 하야부사들을 찢어발겼다.
“어? 지상은 이미….”
[예! 다 정리했다고 합니다!]
비행기에다 대고 카미카제 전술까지 시도하는 일본 항공기들을 정리했을 무렵 지상에서도 싸움은 끝나 있었다.
기갑부대는 변변한 포병이며 대전차포도 없는 일본군을 그저 짓밟고 지나갈 수 있었다. 제아무리 일본인들이 벙커를 파고, 참호를 파고 전차부대를 저지하려 해도 그들은 기본적으로 화력이 부족했다.
마찬가지로 보병만으로 밀어붙이는 중국군을 상대할 수준의 화력만을 갖춘 일본인들은 움직이는 강철 토치카인 소련 전차들을 때려 부술 만한 무기가 없었다.
“뭐 하는 놈의 군대가 이 모양이야?”
독일군은 마지막까지도 무서웠다. 베를린을 박살 낸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자근자근 밟아서 ‘배후로부터의 중상’이니, 재무장이니 같은 말을 못 하도록 해야 그 무서운 군대를 다시 만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뭔가 달랐다. 허접했다. 허술했다.
* * *
허접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소련이 욕심내는 것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함대, 항구, 인력….”
거기에 괴뢰국, 만주국까지. 추이코프 대장은 자기 앞에서 굽실거리는 중국인들 한 무리를 바라보며 혀를 쯧쯧 찼다.
곧 소련군의 선두부대가 만주국의 중심도시 중 하나인 하얼빈에 입성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만주 공산당 창당을 선언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 모택동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내기 위해 내몽골과 만주 지역에 대한 영유를 포기했다. 아마 중화민국의 지도자인 장개석은 펄펄 날뛰겠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벌써 중화민국을 상대로 또 한 번의 내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만주 지역을 소련이 점령한 후 중국 공산당의 명목상 우당(友黨)인 만주 공산당은 이 지역을 잠시 장악하였다가 소비에트 공화국 건국을 선언하고 소련에 합류하거나 위성국이 될 것이고.
일본이 이 지역에 건설해 둔 기반 인프라와 철도시설, 그리고 소중한 항구들은 고스란히 소련 것이 된다!
5천만 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는 소련의 공장으로 이주해 일할 노동력이 되고, 만주의 풍요로운 대지에서는 소련인을 먹여 살릴 식량을 생산한다.
차르가 잃어버린 여순항도 조차를 통해 소련 손에 들어와 중국을 향해 겨눈 칼날이 될 것이다.
이걸 모아서 고스란히 소련에 넘겨줄 일본이 그저 고마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