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175화
“개 같은 빨갱이 새끼들!!!”
“고정하십시오, 장군….”
맥아더는 항상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발을 쾅쾅 굴렀다.
그의 부관, 아이젠하워는 애써 그를 말리려 했지만 채신머리없게도 맥아더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놈들이 일본을 점령하면 우리는 뭐가 되는가! 뭘 위해서 이렇게 많은 피를 태평양에 흘렸는가!”
‘당신 대선을 위해서지….’
공화당이 이미 암암리에 토마스 듀이와 맥아더 사이에서 간을 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FDR은 벌써 대놓고 4선을 통해 전쟁을 자기 손으로 마무리 짓겠다고 천명했기에 민주당의 폭주를 꺾을 강력한 후보가 필요했다.
젊고 유능하고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공화당 후보인 듀이와 전국적인 인기를 끄는 전쟁영웅이지만 가려진 그림자가 많은 맥아더. 둘 모두 현직 대통령이자 전승을 이끈 FDR에 비하면 한 수 처지는 이들이었다.
그것을 알았기에 맥아더는 최종적으로 듀이를 누르고 공화당 후보로서 전당대회에서 승리하기 위해 압도적인 결과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소련이 그 붉고 털이 부숭부숭 돋친 손아귀를 그의 전리품이어야 할 일본을 향해 뻗쳐오고 있었다. 미 함대는 최대한 빠르게 일본열도를 향해 북진하고 있었지만….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의 방어선을 돌파하려면 전함의 포격지원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각하, 상륙거점이 반드시 하나는 필요….”
“그래! 그럼 뚫어 버리면 되는 것 아닌가!”
“알, 알겠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먼저 도쿄에 깃발을 꽂아야 하네. 빌어먹을 과학자 놈들은 소련 새끼들이 그런 걸 만드는 동안 뭘 했다는가?”
루즈벨트도 빨갱이나 다름없어…. 가까이 있는 사람들보고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맥아더를 보며 아이젠하워는 멋쩍게 웃었다. 맥아더는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루즈벨트가 태평양 전쟁에 소련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맥아더의 독선을 막을 수는 없었다. 화려한 이력, 최연소 장군이자 최연소 원수이자 최고사령관으로 지낸 오랜 시간이 그의 귀를 닫아 버렸다.
물론 아예 닫혀 있는 것은 아니라서 본토의 매카시 같은 이슈는 여전히 잘 귀담아듣고 있었지만. 맥아더는 그 젊고 ‘용맹한 애국지사’를 부통령 후보로 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은 부족했다.
미국 대선에 출마할 후보를 결정하는 전당대회는 3월 14일부터 5월 19일까지였다. 적어도 그전까지는 일본을 정리해야 했다. 최소한 후보가 지명되고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는 6월 이전에는.
하지만 아직 미군은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의 단단한 방어선에 부딪혀 차일피일 시간만 쓰고 있었다.
“다들 뭐 하고 있나! 이오지마부터 돌파하도록 한다. 해병대는 최대한 빨리 상륙작전을 실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예? 하지만 이오지마의 방어는….”
“그까짓 거 포격으로 다 때려 부수면 되는 것 아닌가!”
맥아더는 다시 한번 벌컥 화를 내며 집무실로 향했다. 한 척씩 취역하기 시작한 아이오와급은 벌써 8척이나 되어 해병대를 위한 화력지원이 가능한 상태였다.
몇 주 동안 포격을 퍼부으면 그 어떤 방어시설이라도 무너지겠지만, 소련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이오지마를 돌파하고 본토 상륙을 준비한다?
‘해병대원들 수만 명쯤은 자기 대선을 위해서 던져 넣겠다는 속셈이지….’
‘미쳤어. 정말 제대로 미쳤어! 그럴 거면 왜 남태평양 섬들에 이렇게 집착한 것인가!’
승리는 가까이 보이고 있었지만 내디뎌야 할 발걸음은 걸음걸음마다 피로 가득 물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 맥아더는 결국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몇몇 장군들과 제독들, 특히 맥아더를 극히 혐오하는 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국을 맥아더에게 넘겨주느니 차라리 아시아를 소련에 넘겨주는 게 낫겠군….’
* * *
“이쪽으로! 이쪽으로! 자, 거기서 멈춰 서시오!”
“여기다! 여기로 하역하도록!”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드는 소련의 국경도시들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오는 병력과 물자들이 한가득 쌓이고 있었다.
소련은 수십만의 병력을 독일을 비롯한 구 추축국 점령지 통제를 위해 투입했으면서도, 또 수백만을 동원해 극동에서 공세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수백만을 전역시켜 사회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200만에 가까운 병력과 수만 대의 전차와 자주포들, 수천 대의 군용기들이 속속 극동으로 집결했다.
소련군의 목표는 간단했다.
<일본 관동군을 압살하고 극동아시아를 해방시킨다!>
80만이라 하는 일본 관동군은 수적으로는 규모가 있는 편이었을지 몰라도 질적으로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극동군구, 이제는 개편되어 자바이칼스크 전선군 사령관이 된 추이코프 상장의 말로는 4개 기갑군단이면 박살 내버릴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사자는 토끼를 사냥할 때에도 전력을 다하는 법. 소련군은 관동군을 그저 압살하는 수준이 아니라 처절하게 박살 내고 인류사상 가장 거대했던 전쟁에서 단련된 대육군을 세계에 선보이고자 했다.
선보여 줄 대상에는 장개석과 모택동 등 중국의 권력자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고.
“아군의 전선군은 총 4개. 일본령 만주를 치고 들어갈 3개 전선군과 화북 지역으로 남하하여 전선의 일본 주력군을 격파하고 중국 공산당군과 연계할 1개 전선군. 여기에 동투르키스탄(=신장 위구르), 그리고 티베트 지역으로 침투할 비정규전 병력이 있습니다.”
“좋아, 좋아… 아주 좋구만그래.”
전쟁 전 예측한 물자 필요량을 즉시즉시 조달하기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량이 너무나 부족했다. 극동과 유럽러시아의 연결을 강화하고 유라시아에 걸친 대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증설해야 하지만 일단 지금은 미뤄 두고.
한 달의 유예기간을 요청한 것도 최대한 많은 물자를 거점도시들에 집적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필요량을 거의 맞춘 만큼….
“한 달 이전, 불가침조약의 공식적 파기 이전에 공세를 시작하도록 하지. 다들 준비는 되어 있겠지?”
“예? 서기장 동지, 그것은….”
“일본 놈들도 그랬고, 독일 놈들도 그랬고, 우리가 이렇게 했다고 미국이 비난할 것 같나? 오히려 더 좋아할 것이네. 너무 걱정 말게나.”
비열한 수작으로 일본을 엿 먹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전후 미국이 트집을 잡을 여지는 있지만 자기네들이 선전포고 없는 선제타격에 당할 만큼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바실렙스키는 떨떠름한 듯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는 브리핑을 이어갔다.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일단 아군의 4개 전선군은 개전과 동시에 기갑부대를 선두로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지휘봉이 익숙한 이름의 도시들을 가리키며 쭉 내려왔다.
만주는 남서쪽 면이 중국 본토와 붙어 있는 마름모로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소련 방면으로 노출된 마름모의 한 변마다 1개 전선군을 투입하여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 계획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방면, 즉 마름모의 남동쪽에서 서진해 만주국을 남동쪽에서 치고 들어갈 우수리스크 전선군은 일본 1야전군을 포위해서 섬멸한 이후 한반도로 바로 남하하여 최대한 빠르게 경성을 해방시키고 부산으로 향한다.
기갑군이 남하하는 동안 우수리스크 전선군의 제병협동군은 일본 38야전군을 분쇄하여 장춘-선양 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우익을 강타하는 것을 막을 계획이었다.
마름모의 북동쪽에서 남진할 블라고베셴스크 전선군은 치치하얼과 하얼빈을 점령하고, 일본 4야전군과 5야전군을 분쇄한다.
그리고 가장 거대한 주력군인 자바이칼스크 전선군은 전 부대가 차량화, 기계화된 부대였다. 이 막강한 기동성을 이용해 일본군이 요새화시킨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장춘과 심양을 점령하고, 대련에 요동반도까지 손에 넣는 것이 작전목표였다.
마지막으로 내몽골 방면에서 출발하여 진격할 화북 야전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연안(延安)에 본거지를 둔 중국 공산당군과 연계하는 한편, 주력군은 바로 북경으로 직진하게 되어 있었다.
“일본군의 전력은 대단하지 않은 수준으로 파악됩니다. 정규편제를 모두 갖춘 사단들은 대부분 태평양의 전장으로 차출되었거나 중국 내륙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습니다. 이들을 후퇴시키려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게 쉬울 리는 없다. 당연히 그렇겠지.”
중국 대륙은 넓었다. 지독하게도 넓었다.
‘유럽 대륙’ 이 모두 합쳐서 대략 1천만 제곱킬로미터 정도 되었다. 실제 역사에서 현대 중국의 영토 크기는(아직은 국경이 유동적이니) 960만 제곱킬로미터로 전 유럽 대륙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물론 이 비교는 공평하다 하기 어려웠다. 유럽 대륙의 절반 가까이, 400만을 차지하는 유럽러시아와 60만짜리 우크라이나, 합쳐서 40만 정도 되는 벨라루스와 발트 3국 모두가 지금은 소련 영토이니 나머지 유럽 국가들을 모두 합쳐도 중국의 반절밖에 안 되었다.
만주국만 해도 독일-프랑스-이탈리아를 모두 합친 것보다 거대했다! 80만 군대가 거대해 보일지언정 여기에 사는 8천만 인구와 서유럽의 대국인 독프이를 합친 것만큼 거대한 영토를 생각하면 많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거대한 땅을 혼자 다 처먹겠다고 뛰어든 일본 놈들은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다 꼬라박고 실패했지만.
아무튼 그 넓은 땅에 듬성듬성 배치된 군대를 다시 데리고 와서 소련군을 막아내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태평양으로도 끌고 가서 죽을 것이 뻔한 결사전을 치르다 다 죽여 버렸다. 자기네 손으로.
‘고작’ 80만 명에 제대로 된 포병도, 전차도 없는 허접한 보병 무더기로는 혈전을 치르며 강력해진 소련군 앞에서 갈려 나갈 뿐.
“다만… 우수리스크 전선군 정면에는 다수의 국경요새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쪽 전선에서 대량 손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규모의 포병전력과 ‘전략공군’까지 배치한 게 아닌가? 추가적인 병력 배치가 필요할 것으로 보는가?”
“아, 아닙니다. 현지 사령관인 로트미스트로프 대장은 작전의 성공을 장담했습니다. 다만 서기장께서 조선… 한반도의 해방을 위해 해당 부대가 가급적 적은 손실을 입도록 작계를 짜라 하셨기에….”
신중한 바실렙스키, 바갈공명은 내가 내린 모든 명령을 일일이 계산에 넣고 작전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한반도로 돌입하는 만주 동부의 주공인 우수리스키 전선군에는 ‘독립 조선 기갑군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만주에서, 일본에서, 중국에서 소련으로 탈출해 입대한 이들은 맹훈련 끝에 최강의 훈련도를 자랑하는 부대로 거듭나 있었다.
일반적인 기갑군단의 3개 여단 삼각편제에 더하여 1개 자주포병여단, 중전차연대, 기계화여단까지 편성되어 전투력 역시 소련 내부에서 가장 막강한 부대 중 하나라고 할 만했다. 여기에 ‘전략공군’까지.
소련군의 주공은 일본이 방심한 채 비워둔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진격할 자바이칼스크 전선군이었지만 전력 면에서 우수리스크 전선군이 밀리지는 않았다.
“우리는 병력으로는 2배 이상, 전차와 야포는 6배 이상 저들을 압도하네. 공군에 있어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얼마나 빨리, 얼마나 적은 손실을 입느냐가 관건이네. 다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나는 자네들의 실력을 믿고 있네.”
긴장하면서도 기대하는 장군들의 얼굴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일본 놈들이 아무리 잘나도 독일의 모델이나 만슈타인만 하겠나? 자네들은 그들조차 이겼네. 걱정 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