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172화 (172/300)

# 172

172화

“승리의 날이여, 이날을 위해 얼마나 먼 길을 달려왔나

폐허가 된 고향, 자욱한 포연 속에서 승리의 날이여!

승리를 위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이날을 위해 우리 모두 결사의 각오로 싸웠네

강토가 화약 냄새로 덮인 승리의 날!

그날의 용사들이 모인 승리의 날이여!

환희로 모두 눈물을 흘리네… 승리의 날이여!

승리의 날이여! 승리의 날이여!”

붉은 광장에는 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이 부르는 노래, <승리의 날>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에 겨워 웃으면서도 떠나보낸 가족, 형제, 친지와 친구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위풍당당한 붉은 군대의 장병들은 붉은 광장에서 퍼레이드를 벌였다.

“바렌츠해로부터 지중해까지! 모든 전선에서 싸워 온 조국의 아들딸들이 귀환했습니다! 박수와 환호로 맞이해 주십시오!”

“와아아아아아!!! 붉은 군대 우라!”

아나운서도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상기된 목소리로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레닌그라드, 스몰렌스크, 민스크, 르보프를 해방시킨 우리의 위대한 병사들! 부다페스트와 부쿠레슈티, 바르샤바와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한 우리의 위대한 병사들! 그들이 입장합니다!”

수백 개의 깃대를 잡은 병사들이 척, 척, 척, 걸어 들어왔다. 곳곳에서 플래시가 터지고 꽃가루와 휘파람이 날아들었다.

깃대에는 각양각색의 군기들이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중 붉은 군대의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더러운 파시스트 침략자들의 군기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군대는 저들을 쳐부수고 결국 승리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 만세! 붉은 군대 만세!”

항복시킨 독일 사단과 군단의 군기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와 핀란드군의 군기들만 하여도 수백 개가 넘었다.

일부러 깃대를 바닥으로 향한 채, 병사들은 질서정연한 걸음걸이로 걸어와 깃발들을 한 무더기로 던졌다.

레닌 영묘 앞, 나와 정치국의 간부들이 일제히 도열한 연설대 앞에 수백 개의 깃발들이 쌓여 동산을 이루었다.

“소비에트 연방 원수 주코프 동지, 코네프 동지, 그리고 로코솝스키 동지가 입장합니다! 모두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광장 저편에서는 각기 백마와 흑마를 나누어 타고 횃불을 든 채 세 사람이 입장했다. 각기 북부, 중부, 남부의 세 전선을 이끌어 파시스트 군대를 격파한 영웅들이 입장하자 사람들은 천지를 진동시키는 박수로 답했다.

“우라! 우라! 우라!”

세 원수는 각자 횃불을 하나씩 쥐고 있었다. 레닌 영묘 앞에 쌓인 군기 무더기 위로, 횃불이 던져졌다.

패배한 독일군의 군기들은 거대한 불이 되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 레플리카지만….’

실제로 노획한 군기들은 대부분 새로 지어질 <대조국전쟁 박물관>에 전시하기 위해 보존처리를 받고 있었다. 우리의 승리를 보여 줄 귀중한 유물들을 분풀이용으로 마구 태워 버리기에는 아까웠다.

물론 레플리카든 무엇이든, 승리를 보여 준다는 데에선 다를 것이 없었다.

“대조국전쟁은 우리 소련 인민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붉은 군대의 병사들, 공장의 노동자들, 집단농장의 농민들, 그리고 지식인들까지. 소련 인민의 위대한 투쟁에 버금갈 만한 것은 그 무엇도 없다고 감히 단언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전쟁이 끝났다. 실제 역사에서는 수천만이 죽었을 이 전쟁을 그 절반의 절반에 가까운 사망자만을 낸 채, 1년 반이나 일찍 끝냈다.

벅찬 자부심이 가슴속에서 끓어 올라왔다.

당연히 나만의 공은 아니었다.

“하늘에서, 땅에서, 바다에서, 카프카스와 카르파티아의 산맥에서부터 프리퍄티의 늪지에까지. 수많은 곳에서 싸운 붉은 군대 장병들의 승리입니다.”

“우랄과 스탈린그라드,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공장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인민을 위한 물건을 생산해 낸 소련 노동자들의 승리입니다. 고된 노동으로 인민을 위한 식량을 생산한 농민의 승리이며, 인민들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노동한 인텔리겐치아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끝에서 끝까지, 파시즘을 향해 투쟁해 온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입니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입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은 <인터내셔널>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온다!

대지의 저주받은 땅에 새 시대를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해!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라!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쾅! 쾅! 쾅! 쾅! 축포가 발사되었고, 사람들은 함께 국가(國歌)를 제창하며 박수 쳤다.

203mm BSU-203 자주포의 발사음은 장약을 절반만 넣었는데도 하늘을 뒤집어 버릴 것만 같았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이 전쟁의 승리자들입니다. 승리 만세! 승리의 날 만세! 승리자 인민 만세! 만세! 만세!”

“우라! 우라! 우라!”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지만 광장의 열기는 그 눈을 모조리 녹여 버릴 것만 같았다. 연대기와 여단기, 사단기를 제각기 받쳐 든 병사들은 칼 같은 박자에 맞추어 광장을 행진했다.

수백 대의 자주포와 전차들, 야포들이 쿠르릉거리는 굉음을 내며 진군했다. 수십 대의 항공기가 곡예비행을 하며 하늘을 낫과 망치 모양의 비행운으로 수놓았다.

“이제 입장합니다! 붉은 군대의 가장 강력한 부대! 베를린을 함락시키고 붉은 깃발을 휘날린 제5근위전차군의 2근위기갑군단입니다!”

콰콰콰쾅! 기갑군단의 선두를 맡은 부됸늬 전차들은 일제히 축포를 발사했다.

“2근위기갑군단의 전차들은 파시스트들의 콘크리트 방어선을 짓밟고 침략군을 지상에서 쓸어내어 버렸습니다. 근위군단의 포성은 함락당한 베를린에 영원히 울려 퍼질 것입니다! 세계 최강의 전차들을 박수로 맞이하여 주십시오!”

수백 대의 전차들이 광장의 구석에서부터 모여 대열을 이루었다. 세찬 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깃발을 제각기 하나씩 꽂고, 전차병들은 큐폴라에서 상반신을 내밀고 대중의 환호를 한 몸에 받았다.

“국경의 구름은 유유히 떠가고

적막한 침묵 속에 변방은 거칠다

아무르 강변에는 조국의 감시병이 서 있다

아무르 강변에는 조국의 감시병이 서 있다

세 명의 전차병, 세 명의 즐거운 전우들이

전차에 함께 타고 있다.

세 명의 전차병, 세 명의 즐거운 전우들이

전차에 함께 타고 있다.”

* * *

니콜라이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군단의 대표로 선정되어 퍼레이드의 맨 앞에서 전차를 끌고 기동할 것을 명령받았다. 그저 길을 잘못 들었다가 멋모르고 저지른 일이었지만, 군단장님, 혹은 그 이상의 높으신 분께서 굉장히 흡족해하셨다나?

베를린까지 따라온 한 미국인 종군기자가 그와 소대원들이 폐허가 된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 붉은 깃발을 꽂는 순간을 절묘하게 찍어 냈다.

그 사진은 <승리의 날>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되어 세상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사진의 주인공인 니콜라이와 부대원들 역시 몇 번이나 신문과 방송의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퍼레이드에서 군단의 선두를 맡는 영예까지!

지금은 근엄하게 턱을 꼿꼿이 하늘을 향해 치켜든 채 애써 웃음을 참았지만, 그는 당장이라도 뛰어올라 환호하고 싶었다.

“소대장님! 이거 끝나시면… 아시죠?”

“음음, 알지!”

전차를 몰던 운전수가 나직하게 속삭이자 니콜라이는 부동자세를 깨지 않으면서도 대답을 해 주었다.

그의 부대에서는 또 다른 건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와, 근데 진짜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

“그러게, 하하하핫… 나도 솔직히 실감이 안 난다.”

전차병들은 자기네들끼리 바깥에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어차피 밖에 보이는 것은 전차장이니 나머지들은 떠들어도 된다는 생각일까?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서기장이 직접 내려 주는 훈장이라니! 물론 베를린에 선두로 진입한 기갑군단의 장병들은 모두 일정 이상의 포상을 받으리라 듣기는 했지만, 서기장이 직접 훈장을 주는 사람은 몇 없었다.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퍼레이드를 끝마치고서는 니콜라이와 소대원들은 크렘린으로 향했다.

“와… 하하하하하….”

“여기가 바로….”

“이봐! 무슨 촌뜨기들처럼 그래!”

험상궂은 NKVD 요원은 말로는 호통을 치면서도 얼굴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애초에 이 병사들이야말로 진짜 촌뜨기들이기도 했거니와 오늘의 승리를 일궈 낸 주역들이 아닌가?

자기 직무에 충실히 병사들의 몸을 샅샅이 뒤지면서도, 그는 수색이 끝나자 니콜라이의 등짝을 팡팡 두드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이분이 그 인민영웅이셨군! 베를린에 붉은 깃발을 꽂은! 영웅 나리를 몰라봬서 죄송하오이다! 하하하하하!”

“하하하… 하하….”

“와! 우리 소대장님 유명인사 다 되셨네!”

NKVD 요원의 농담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니콜라이는 멋쩍게 웃었다. 병사들도 잔뜩 신이 난 것 같았다.

족히 수십만 명은 모인 화려한 퍼레이드에,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린 새 제복까지 지급받았다. 장식을 위해서라지만 훈장들이 주렁주렁 달린 군복을 입은 병사들은 절로 어깨가 들썩일 듯했다.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질 것만 같이 반질반질하게 광을 낸 군화를 신고 니콜라이는 소대원들과 크렘린의 복도를 걸었다.

“서기장 동지와 정치국원들 앞에서는 시선은 전방 15도를 주시하십시오. 서기장 동지께서 무엇을 묻기 전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마십시오. 대답은 가급적 예!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로 통일하십시오. 웬만해서는 아닌 것도 그렇다고 하십시오.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깐깐한 생김새의 의전담당 장교는 연신 못 미덥다는 표정으로 촌뜨기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일선보다는 행정과 의전실무에서 오래 구른 그는 장교라기보다는 봉건시대의 고색창연한 시종장에 더 가까운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콧수염을 배배 꼬던 의전장교는 육중한 문 앞에 다다르자 옆으로 슬쩍 비켜서 NKVD 경비병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훈 대상자들 입장합니다!”

“헉!”

우렁차게 NKVD 경비가 외치자, 소대원들 중 하나가 헉 하고 놀라며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의전장교는 얼굴이 하얗게 사색이 되었지만, 문은 아무튼 열렸다. 요 짧은 시간 동안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대로 니콜라이와 소대원들은 입장했다.

척 봐도 높으신 분들이 근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병사들은 순식간에 얼어붙어 단상으로 올라갔다.

단상 위의 큼직한 의자에는 신문에서나 보았던 사람이 앉아 있었다.

“지금부터 스탈린 동지께서 베를린을 최초로 점령한 영웅적인 병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하시겠습니다! 일동, 박수!”

짝짝짝짝짝짝짝짝. 거대한 박수 소리가 홀을 가득 메웠다. 이미 수십 명이 훈장을 받고 지나갔는지 사람들은 식순에 익숙해진 듯했지만 지금 막 도착한 병사들은 그러기가 어려웠다.

“5근위전차군 2근위기갑군단 1여단 4대대 2중대 기갑소대장!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페트로프! 앞으로!”

아, 저게 내 이름인가? 니콜라이는 멍하니 사람들을 구경하며 자기 이름이 불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다가, 부소대장이 그의 옆구리를 찌르자 화들짝 놀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딴에는 가장 멋져 보일 법한 걸음걸이를 했다지만 촌티는 숨길 수 없는지 몇몇 사람들이 킥킥 웃었다.

스탈린 동지는 니콜라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키가 작았다. 신문 지상에 실린 사진으로 볼 때는 몰랐지만, 분장으로도 숨길 수 없는 곰보 자국이 잔뜩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볼품없는 외모였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형언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의전담당 장교가 전해 준 훈장을 받아 든 스탈린 동지는 니콜라이를 보더니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그… 브란덴부르크 문에 붉은 깃발을 꽂은 병사로군?”

“예!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와하하하하! 사람들이 웃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니콜라이는 등골에 삐질삐질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눈동자만을 데굴데굴 굴렸다.

하지만 스탈린 동지는 그저 더욱 인자하게 웃을 뿐이었다. 저만치 물러난 의전장교는 얼굴이 하얘졌다, 시커메졌다, 불그죽죽해졌다 실시간으로 변화했지만 스탈린 동지는 젊은 풋내기의 실수 정도는 관대하게 웃어 넘겨주는 것 같았다.

“하하하하하하하! 마음에 드는군. 자네야말로….”

서기장의 마디 굵은 손이 니콜라이의 옷깃에 훈장을 달아 주었다.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소비에트 인민영웅 훈장이 이미 적성훈장이 걸린 그의 가슴팍에 추가되었다.

이채를 띈 눈으로 이전에 수훈한 훈장을 바라보던 스탈린 서기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야말로 이 나라를 지켜낸 위대한 영웅일세. 자부심을 가지고, 가슴을 쫙 펴게. 승리자여.”

“…!”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흐를 것만 같았다. 목이 메어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승리자, 승리한 붉은 군대. 승리자 인민.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음에도 와닿지 않던 것이 인자한 서기장의 목소리로 들으니 가슴에 정통으로 꽂혀 들어왔다.

서기장은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니콜라이의 등판을 탕탕 두들겨 주었다.

넋이 나간 것처럼 니콜라이는 단상을 걸어 내려왔다. 사람들의 박수도, 터지는 플래시라이트도, 그리고 배경에 그와 소대원들이 깃발을 꽂는 사진이 걸릴 때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동안의 훈장 수여가 끝나고, 서기장은 단상에서 마이크 앞에 섰다. 고저 없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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