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171화
독일은 질서정연한 항복을 원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독일의 정부체계가 붕괴된 이후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게 된 군사령관, 모델 원수는 그러했다.
총통의 유언장에는 모델 원수를 제국대통령 겸 육군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쓰여 있었으며, 참모총장이라는 직위를 내세워 그에게 반기를 들던 요들도 총사령관의 권위 앞에는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모델 원수는 더 이상 추가적인 사망자가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민간인과 퇴역 장병들에 대한 안전이 보장될 경우 독일 국방군은 소비에트 연방군과의 적대행위를 중단하겠다.”
소련 군부는 명예를 아는 집단이었다.
선전포고 없는 비열한 선제공격에 당해 개전하기는 했어도, 독일인들이 저지른 그 수많은 전쟁범죄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철저한 통제하에 독일 영토를 통과해 베를린으로 향했다.
대부분 지역은 무방비도시를 선언했다. 제국의 수도 베를린 역시도 감히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총통의 부재, 사실상 유고 속에서 베를린은 순식간에 장악당했다.
선도 전차부대가 베를린에 도착하여 공항을 점령했다. 공항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수천 명의 특수부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지정된 장소와 인물들을 습격했다.
“잡아라! 저놈이다!”
“저놈이 그 간부다! 살려서 체포해!”
소련군은 순식간에 미처 도망가지 못한 나치의 고위 간부들과 독일의 핵심 인사들을 체포했다.
“오토 디트리히! 넌 체포다! 저항할 생각하지 말고 튀어나와!”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적잖은 수의 사람들은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단 한 발의 폭발로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제국의 수도가 심장이 뜯겨 나간 채 무너지는 것을 본 이들은 마치 세상이 멸망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소대장님, 이 새끼 없는데요?”
“빠드득… 빨리 보고해. 어차피 베를린에서 나가는 주요 도로와 기차역들은 다 통제중이다. 일단 확인만 하면 다 잡을 수 있어!”
군부와 정치권의 고위 인사들. 군수, 철강, 화학 기업의 이사진들. 비밀 연구소의 책임자들과 휘하의 핵심 과학자들.
소련군은 평범한 민간인들에게는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규율에 따라 비폭력으로 일관했지만 중요 인사들만은 싸그리 잡아들였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독일 전역에서 붙잡혀 와 봉인 컨테이너에 갇힌 채 베를린 중앙의 공항으로 이송되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기관총과 로켓포, 유탄발사기로 중무장한 수천 명의 소련군이 지키는 공항에서는 또 하나의 수송기가 날아올랐다. 각기 수십 명의 ‘전쟁범죄 혐의자’들을 싣고, 수송기는 모스크바로 향했다.
비행기의 이륙음이 들릴 때마다, 베를린의 민간인들은 그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점령 과정에서 히틀러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나마 약간 남은 충성파들마저 총통이 사라짐에 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대체 총통께서는 어디 계신가! 그분을 사수해야 한다!”
“비밀 지하 벙커라는게 어디 박혀 있는 거지? 아예 베를린에 소련군이 쫙 깔려서 뭘 파헤칠 수나 있어야지!”
국가사회주의, 통칭 나치즘은 ‘지도자 원리’를 그 핵심으로 했다. 주의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한 히틀러의 잡문일 뿐이지만 아무튼 총통은 그들의 메시아이자 지도자였다.
총통의 영도 없는 잔당들은 그저 허술한 패잔병들일 뿐이었다.
* * *
“‘대어’는 어제 도착했습니다. NKVD의 최정예 요원들이 그를 심문 중입니다.”
“흐음… 고문은 어느 정도 수위까지 가하고 있는가?”
“최대한 오래 살려 두기 위해서 아직 고문에는 착수하지 않았습니다. 명령하신다면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만… ‘대어’는 그렇게 비협조적이지는 않습니다.”
절레절레. 고문까지 할 것은 없다. 어차피 그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별 것 없다.
그저 분풀이 비슷한 무엇일 것이다. 가족이 죽었고, 친구들이 죽었고, 고향과 국토가 초토화된 인민들은 무한한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정치국은 향후 독일과의 관계설정을 위해서라도 독일 민간인들에 대한 적대는 통제했다. 하지만 정치국조차도 전범들에 대한 처벌마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기밀은 완벽하게 유지되었나?”
“예! 제 직을 걸고 장담합니다. 소수 수행원들과 함께 지하 벙커에 틀어박혀 벌벌 떨고 있었던 데다… 말씀드린 대로··· 흐흣.”
“허, 허… 알겠네. 자네를 믿어 보도록 하지.”
베리야는 경멸스러워하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베리야를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이번만큼은 그의 경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역겨운 것….”
“직접 심문하고 싶으시다 하여 자리는 준비해 두었습니다. 혹여 시간은 언제쯤···?”
“지금 가도록 하지.”
기대가 되었다. 별로 좋지도 않은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알아는 들을까? 그놈의 면전에다 대고 뭐라고 내뱉어 줘야 죽어간 수백만에 대한 위로를 할 수 있을까?
물론 소련 입장에서만 보면 지극히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디까지나 국가 입장에서 보면.
나치 독일은 수백만의 소련인들을 죽이고 국토를 짓밟았지만, 유럽에 그렇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유럽의 양대 열강인 프랑스와 영국 역시 함락당하고 각종 물자와 설비들을 독일에 내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하나 우리 군대가 접수하고 있었다.
앞으로 유럽 대륙에서 소련의 패권에 제동을 걸 수 있을 만한 나라는 이미 나치가 다 짓밟아 두었다. 기존 정권을 독일군이 갈아치워 버리고 몰락한 끝에 빈자리에는 우리의 지령을 받는 공산당이 들어섰다.
‘바렌츠해에서 발레아레스해까지! 철의 장막이 드리웠노라!’
프랑스 공산당이 주도하는 레지스탕스 전국평의회는 파리를 접수하고 제4공화국을 선포했다. 베니스와 볼로냐를 접수한 우리 군대는 이탈리아 공산당과 협조하여 로마로 진군하고 있었다.
발칸은 이미 티토의 파르티잔과 ‘붉은 국왕’ 미하이 1세의 루마니아군이 장악했다. 라인강에서 비스와강에 이르는 거대한 중부유럽의 대지는 모조리 붉은 군대의 깃발이 꽂혀 휘날리게 되었다.
승리, 승리로다.
하지만 치른 대가가 너무나도 많았다.
상념에 잠긴 사이 어느새 크렘린 지하 심문실의 강철 문 앞에 도달해 있었다. 건장한 체구에 딱 봐도 과묵해 보이는 호위병 둘이 눈을 부라리며 문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나와 베리야가 다가가자 되도 않는 흉악한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도 문을 열어 주었지만.
“서기장 동지께 경례!”
“충! 성!”
끼익 소리를 내며 육중한 문이 열렸다. 어두침침한 통로에 전기등만이 명멸하는, 지하 밀실로 가는 복도가 펼쳐졌다.
베리야는 나보다 정확히 반걸음 뒤에서 충실히 나를 따랐다. 지금 내가 생각에 잠긴 것을 깨달은 그는 괜한 말을 아끼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마 지금 의사가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것입니다만, 물리도록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아, 그렇지. 상처가 많이 심각한 정도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그냥 거죽 정도나 긁힌 정도라 적절한 지혈을 하고 수액을 공급 중이라고 했습니다. 패혈증을 우려하여 소독을 하고는 있다고 합니다만….”
지하벙커에서 발견된 ‘대어’, 즉 히틀러는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원래 역사처럼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에바 브라운을 비롯해 자기 측근들이 ‘소련군의 추악한 마수’ 아래 떨어지지 못하도록 자살하도록 명령한 그는 모두를 먼저 자살시킨 다음 일본도로 할복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백만을 죽이라 명령 내릴 용기는 있었지만 제 배 하나 그을 용기는 없었는지 그는 자살에 실패했다.
소련군 특수부대는 칼로 배를 긋기는 했으나 피만 줄줄 흘리면서 울먹거리며 엎어져 있던 그를 무사히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비밀 봉인기에 태워져 모스크바로 끌려온 그는 즉시 크렘린 지하실에 처박혀 각종 심문을 당했다. 뭐, 나치 독일의 기밀 중 소련 정보부가 알지 못하는 것은 몇 개 없었지만….
몇 번이고 두터운 철문이 열렸다 닫힌 후에야 히틀러가 위치한 심문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입니다, 서기장 동지.”
“….”
철문이 열린 방의 안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피칠갑된 중세풍의 지하감옥을 연상했지만, 그냥 뭐랄까, 병원의 개인 병실 같았다. 네 명이나 되는 거구의 병사들이 안팎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을 빼면.
“자네들은 물러나 있게.”
“예! 서기장 동지!”
의사에 의해 가려져 있던 히틀러의 눈은 날 보자 떨리기 시작했다. 의사는 황급히 일어나 내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방에서 후다닥 달려 나갔다. 통역사, 베리야, 그리고 경호원까지.
“서기장 동지, 이 친구 하나만은 안전을 위해서 남겨 두심이….”
“그 친구가 귀가 멀었다는 친구인가? 알겠네.”
경호원은 날 위해 푹신한 의자를 어디선가 가져다주었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쭉 들이키며 벌벌 떠는 히틀러를 보자 승리, 승리가 실감되었다.
“자아… 곤니치와.”
“?!?!?!”
이제 히틀러의 입은 딱 벌어졌다. 어떻게 알았지? 라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진 표정이랄까?
원래 인생에서 고등학생, 대학생 때 배운 어설픈 일본어로 쭉 말을 걸자 히틀러는 턱을 딱딱 부딪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걸 어떻게…? 역시 그것이 맞았던 것인가?”
“흐음, 대충 눈치채긴 하셨군?”
“당, 당신도 미래인이오?”
“그렇네. 당신이 미래인, 아니 일본인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진 않았는데.”
당연히 있겠지만 전쟁에서 완패한 이후 끌려온 입장에서는 믿지 않기도 어려울 것이다.
히틀러, 아니 일틀러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다 그는 고개를 벌떡 들고 고함을 쳤다.
“황국은 결코 몰락하지 않는다! 그래, 네놈이 우리말로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황국은 다시 굴기한 것이로구나! 대일본제국이 결국 세상을 지배하게 된 거야! 하하하하하하하하하!!!”
“허어? 굴기하다니?”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어지간히도 뽕을 거하게 들이킨 놈이다 싶었다.
“대체 몇 년대에서 온 거요?”
“…? 1945년, 전쟁이 끝나고 나와 동지들은 할복을 했다. 하지만 아마테라스 오오카미의 보우하심으로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아, 그래서 그렇구만. 1948년에 일본은 멸망하오.”
“!!!”
아까 일본어로 말을 걸 때에도 안 그러더니, 이제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일틀러는 입을 쩍 벌리고 충격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나는 어쩐지 잔혹하게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1945년, 핵폭탄 두 발을 맞고 일본제국이 항복한 것은 당신도 알 거요.”
“그, 그렇다.”
“그리고 일본은 미국의 군정하에 놓이는데, 거기서 일본인들은 으음… 미국을 몰아내기 위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지.”
“….”
참 표정이 단순한 놈이다. 역시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이 딱 드러나 보였다. 나는 뭔가 웃음을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미국은 그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핵폭탄 30여 발을 일본 전국에 떨어트려 일본을 멸망시키오. 방사능 오염 때문에 살 수 없어진 일본 열도의 주민들은 결국 마다가스카르로….”
“잠시만, 그 ‘방사능 오염’이 뭐지?”
“음?”
아, 말을 잘못했다. 40년대에는 아직 방사능이란 것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애초에, 방사능 오염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할 것이다.
“핵폭탄이 떨어진 곳은 결국 땅과 물이 썩고 사람들이 말라 죽어가며 살 수 없게 되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필두로 도쿄, 교토, 오사카 등 주요 도시들이 다 죽음의 땅이 되자 살아남은 대략 2천만쯤의 일본인들은….”
내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히틀러는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거, 거짓말이야! 말도 안 돼! 제기랄, 일본제국이 그럴 리 없다!”
“아, 당연히 거짓말이지.”
“하하, 빌어먹을….”
“라고 할 줄 알았나?”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분명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 생각하는지 그는 바락바락 악을 썼다.
“아니야! 절대, 절대 아니다! 대일본제국은 신주불멸이야!!!”
“뭐, 그럼 직접 보여 드리는 수밖에.”
지금까지는 놀려먹으려는 거짓말이었지만, 실제로 그럴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있었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몰락 작전’을 합동으로 펼칠 것을 요청해 왔다. 정치국과 군부는 극동에 대한 패권을 위해 이를 승인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내가 킬킬 웃으며 걸어 나가자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히틀러는 비명을 지르며 내 바짓가랑이라도 붙들려 했지만, 거구의 경호원은 솥뚜껑만 한 손으로 그를 붙들어 침대에 메다꽂았다.
절규를 뒤로하고 심문실을 나섰다. 준비된 핵무기들은 일본 열도를 몰락시키기에 충분했다. 고엽제와 방사능 지옥이 될 열도에서 과연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