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170화
루즈벨트는 전전긍긍하는 것 같았다.
[서기장, 언제 그… 놀라운 무기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한 것입니까? 여전히 이전의 대일전 참전 약속은 유효합니까? 기존의 소련이 가지고 있던 외교적 입장은 어느 정도나 바뀐 것입니까?]
“허허허허… 루즈벨트 대통령, 저는 최고의 친구 미국과 언제까지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뿐입니다.”
[슬프게도 미국은 소련을 더 이상 친구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친구는… 정말 슬프지만 친구는 어디까지나 힘이 비슷해야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소련이 언제든지 미국을 멸망시킬 수 있다면….]
하지만 나는 결코 미국과 척을 질 생각이 없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강국이었고, 미국 혼자만 그걸 모르고 있었다. 미국의 엄청난 국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루즈벨트조차도 정확히 타국과 미국의 경제규모를 비교하고 있지 못했다.
세계 대전을 일으킨 대국들. 즉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더해 중국과 일본을 합쳐도 미국의 경제규모를 따라가지 못한다. 실제 역사의 1945년 세계 GDP의 절반 가까이를 미국 혼자서 차지한 수준이었다.
지금이라면 미국의 원조를 꿀떡꿀떡 얻어먹고 무지막지하게 체급을 불린 소련을 나머지 열강 모두에 얹으면 따라갈락 말락 할지도 모른다.
여전히 미국은 조금의 본토 손실도 없이 막강한 경제력을 자랑했고, 굳이 소련이 미국을 적대하며 패권을 추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루즈벨트 대통령? 우리 소련은 결코 좋은 친구 미국인들을 파괴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무기를 들고 있어도 그것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미국을 공격하라고 지시를 내린다면 내 부하인 주코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하하하하!”
[하하하… 그건 어째서입니까?]
“그 친구는 이미 코카콜라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지요. 우리 소련의 많은 인민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는 군수공업에 주력해 왔기 때문에 미국이 만들어 내는 멋진 물건들을 필요로 합니다. 미국과의 전쟁은 사실상 우리 인민들을 굶겨 죽이는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하하하하하하! 이번에는 좀 많이 웃겼습니다. 아무튼 서기장이 하신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일본을 끝장내는 것만이라도 소련군이 ‘동맹으로서’ 도움을 주었으면 참… 우리 미국 청년들의 피가 덜 흐를 것 같습니다.]
개그 아닌데. 루즈벨트가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일본은 무조건 쳐야 했다. 극동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향후 가상적국들을 찢어 버리기 위해서라도.
“당연하지요. 소련군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엄청난 전쟁을 치르고 나니 한 달여의 정비기간이 필요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내 반드시 약속드립니다. 소련군은 반드시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할 것입니다!”
[다행입니다, 스탈린 서기장.]
“원한다면 우리 소련은 무기 개발과 관련하여 미국에 기술을 이전해 줄 의향이 있습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루즈벨트는 아예 전화통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실제 역사대로라면 맨해튼 프로젝트는 아직 핵폭탄 실험에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그 어떤 돈을 주더라도 구할 수 없는 핵무기에 대한 비밀을 가르쳐 준다니. 영혼을 팔아서라도 가져오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언제쯤 성공하고, 얼마 정도를 소비했는지.
“얼마든지요! 다만 우리 연구진들에게 관련 자료를 정리하게 시키는 데에는 시일이 ‘조금’ 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고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필요한 것이 좀 많아야지요….”
[…꿀꺽.]
루즈벨트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아차 싶었는지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리려 하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렌드리스 물자에 대한 대금을 상계하고 약간의 경제적 원조를 얻고 싶습니다만, 가능하겠습니까?”
[당여… 아니, 크흠… 상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근시일 내에 상의해 본 결과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실제 무기를 양도하는 것까지 우리 정치국에서는 의견이 나왔는데 이게 어찌 될지는….”
[아주 근시일 내에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아주 근시일입니다! 그럼 이만….]
말 그대로 후다닥 국무회의를 소집했을 것이다.
내 앞에 서 있는 몰로토프는 그래도 되느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당연히 저쪽과 이쪽의 저간 사정을 모르니 그럴 수도 있다.
“맨해튼 프로젝트… 아, 이것은 미국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네. 아무튼 그들은 대충 진도를 절반 이상은 뽑아 놓았네.”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가 45년 7월이다. 지금이 44년 1월이니 42년 6월에 시작한 프로젝트가 말 그대로 절반 정도는 온 것이다.
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사용한 돈은 ‘고작’ 20억 달러. 고작이라기에는 현재 가치로 따지면 30조 원 정도의 거금이었지만, 소련이 렌드리스로 받아먹은 액수는 그 몇 배를 훨씬 상회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110억 달러, 여기서는 정확하게 집계되지는 않았어도 훨씬 일찍부터 많이 받아먹어서 비슷한 수준이다. 고작 ⅕ 정도의 대가를 치르고 퉁쳐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 소련은 차일피일 대금 상환을 미루고 먹튀를 하기는 했다. 그 역시 미소 외교관계의 악화에 기여했고.
대략 저울에 올리면 이럴 것이다. 우리는 렌드리스 대금 변제를 하지 않는 데다가 막대한 원조를 얻어 경제를 재건하고 생색을 내며 국제관계 재편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신, 미국에게 ‘조금’ 일찍 핵무기를 쥐여 주는 것이다.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의 지위에서 내려오는 것은 아쉽지만 어차피 미국은 자력으로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으니. 손에 쥔 떡이 쉬어 버리기 전에 빨리 넘겨 버리자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어차피 준다고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면서 간 좀 보면 되는 거지. 안 그런가?”
“그… 그렇습니다만….”
어쩐지 떨떠름하지만 몰로토프는 그럭저럭 납득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미국과 정면대결을 붙기에는 이미 너무 큰 전쟁을 치른 소련은 최대한 외교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이 나았다. 핵무기가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쳐도, 이걸 싣고 미 대륙으로 가는 폭격기가 다 요격당하고 나면 소련은 독일처럼 두들겨 맞을 뿐이다!
“방금 이야기한 원조는 통 크게 불러 보게. 5년간 400억 달러! 뭐 이렇게.”
“예? 그렇게나 많이 불러도 되겠습니까?”
“뭐, 처음에는 블러핑을 쳐 보게. 이거 하나면 몇억짜리 도시를 날려 먹을 수 있다면서. 하하하하! 한 반만 먹어도 우리로서는 이득 아니겠나?”
“반… 이라도 200억 달러입니다 서기장 동지.”
“미국이 그 정도 여력은 될 것이네. 자 이제 시간이 되지 않았나?”
마침 시간은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몰로토프는 여전히 우물쭈물하는 것 같았지만 이 역시도 나는 대략의 숫자를 알고 있었다.
‘마셜 플랜이 4년간 130억….’
미국이 서유럽을 통째로 손아귀에 넣기 위해 뿌린 금액이 130억 달러였다. 여기에 중화민국이 처먹은 것이 60억 달러.
400억 같은 어마어마한 금액은 그저 블러핑이라 치고, 반인 200억만 먹어도 미국의 대외 원조를 싹 빨아먹을 수 있는 것이다!
미국에게 이 돈을 받아먹을 수만 있다면 황폐해진 국토를 재건하고 아예 치고 올라가는 것도 꿈이 아니다. 독일과 프랑스는 우리가 장악했고, 저지대 3국과 이탈리아의 절반, 발칸과 터키까지 소련의 영향권 안에 들어왔다.
원조금의 절반만 소련 명의로 이 영향권 안에 뿌리면… 말 그대로 철의 장막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발트해의 슈테틴에서 아드리아의 트리에스테까지….”
“예? 슈테틴 말입니까?”
“아, 아닐세.”
고 윈스턴 처칠은 실제 역사에서 그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을 하면서 저런 수식을 붙였다. 폴란드에서 발칸까지 소련의 영향력이 드리웠노라고!
하지만 이제 그 철의 장막은… 영불해협과 피레네 산맥, 그리고 테베레 강***이 될 것이다!
하, 어쩐지 기분이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지금 향하는 곳을 생각하면 더더욱.
물로토프는 목적지에 도착하자 내게 간단하게 목례하고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문 안으로 향했다.
안에는 내가 특별히 초대한 인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 주코프, 베리야. 바실렙스키, 자네도 왔군? 추이코프 장군도 앉으시게.”
“예! 서기장 동지.”
“이 광경은… 돈을 주고서도 다시 보지 못할 진귀한 광경이니 지금 많이 봐 두게. 으흐흐흐흐흐….”
방은 작고 아늑했다. 특별히 크고 푹신해 보이는 의자 하나를 가운데 두고 네 개의 의자가 쭉 늘어서 있었다. 유리창이 달린 방 한쪽을 향하여.
“이… 이것은 무엇입니까?”
“아! 걱정 말게나. 저쪽에서는 이쪽이 보이지 않네.”
유리창으로는 몰로토프가 막 자리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마이크를 통해 이쪽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저자는…?”
“일본 대사 사토 나오타케로군요. 하하하… 몰로토프 장관에게 애타게 면담을 요구했다고 했는데….”
흰 콧수염을 기르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인자한 인상의 일본인 하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악수 요청도 거부한 채 몰로토프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용건이 무엇입니까, 대사?”
“그… 다름이 아니라… 소일 불가침 조약의 재보장 말입니다. 조약의 기한은 5년인데….”
“우리 소련은 현재의 소일 불가침 조약을 갱신할 의사가 없습니다.”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직접 들은 충격이 컸는지 사토 대사는 흐읍 숨을 들이켜더니 컥컥거렸다. 예의상 기다려 줄 법도 하지만, 몰로토프는 여전히 직설적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극동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행위 때문에 심각하게 안보를 위협받아 왔습니다. 일본 제국은 소비에트 연방을 침략한 독일에 가담하여 추축 동맹을 형성하였으며, 국제법에 위반되는 침략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컥, 커억… 그… 잠시만…!”
“중국, 조선, 만주 등지에서 일본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진 바 있습니다. 우리 소비에트 연방은 더 이상 이러한 전쟁범죄를 묵과할 수 없으며, 일본이 다음과 같은 조약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일본 제국은 이에 동의하여 소비에트 연방과의 상호 불가침 조약을 연장할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시하는 기한은… 오늘로부터 4주입니다.”
몰로토프는 책상 한구석에 놓여 있던 묵직한 종이 뭉치를 한 부, 사토 대사 앞에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외교적으로 지극히 결례가 됨에도 불구하고 사토는 그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허겁지겁, 대체 소련이 무엇을 요구하려나 싶어 조약문을 들여다본 그는 허 하고 한숨을 쉬었다.
“대륙의 모든 식민지와 전쟁으로 점령한 도서 영토, 대만섬, 류… 아니, 오키나와섬, 사할린, 쿠릴 열도, 홋카이도와… 이것은 사실상 일본 본토만을 남기겠다는 것 아닙니까?”
“더 읽으시오.”
“…이외의 도서 및 영토에 관한 한 신탁통치기구의 결정을 따른다. 말하자면 그 어떤 부분도 이 신탁통치기구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말하자면 그렇소.”
“신탁 통치기구에는… 아, 소련, 미국, 중화민국, 영국….”
“그렇소.”
사토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목을 애써 부여잡은 채 조약문을 내려놓고 몰로토프 쪽으로 슬쩍 밀었다.
하지만 몰로토프는 도로 사토에게 조약문을 밀어 주었다.
“더 읽어 보시오.”
“….”
그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마치 납 인형처럼 시립해 있던 경비병이 사토의 앞에 물잔을 하나 내려놓았다.
사토는 여전히 부들거리는 손으로 물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손이 떨리며 물방울이 뺨과 가슴께에 튀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지는 없는 듯했다.
“다음 장이오.”
“…!”
이제 그의 손뿐만 아니라 눈과 이빨마저 떨리기 시작했다. 이가 딱딱 부딪히며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광경을 몰로토프는 흥미롭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천황제의 폐지와 전범 히로히토의 국제 사법 재판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폭거요! 이것은 내정 간섭이 아니오?”
“사토 대사, 그대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소.”
“…들어나 보지요.”
몰로토프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종이쪽지를 한 장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 방방 뛰어오를 것만 같은 사토와 전혀 개의치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몰로토프는 희극적인 대조를 이뤘다.
“대사의 항의는 아무 의미도 없소. 소비에트 연방은 일본 제국의 그 어떤 조치에도 불구하고 권고한 조약을 변경할 의사가 없으며, 대사에게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
“그대에게 남은 것은 개인적인 위엄뿐이오. 위엄을 지키시는 것을 권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