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169화
대파괴의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파괴당한 베를린은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었다. 섬광이 번쩍였다가 생겨난 8천 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버섯구름을 목격한 사람만 해도 천만이 넘었을 것이다. 수십,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도 폭음과 버섯구름을 관측할 수 있었으니.
정보를 통제해야 할 정부는 핵의 불길 아래서 사라졌다. 억압적인 정권을 떠받치던 관료제가 증발하자 시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게 말하고 떠들 수 있었다.
이들을 감시해야 할 경찰들은 수뇌부가 사라져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고, 전격적으로 전해진 모델 원수의 항복 선언은 나머지 대부분을 공황에 빠트렸다.
폭발에 휩쓸리지 않고 기능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방송국들은 스탈린 서기장의 전언과 모델 원수의 항복을 널리 퍼트렸다. 방송을 검열해야 할 경찰들은 이를 그저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무기를 수십 개는 더 가지고 있다. 동부전선의 독일군이 즉각적으로 무조건 항복하지 않으면 쾨니히스베르크와 드레스덴을 파괴하겠다.
독일 함대가 무장해제하지 않으면 킬과 함부르크, 슈테틴을 파괴하겠다. 독일 프랑스 주둔군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에센과 도르트문트를 파괴하겠다. 비시 프랑스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비시와 마르세유, 리옹을 파괴하겠다.
이탈리아 역시 즉각적으로 무조건 항복하지 않는다면 로마, 베니스, 플로렌스와 밀라노, 나폴리를 파괴하겠다.]
다른 시점이었다면 패배주의를 선동한다는 명목하에 방송국의 사장부터 말단 직원들까지 줄줄이 끌려 들어가겠지만 지금은 감히 게슈타포들이 설치지 못했다. 대부분의 기회주의자들은 사태가 돌아가는 추이를 겁에 질려 지켜보고 있었다.
가장 과격하고 난폭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다. 고삐 풀린 방송과 신문매체들은 온갖 자극적인 보도물들을 쏟아 내었다.
작금의 베를린에는 너무도 자극적인 사실들이 넘쳤기에.
수십만 명이 즉시, 혹은 충분히 짧은 시간 안에 사망했고, 근교의 병원들은 아직 죽지 못한 자들로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사진사들과 기자들은 그 사람들의 처참한 상태들을 호외로 찍어내 뿌렸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녹아내린 석조 건물들, 살이 녹아 흘러내리는 인간, 그림자만을 남겨 놓고 증발한 나무와 짐승들.
가장 강경한 반공주의자 겸 찬전파도, 당신과 당신 가족의 머리 위로 저것이 쏟아져도 좋겠냐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스탈린의 ‘협박’이 전파를 타자마자, 그리고 베를린의 참상이 전해지자마자 해당되는 도시들에서는 즉각적인 반전 시위들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살고 싶다! 모델 원수의 항복을 지지한다!”
“불지옥보다는 시베리아로!”
“내 아이를 살려 내라! 가족들을 살려 내라!”
압도적인 힘은 증오보다 공포를 불러온다. 공포 앞에서 시민들은 힘겨운 저항 대신 편한 반항을 택했다. 벌떼처럼 거리로 몰려나온 시민들은 지역 경찰서들을 습격하고, 나치당 사무소들을 불태웠다.
드레스덴, 킬, 함부르크, 슈테틴, 에센, 도르트문트…. 수많은 중요 도시들이 가까스로 기능을 되찾기 시작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기를 거부했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은거했던 인사들이 칩거를 깨고 시민들을 가두에서 이끌었다.
대오의 맨 앞에는 귀환병들이 서 있었다. 이미 전쟁에 나가 그 끔찍함을 온몸으로 겪고, 평생 그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할 이들은 전쟁의 전 자만 들어도 몸서리쳤다.
진압을 위해 투입된 경찰병력 역시 살벌한 이들의 기세에 눌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왔다! 이제 우리 손으로 전쟁을 끝내고야 말겠다!”
“평화 만세! 자유 만세! 개자식들은 지옥으로!”
“멈… 멈춰서라!”
말뿐으로는 그들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지역 경찰서장들은 자신의 모가지를 보존하기 위해 총기 사용을 엄격히 금지했으며, 경찰들은 숫자의 폭력 앞에서 곧 골목 어딘가로 치워지거나 되려 시위대에 합류했다.
그리고 동쪽에서부터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 소련군은 이 상황에 쐐기를 박았다.
* * *
“여하의 적대 행위를 철저하게 금한다! 결코 저들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행위나 적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행동을 하지 말도록!”
“예!”
니콜라이가 이끄는 기갑부대는 다행스럽게도 교전을 피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기갑부대는 소련군의 공식 교리인 종심 작전에서 2파, 혹은 3파로 투입되었기에 1파의 교전 이후 전투 수행의지를 상실하거나, 모델 원수의 명령에 따라 항복한 독일군과의 전투 없이 독일 본토를 가로질러 진격할 수 있었다.
베를린 입성 직전, 사단의 정치위원은 전 병력에게 엄명을 내렸다. 서기장의 직접 명령을 전달하면서 그조차도 황송하다는 듯 경건했던 정치위원의 표정은 병사들을 협박하듯 험악하게 돌변했다.
“만약 적대행위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한다면 모든 정치위원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계급을 불문하고 즉결 처형이 가능하다는 허가를 받았다. 나는 내 손으로 귀관들을 처형하고 싶지는 않으나,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알겠나?”
“예!!!”
장교와 정치위원들은 이례적으로 장병들을 즉결처형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현지 민간인들에게 약탈, 강간, 살인, 방화 등의 강력범죄를 저지를 경우 해당 부대까지 연좌되어 처형할 것이다!
규율이 엄격하고 가혹하기는 하여도, 국가와 군대의 근간인 병사들을 마구 처형한 적은 없었던 붉은 군대에서 이러한 명령은 전례가 없었다. 그러나 서기장 동지의 직접 지시라는 점에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나름 효과가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소련군 기갑부대가 도시에 들어와 대로를 지나다녀도, 야유하고 주먹감자를 날리는 이들은 있을지언정 그 누구도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소련군 병사들은 즉결처형의 공포 때문에라도 시민들과 절대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독일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공포 때문에 소련군에게 해코지하려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은 도시 청사를 접수하고 빠르게 다음 목표로 이동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도시는 무저항을 선언했고, 그렇지 못한 곳들도 저항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무저항을 선언하지 않은 이유는 그럴 권한을 가진 이들이 도망쳐서였기에.
물론 도시의 물자를 공출해야 하기는 했지만, 소련군 참모장교는 막대한 분량의 어음책을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우리를 후속할 부대들이 이 어음을 보고 적절하게 보상해 줄 것이오! 우리는 결코 민간인들의 물자를 약탈하는 것이 아니외다. 자, 출발!”
“빌어먹을 소련 놈들….”
물자 ‘징발’ 및 ‘보상’ 과정에서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아무튼 그런 이들마저도 소련군이 신사적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다. 그들은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으며, 독일 민간인들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참모장교들은 시가의 1.5배에서 두 배 가까이 쳐서 어음을 내주었다. 영악한 가게 주인들이나 사업가들은 이를 살짝 부풀리기도 했지만 소련군은 굳이 가타부타 말을 길게 만들지 않았다. 이들의 목표는 오직 더 빠르게 앞으로 진격하는 것뿐이었다.
폐허가 된 베를린을 향해, 그리고 더 진군하여 루르와 라인란트를 향해.
하여 옆 부대의 병사들 몇이 독일인 여자한테 손을 댔다가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니콜라이의 부대는 별 탈 없이 베를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전쟁이 끝난다!”
“세계의 절반을 가로질러 우리가 여기에 왔다!”
“우라! 우라! 붉은 군대 만세!”
운이 좋게도, 니콜라이의 부대는 이 강행군 속에서 다른 부대보다 앞서 도착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베를린에 도착한 것이다.
수십 대의 전차들이 위풍당당하게 적기를 휘날리며 베를린에 입성했다. 시민들은 골목에 숨어, 또는 건물에 숨어 빼꼼히 새로이 도착한 정복자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소련군의 진군 소식을 듣고 동쪽에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천년제국의 수도’ 베를린으로 피신해 있었다. 피난 짐을 바리바리 짊어지고 온 이들은 소련군 비슷한 것만 보아도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거나 헐레벌떡 도망쳤다.
“소련군이다! 소련군!”
“오 하느님! 총통이시여! 어디로 가야 하오리까!”
“말세가 도래했어… 말세가….”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면서도 차마 소련군에게 뭔가 공격을 가할 생각만큼은 하지 못했다. 거대한 폭발이 보여 준 압도적인 힘은 시민들의 저항의지를 산산이 부수어 놓았다.
소련군 전차병들 역시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은 엄히 금지된 상태였기에 그들에게 어떠한 행위도 하지 못했다. 그저 바윗돌처럼 굳은 얼굴로 전면을 바라보며 행군할 뿐.
니콜라이는 위에서 받은 베를린 시가지에 대한 지도를 펼쳐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쪽이 맞나?”
평소라면 그는 당연히 앞에서 행군하는 전차를 따라가면 된다고 했겠지만, 충격적이게도 그의 앞에는 단 한 대의 전차도 없었다.
니콜라이의 전차가 대열의 선두가 된 것이다.
“저… 소대장님? 쭉 직진할까요?”
“어? 그, 그래. 그래.”
어쩐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는 부하들 때문에라도 니콜라이는 당당해야 했다. 두리번거리며 좌우를 살피려 해도, 그의 얼굴만 보아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독일 민간인들 때문에 차마 하기가 어려웠다.
‘이쪽이 맞나….’
“어? 소대장님, 저 뒤에 전차들은 꺾었는데요?”
“뭐, 뭐라고?”
후속하는 전차의 전차장이 그에게 소리쳐 물었다. 화들짝 놀라 뒤를 보자 다른 전차들이 서서히 꺾어 다른 길로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아차 싶어 위를 보자 아니나 다를까,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그에게도 익숙한 2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지금까지 오던 길은 1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크흠… 다음 모퉁이에서 꺾어라!”
“예엡!”
이미 대오는 망가졌겠지만, 어쩔 수 없다. 설마… 설마 여기까지 와서 뭔가 크게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부하들은 아직까지 별다른 의심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자, 뭔가 웅장해 보였을 건물들이 나타났다.
“와….”
“허어….”
길에는 파쇼들의 빨갛고 검은 깃발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있었다.
깃발이라고 하기에 저것들은 다 눌어붙은 무언가였다. 거대한 섬광이 비춘 듯, 건물들의 외벽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녹아내린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니콜라이의 시선이 도로의 끝에 가 닿았다.
그곳에는 오직 폐허만이 존재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는 상상할 수 있었다. 포스터나 신문을 통해서 몇 번쯤은 보았던 파쇼들의 회색 도시 베를린을. 인간을 내리깔아 보는 장엄하고 웅장한 문, 밤중에 호화로이 빛나는 고전식 건물들, 그 어떤 도전도 용납하지 않을 것만 같은 차가운 대리석과 강철의 도시.
하지만 이제 파쇼들은 없었다.
“창백한 죽음은 가난한 자의 오두막 문과 군주의 궁전 문을 똑같이 두드리지….”
거대한 석조는 녹아내려 땅에 눌어붙은 듯 거대한 무더기로 변해 있었다. 니콜라이는 언젠가 카티아가 그에게 글을 가르치겠다며 읽어 주었던 시구가 떠올랐다.
창백한 나신, 아니 허여멀건 배때기를 까뒤집은 베를린.
그는 말없이 전차를 이끌고 전진했고, 부하들 역시 말없이 그를 따랐다.
그리고 무더기 앞에서 니콜라이는 전차를 세웠다.
척, 척, 척.
잔해 앞에 서자, 가슴 속에서 뭔가가 북받쳐 올랐다. 그를 따라 달려온 부하는 더듬더듬 뭉개져 버린 안내석에서 글자를 읽어 내고 있었다.
“브… 란덴부르걸… 톨?”
“깃발. 깃발 가져와 봐.”
* * *
브란덴부르크 문, 혹은 브란덴부르크 문이었던 것 위에서 일단의 병사들이 붉은 깃발을 휘날렸다.
“소비에트 우라! 붉은 군대 우라!”
“전우들이여!”
부하들은 환호하고 좋아했지만, 니콜라이는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그를 떠나간, 혹은 그를 떠나온 수많은 전우들.
부하들은 자기들을 부르는 줄 알고 그를 쳐다보았지만 니콜라이의 눈은 그 너머를 향해 있었다.
“전우들이여!!! 여기에 우리가 왔다!!”
전우들이여! 전우들이여! 전우들이여!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뻗어 나갔다. 먼저 떠나간 수많은 전우들에게 바치는 만가(挽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