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167화
“…투하 성공.”
마리나 라스코바 대령은 무전 통신기에 짧게 이야기했다.
폭심으로부터 불어닥치는 거대한 폭풍은 육중한 4발 중폭격기를 마치 종잇장처럼 흔들었고, 기체가 실속하지 않도록 그녀는 조종간을 꽉 붙들고 힘을 주어야 했다.
폭격비행대 내부 통신망에서는 경악하는 비행대원들의 흥분한 외침들만이 들려왔다. 비행대원들은 지금의 임무를 ‘최신형 강력 폭탄’의 투하 정도로 알고 있었다.
연구진들이 반드시 후폭풍을 피하기 위해 어쩌고 저쩌고 떠들 때는 사실 귓전으로 흘려 들었다. 끽해야 일개 폭탄이 강력하면 얼마나 강력할 것인가?
하지만 그 일개 폭탄은 그저 일개 폭탄이 아니었고, 이들은 그 효과에 경악과 감탄 사이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진짜 전쟁이 끝나는 것 아닙니까? 베를린이 저 폭풍에 휩쓸렸다면….]
[맞습니다, 이런 게 한 개도 아니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 임무에는 다시 투입되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 정도로 거대한 폭탄을 들고 이륙하다 문제가 생기거나, 자칫해서 휘말려 들어갈 경우 어찌 될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저 폭탄을 정통으로 얻어맞는 저 아래 베를린 시민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어쩐지 입 안에서 찝찝한 맛이 났다.
“이봐, 다들 무슨 이상한 맛이 나지 않나?”
[그, 그런 것 같기는 합니다.]
쇠 맛 비슷한, 시큼하게 기묘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물론 다시 한번 불어닥치는 후폭풍으로 기체가 요동치며 금방 잊어 버렸지만.
[와… 저기 구름 좀 보십시오.]
젊은 조종사 하나가 무전에서 이야기했다. 그 말에 뭔가 싶어 돌아본 이들은 장엄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폐허가 된 베를린 위에 지표에서 하늘까지 뻗쳐오른 듯한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 하나가 서 있었다. 고속으로 비행하는 폭격기로 몇 분이나 날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구름의 크기는 실로 거대했다.
“하, 하, 하….”
* * *
폭탄은 목표한 신 국가수상부 건물에서 살짝 빗겨나 파리저 광장 상공 470m에서 폭발했다.
먼저, 엄청나게 강렬한 빛이 번쩍 빛났다. 빛이 살을 투과해 뼈가 보일 정도로.
물론 뼈를 오래 볼 수는 없었다. 빛이 비친 바로 다음 순간 초고온의 열복사풍이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브란덴부르크 문, 총통 관저, 티어가르텐, 베를린 동물원은 이 고온의 열풍 앞에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폭발의 충격파는 폭심지 인근의 건물들을 모조리 무너트렸고, 목조이건 석조이건 철근 콘크리트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천년제국의 수도, 그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총통부는 뜯겨 나가 버렸다.
심장이 뜯겨 나간 베를린은 오래 버틸 수 없었다.
* * *
“뭐?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베, 베를린 총통부가 폐허가 됐다고 합니다!”
슈테틴 외곽의 동부전선 사령부. 모델 원수가 직접 지휘하는 이 사령부로는 순식간에 수십 통의 연락이 쏟아졌다.
대부분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베를린 외곽에 주둔하는 SS 군단들이나 수도경비를 맡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혹은 게슈타포들과 치안경찰들까지.
[베를린 위에서 거대한 폭발이 발생했습니다! 검은 비가 내립니다!]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설명해 보게!”
[폭격! 폭격입니다! 거대한 폭격이… 치지지지직…]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설명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국가 지도자, 총통의 안부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참모부는 순식간에 죽음 같은 적막 속으로 빠져들었다.
“….”
모델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을 지긋이 감고 애써 침착한 체하려 하여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소련군의 항복 권유문은 이래서 온 것이었나…. 저들은 언제든 우리를 밟아 죽일 수 있었다는 것인가….’
소련군은 오만하게도 이틀 전 항복을 권해 왔다. 물론 그 항복 서한을 전달한 체르냐홉스키는 전혀 거만하지 않았지만 내용은 지극히 오만했다.
인제 와서 그것을 오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독일이 더 이상의 피해를 입는 것을 서기장 동지는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동안 영웅적으로 분투해 온 모델 원수의 명예와 향후 독일의 재건 및 주변국들과의 우호관계를 위해 동부전선에서 항복한다면….”
젊은 체르냐홉스키는 스스로 말하고 있는 내용에 당황하면서도 차근차근 소련 지도부의 의도를 전달했다. 소련은 마치 이미 전쟁에 이긴 것처럼 이야기했다. 모델 그 자신의 방어선을 결정적으로 돌파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시간만 보내며 사상자를 늘리고 있었음에도!
하지만 저들은 전쟁을 끝낼 강력한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모델의 전투를 뒷받침해 줄 후방의 행정력과 보급부대는 사실상 소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들은 도시를 없애 버린 것이 아니라 독일 제국의 뇌와 중추신경을 뜯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저런 짓을 몇 번이나 할 수 있을지 아군은 모르고 있었다.
“총통… 총통께서는 무사하신가?”
“연락이 없습니다! 제국수상부 건물은 폐허가 되었으나 총통이 지하벙커에 계신다면 아마 무사하실 테지만….”
하지만 별 의미가 없다. 총통 혼자서 마술처럼 보급을 만들어 내고 병사들을 지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면 모른다. 그러나 세부적인 일처리들을 해내던 관료들이 베를린 중심가와 함께 사라졌다면 군대는 그저 거대한 깡통이나 다름없게 된다.
‘당장 내일 싸우기 위해 필요한 탄약은 공급해 줄 수 있을까?’
헛웃음이 나왔다. 항복, 항복이란 말인가?
전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수백만 명의 소련군이 독일군의 방어선으로 몰려들면서 일선 부대들은 후퇴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산이 부서진 부대들의 잔해로부터 예비대를 짜내고 돌파구를 틀어막고 복원하는 모델의 일은 갈수록 가중되어 가고 있었다.
헌데 이제 그의 싸움을 뒷받침해 줄 ‘후방’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이제 전방과 후방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오히려 전선이 더 안전할지도 모르지. 그렇게 강력한 위력의 폭탄이라면 아군 오폭을 염려하여 적아가 뒤섞인 전선에는 사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넓게 병력이 산개한 전장보다는 인구와 중요 시설들이 밀집된 도시가 더 좋은 목표일지도 모른다.
전쟁은 끝났다. 이제 학살만이 남았을 뿐.
“…사령부에 요청하라.”
“예?”
“사령부에 항복 명령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라. 이제… 전쟁은 끝났다.”
전쟁은 끝났다. 전쟁은 끝났다. 그 말만이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모델 원수에게 감히 반대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아니, 반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선의 병사들부터 사령부의 장군 참모들까지. 전쟁의 끔찍함을 너무나 많이 겪어 왔다. 더 이상의 전쟁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유익할 것인가?
그 누구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폐허가 되었다는 베를린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도.
“소련군에게 휴전과 교섭을 요청하게, 더 이상… 더 이상 더 많은 병사들이 죽도록 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병사들에게는 저항할 힘이 없었다. 압도적인 규모의 소련군 기갑부대는 이미 형성된 돌파구를 지나 독일군의 후방으로, 후방으로 달리고 있었다. 전차들을 막을 수 있는 중포와 전차들은 소모를 따라잡지 못해 제대로 가지고 있는 부대들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안 되는 것을 가능하도록 이루어 왔다. ‘전장의 마술사’ 모델 원수의 지휘하에.
하지만 소련인들은 더한 마술을 소매 속에 숨기고 있었고, 아군의 마술사는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 * *
“독일에 급보를 보내게.”
“예? 예! 뭐라고 보내면 되겠습니까?”
핵폭발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는 순식간에 만들어져 내 앞에 와 있었다. 핵폭탄의 위력은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다. 나가사키를 때린 팻 맨보다 조금 더 강력한, 대략 TNT 25kt 정도로 추정되는 위력이 관측되었다고 한다.
뻥 뚫린 평야 지형의 베를린에서는 핵폭발의 충격파를 막아 줄 지형지물이 없었다. 폭발의 위력은 고스란히 그곳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휩쓸고 지나갔고, 예상 사망자 수만 해도 수십만, 백만에 근접하고 있었다.
숫자를 읽으면서 감정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 수치에 불과하다.’
실제 역사의 스탈린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 이 종이 쪼가리에 적혀 있는 숫자들 역시 그렇게 느껴졌다.
물론 지금 당장 죽은 독일인의 수라 하여도 전쟁에서 죽은 소련인의 수보다 훨씬 적었다. 몇백만의 소련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독일인들의 기관총과 포탄에 맞아 죽고 다쳤다. 이것은 우리가 당한 일에 비하면 소소한 복수에 불과하다.
“서기장 동지…?”
“아, 그래. 음… 이렇게 전달하게.”
내 입술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받아적기 위해 모두가 긴장했다. 생각보다, 말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무기를 수십 개는 더 가지고 있다. 동부전선의 독일군이 즉각적으로 무조건 항복하지 않으면 쾨니히스베르크와 드레스덴을 파괴하겠다.
독일 함대가 무장해제하지 않으면 킬과 함부르크, 슈테틴을 파괴하겠다. 독일 프랑스 주둔군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에센과 도르트문트를 파괴하겠다. 비시 프랑스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비시와 마르세유, 리옹을 파괴하겠다.”
“….”
“이상의 조건은 추축 각국의 즉각적이고도 완벽한 파멸을 유예하기 위한 최소한이다. 협상은 없다. 연합국에 항복하라.”
핵무기라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면 더 이상의 협상은 무의미하다. 추축 각국이 저항을 시도한다면 소련군의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다.
쿠르차토프와 엔지니어들은 열 개가 넘는 핵무기들을 만들어 두었다. 수백 킬로그램이나 되는 플루토늄은 철저하게 소분되고 밀봉되어 폭탄의 껍질 내에 조립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소련군의 선봉부대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해 베를린의 문턱에 이르렀다.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들이 일제 봉기하여 파리에서 독일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아직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었으며, 소련의 서기장이자 국가 지도자로서 국민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나는 핵폭탄 투하를 명령해야 했다.
“유예 기간은 24시간이다. 이 명령이 전달되는 순간으로부터 24시간 후까지 각국의 무조건 항복이 없다면 상기 언급된 도시들로 시작해 각국의 주요 도시들을 하나하나 파괴하겠다. 항복하지 않는다면 남을 것은 폐허뿐이다.”
내가 들어도 노골적이고 질 낮은 협박이었다. 손에 핵무기를 들고 있는 것만 빼면.
핵무기의 효과를 선전하기 위해 소련의 각 방송국들은 폭발을 관측한 Tu-4가 보내온 사진들을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말한 이 협박, 아니, 항복 권유가 그 자리를 메꿀 것이다.
저들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파멸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