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6화
“각하, 각하, 제발….”
“…총통 각하께서는 지금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총통 비서이자 총통의 가장 내밀한 측근인 마르틴 보어만은 또 똑같은 대답을 돌려줄 뿐이었다.
히틀러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모든 면담 요청 및 보고를 무시하고 지하 어딘가의 깊숙한 벙커에 숨어 벌벌 떨고만 있었다.
그가 그렇게 하든, 그러지 않든, 어차피 전쟁은 장군들과 제독들이 알아서 하고 있었기에 그닥 다를 것은 없었다. 하지만 총통을 직접 접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점점 패닉에 빠지고 있었다.
그들은 총통을 숭배했다. 그들은 히틀러를 게르만 민족과 독일의 구세주로 여겼으며, 그가 지난 대전의 적국들을 모두 몰락시키고 유럽을 손에 넣었을 때 신앙은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이제 그 신은 영웅적 휘광을 모두 잃고 초라한 무언가가 되었다.
“…#$%!! ^&*!”
“…총통께서는 아직 이런 상태이십니까?”
“예, 예… 저녁부터 쭉….”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치며, 약에 취해 날뛰는 총통을 차마 다른 이들 앞에 전시할 수는 없었다. 지하벙커의 직원들 대부분은 입이 극히 무겁거나, 혹은 가족이 없어 벙커 내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이들이었다.
총통의 명령을 위조해 문고리 권력을 휘두르던 보어만으로서는 총통이 판단 능력을 잃었다는 것은 사실상 본인이 제3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인제 와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가 업무 효율을 늘린다는 이유로 복용하기 시작한 페르비틴은 점점 더 그 양이 늘어갔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약물이었지만 사용량이 늘면서 총통의 정신은 급속도로 망가져 갔다. 그 누구도, 심지어는 총통이 자기 건강 관련해서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던 테오도르 모렐 박사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페르비틴… 더 가져와….”
“총통 각하!”
가끔 약기운에서 벗어날 때면, 총통은 번뜩이는 통찰을 보여 주곤 했다.
이제 그 통찰이 앞으로 다가올 파멸을 예언할 뿐이라는 것이 문제였을 뿐. 마치 앞으로 다가온 심연을 바라본 예언자처럼 총통은 미쳐 가고 있었다.
“아… 보어만… 페르비틴 좀 더 가져다주겠나?”
“각하….”
“내 말 안 들리나! 페르비틴 가져오라고!”
메스암페타민, 상품명 페르비틴. 그 약은 총통을 망가트렸다. 원래부터 정상적이지는 않았지만 더욱 더.
마구 고함을 치고 성을 내다 제풀에 지쳐 주저앉은 히틀러는 손을 벌벌 떨었다. 그를 지배하는 두려움 때문일까?
“뭐…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각하, 지시하신 미국과의 교섭은… 안타깝게도 실패했…!”
와장창! 히틀러는 탁상에 얹혀 있던 화병을 보어만에게 집어 던졌다. 물론 벌벌 떨리는 손과 흐려진 눈으로 인해 한참 떨어진 허공을 지나 바닥에 추락해 와장창 깨지고 말았지만.
“이제, 이제 모든 게 끝났어! 베를린은 불타오를 거야! 더 이상 의미 없네.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
“각하, 아직 모델 원수 휘하의 충성스러운 장병들이 소련군의 진군을 저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배신자 프랑코 때문에 남이탈리아에 상륙하기는 했지만 케셀링 원수는 험준한 산악지형을 끼고 그들을 막아 내고 있습니다!”
“내 말을 뭘로 듣고 있는 겐가?”
보어만이 애써 반론하자 히틀러는 기묘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비웃음일까, 자조일까.
“베를린이 불타오를 거라고 했네. 베를린.”
“아직 소련군은 한참이나….”
“소련군이 문제가 아니라고! 제기랄! 멍청한 놈!”
어찌 소련군이 문제가 아닐 수 있는가. 오데르강에서 베를린까지는 50km 정도.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한 거리였다.
이제 소련군 전투기들은 베를린 하늘을 날며 삐라를 뿌리고 선동을 해 댔다. 밤이면 밤마다 삐라를 믿고 베를린에서 도망치는 이들을 친위대원들이 잡아 끌고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일본이… 미국을 항복시켰어야 했어… 우리가 실패한 거야….”
“….”
예언자 같던 총통이라도 모든 것을 정확히 예언하지는 못했다.
항공모함을 포함한 함대가 모두 증발하면 미국이 결국 협상 테이블로 나올 것이라는 판단과 달리 미국은 극히 소수의 함대만 남고도 끝까지 결사적인 저항을 택했다.
정신력이 약하다, 의지가 부족하다, 그런 근거 없는 폄훼를 일삼던 총통은 결국 실제로 그랬던 것은 독일이라는 결론 앞에서 무너진 것 같았다.
아무 말 없는 보어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다시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가 뭔가가 문득 떠오른 듯 물기 어린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나…?”
* * *
“1943년 12월….”
총통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고 글을 적어 내려갔다.
평소에 없이 못 살던 페르비틴마저도 ‘마지막 순간’에는 온전한 정신으로 있어야겠다며 거부한 그는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벙커 안 총통 집무실에서 그를 둘러싼 여러 측근들은 무덤덤해 보이기도 했고, 또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여비서와 타자수들은 울먹이며 총통이 써 내려가는 글씨를 응시하지도 못했다.
.
“이것은 나… 아돌프 히틀러의 유언장이다.”
이가 딱딱 부딪히지만 애써 담담하게 히틀러는 자기 자신의 유언장을 읽어 내려갔다. 유언장을 공증하기로 한 세 사람은 한 명 한 명 총통의 유언장을 읽고 사인을 했다.
어린 타자수 하나가 흐느끼며 주저앉았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여비서 하나가 그녀를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갔다. 모두 울고, 흐느끼는 와중 총통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은 나치당과 국가에 환원하도록 하겠네. 죽어서야 재물이 무슨 쓸모가 있겠나.”
“…각하!”
“유언장에는 내가 사망한 이후 독일 국가의 지도자가 될 자들을 선정해 놓았네. 그대로 따라 주었으면 하네.”
떨리는 손으로 어지럽게 휘갈겨 쓴 결과물은 읽기 어려웠지만 알 수는 있었다.
“제국 대통령 겸 전쟁장관 겸 육군 총사령관 발터 모델…?!”
“쭉 읽게.”
“제국 총리 헤르만 괴링, 국가사회주의당 당수에는 요제프 괴벨스 박사, 외무장관에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마지막 순간에도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발터 모델. 총통의 총애를 받아 몇 번이고 특진을 거듭하여 동부전선의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이제는 향후 국가수반으로까지 지명받다니!
해설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에 총통은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툭 던졌다.
“그 정도라면 내 복수는 해 주지 않겠나? 가장 뛰어나고… 또 충성스러운.”
“…알겠습니다, 총통 각하.”
“하일 히틀러!”
“하일 히틀러!”
사람들은 그저 오른손을 치켜들고 그에게 경례를 바쳤다. 마치 조건반사처럼 울먹이던 여비서들까지 다 하일 히틀러를 외쳤다.
“가져오게나.”
“예!”
건장한 체격의 SS 친위대원은 명령을 받자 부리나케 튀어 나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던 에바 브라운은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저… 총통 각하?”
“….”
“각하! 우리는 이제 어떻게….”
“쉿! 조용히 하게.”
유언장에서조차 자신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총통을 보며 에바 브라운은 히스테릭하게 손을 떨며 움찔거렸다.
히틀러는 그녀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그사이 밖으로 나갔던 SS 친위대원이 커다란 상자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하나씩 꺼내 가지게.”
“예?”
먼저 연 한 상자에는 광택이 흐르는 권총 십여 정이 들어 있었다. 보어만부터 시작하여 한 명씩, 무엇에 홀린 듯 권총을 집어 들었다.
“에바.”
“….”
얼어붙어 몸을 벌벌 떨던 에바 브라운에게도 총통은 권총을 권했다. 에바 브라운은 화장이 다 번지도록 눈물을 흘렸지만 입술을 꽉 깨문 채 권총을 집어 들고 나갔다.
한 명씩, 한 명씩. 권총을 집어 든 이들은 방을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두 번째 길쭉한 상자를 SS 친위대원이 열어젖혔다.
“…어디서 구해 온 거라고 했나?”
“고미술상을 통하여 구해 왔다고 합니다. 가격은….”
“인제 와서 가격은 무슨 쓸모인가?”
아름답게 세공된 일본도 두 자루를 꺼낸 총통은 스르릉, 날을 꺼내어 깜빡거리는 전등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아름답지 않나?”
“그… 그렇습니다.”
“하긴, 자네와 같은….”
유럽인이 무엇을 알겠나. 총통이 말한 소리가 워낙 작고 나직하여 친위대원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모두가 나간 채 둘만이 남은 집무실에서 총통은 홀린 것처럼 칼을 뽑아 비추어도 보고 휘둘러도 보았다.
탕! 탕!
밖에서는 몇 번의 총소리가 들려왔다. 충실한 그의 수하들은 주군이 가는 길을 따르기 위해 마지막 명령에도 복종한 것이다.
원칙대로, 작법대로라면 흰옷을 입고 다다미 위에서 할복을 행해야겠지만 이런 곳에는 그런 것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또, 누군가가 가이샤쿠 노릇을 하며 목을 쳐 주어야겠지만… 그런 검도 실력을 가진 자는 아쉽게도 독일 전역을 뒤져보아도 없었다. 있었다 하더라도 전장에 나가 전사했겠지만.
“자네도….”
“예! 총통 만세! 하일 히틀러!”
친위대원에게도 명령을 내리자, 그는 열렬한 표정으로 총통 만세를 외쳤다.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라는 둥 잡스러운 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그는 휘파람으로 친위대의 군가를 부르며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상의를 풀어헤치자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맨살에 느껴졌다. 죽음의 느낌이.
그가 해군 장교로 명예로운 무적황군에서 복무할 적만 하여도 군도를 차고 다니곤 했지만… ‘히틀러’가 된 이후엔 그럴 일이 없었다. 칼의 감각은 낯설기만 했다.
이 육체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 정신도 어찌 보면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기억도, 인격도, 점점 흡수되어 가는 느낌. 무적황군의 해군중령 사토 이치로일 시절만 하더라도 그는 딱히 약이란 것을 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육체는 약물에 절어 있었고, 결국 그마저도 중독시켰다.
“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두 번째 자결 앞에서 그는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에 신음했다. 지난번에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뜻이 같은 장교들 몇몇이 함께 자살했었다.
천황 폐하를, 일본 제국을 지키지 못했다! 귀축과도 같은 미제 놈들은 핵폭탄으로 수십만의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둘이나 불태워 버렸다.
이번에도, 이번에도 역사는 반복되려 하고 있었다.
처음 히틀러의 몸에 들어왔을 때, 그는 일본을 보우하시는 신들께서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이라 생각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세계를 맹우인 독일과 나누어 가져라!
하지만… 하지만 이번에도 추축국은 패배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는 또 한 번의 자결을 선택했다. 한 번 더 자결하면 또 한 번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니.
“인간 오십 년, 하천의 세월에 비하면….”
그때는 명검사가 가이샤쿠로 있어 할복이 훨씬 쉬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 혼자, 오롯이 짐을 감당해야만 했다.
“일본 제국 만세! 천황 폐하 만세!”
손에 힘을 주려는 와중, 뭔가 거대한 충격파가 천지를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