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화
“서기장 동지께 경례!”
척!
스몰렌스크 인근의 비밀 공군기지 활주로에서, 나는 베를린 폭격을 수행할 비행대원들의 경례를 받았다.
12월 말, 차가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와중에도 이들은 한 점의 흔들림 없이 절도있게 경례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수많은 훈장들이 빛나고 있었다.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끝끝내 살아남아 수십 번의 임무를 수행한 역전의 조종사들. 그들은 그만큼 자부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반갑소! 마리나 라스코바 대령?”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서기장 동지!”
엄격한 심사 끝에 선발된 이 폭격비행대의 대장으로 선정된 이는 소련 최초의 여성 파일럿이자 제46근위야간폭격비행대, 별명 ‘밤의 마녀들’을 창설한 것으로 유명한 마리나 라스코바 대령이었다.
개전 초기부터 폭격기 조종사로 활약한 그녀는 제공권의 열세 속에서도 독일 전투기들과 대공포의 방공망을 돌파하고 목표물에 정확히 폭격을 가하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미국의 B-29를 복제해 만든 투폴레프-4 중폭격기의 실전시험에도 참여했기에, 핵투하 기체로 선정된 투폴레프 중폭격기를 몰기에 최적으로 선발된 그녀는 눈빛으로 굳은 결의를 뿜어냈다.
이외에도 비행대원들은 다들 소련군 항공대에서 내로라하는 파일럿들이었다. 가슴에서 빛나는 훈장들은 거저 딴 것이 아니라는 듯, 그들은 다들 꼿꼿하게 턱을 치켜들고 내 명령만을 기다린다는 듯 자신감이 넘쳤다.
“그대들은 우리 소비에트 연방 공군에서 가장 뛰어난 조종사로 선발된 이들이오. 그리고 조국은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기고자 하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서기장 동지!”
조종사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대답했다. 기술적으로는 이들은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을 것이다.
시베리아의 벌판에서 이들은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위한 훈련을 반복해 왔다. 물론 이들은 구체적으로 그게 뭔지는 몰랐겠지만.
9천 미터의 고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고, 투하 즉시 급강하 급선회하여 폭탄의 예측 범위에서 도주하는 훈련을 몇 달이나 했으면 기술적으로는 숙달되어 있을 것이다. 몇 개의 비행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적을 냈으니.
폭격대는 모두 일곱 대의 Tu-4 폭격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행대장 마리나 라스코바는 내게 설명하려는 듯 각 잡힌 목소리로 하나하나 알려 주기 시작했다.
“일곱 대의 폭격기 중 세 대는 기상관측기입니다. 한 대는 예비기체이며 나머지 세 대가 실질적인 ‘타격’을 담당할 것입니다.”
물론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이렇게 남의 입으로, 그것도 핵폭격을 직접 담당할 사람으로부터 듣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긴장이 되는지 숨을 멈추고 듣는 것 같았다.
“타격 담당 기체 셋 중 한 대는 폭발의 촬영과 관측, 한 대는 폭발력의 계측을 담당합니다. 마지막 저 기체, 제가 직접 조종할….”
“안나 류바토비치?”
“그렇습니다… 하하… 저희 어머니의 처녀적 이름입니다.”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기묘한 데자뷰가 엄습했다.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의 실전 핵투하를 한 기체의 이름이 바로 ‘에놀라 게이’. 투하자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했다.
사실 역사대로라면 마리나 라스코바는 이미 전사했어야 한다. 43년 1월 스탈린그라드 인근에서, 비상착륙을 감행하다가.
역사는 이미 한참이나 바뀌어, 죽었어야 할 수백만이 죽지 않았고 수많은 도시들이 전쟁의 불길로부터 안전하게 살아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폭격기 조종사들이 기체 이름을 자기 어머니의 그것을 따서 짓는 것은 대체 어찌 된 이유일까?
아무튼 이 기묘함을 곱씹을 시간은 별로 많지 않았다.
* * *
핵폭탄은 아직 기체에 실리지 않았다. 폭탄을 적재하는 과정에서의 유폭을 우려하여 ‘너무도 중요한 인물’인 나는 적재 장면을 보지 못하고 활주로를 떠나야 했다.
혹시나, 혹시나 몰라 납 유리로 둘둘 땜빵을 한 서기장 전용 방호차량 안에서 나는 공군 사령관 노비코프에게 물었다.
“…바실리 녀석은 어떻게 됐는가?”
“!!!”
“서기장 동지께서 질문하시지 않습니까?”
핵개발이 자신의 책임하에서 진행되었다는데 막대한 자부심을 품은 베리야는 머뭇거리는 노비코프를 다그쳤다. 내가 제지하자 베리야는 입을 다물었지만, 노비코프는 여전히 겁을 먹은 듯했다.
“…그… 성공했다고 합니다.”
“…잘 됐군….”
아마 핵의 불길은 베를린의 수십만 시민들을 태워 버릴 것이다. 고통스러운 죽음에서 ‘자식’이 해방된 것은 어찌 보면 다행이었고… 어찌 보면 비극이었다.
민간인들에게 대량살상무기를 투하한다는 데 내가 반감을 가진 것을 간파한 바실렙스키는 이야기했었다.
“민간인들을 즉시 대피시키라는 삐라를 투하할 수는 없겠습니까?”
“그들이 민간인을 방패로 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나?”
나치 독일은 그보다 더한 짓도 얼마든지 할 것이다. 유태인과 소련군 포로를 잡아다 고기방패로까지 사용하는데, 민간인들을 희생시키지 못할까?
비슷한 맥락에서 폭격 위치를 경고한다거나, 고공에서 폭발시키자는 안도 기각되었다. 그것으로 나치 독일의 광기를 멈출 수 있을까? 오히려 더 발악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미쳐 날뛰는 적을 상대하며 인도주의를 논하는 것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짓이었다. 노인과 아이들까지 수십만 단위로 징집해 전선에 내모는 자들은 결코 민간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를 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소련군 포로는 다행히도 독일 본토가 아니라 다른 곳에 수용되어 있다고 합니다. 베를린에는 극히 소수만이….”
“그렇겠지. 누가 굳이 수도에 수용소를 만들겠나?”
저들은 도이치 민족의 땅을 열등 인종들에게 한 치라도 내주기 싫어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프랑스 침공 이후 포로로 잡은 병사들 중 알제리계나 세네갈계 등 식민지 출신 흑인들은 본토가 아닌 다른 곳에 수용한 이들이 아닌가?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도, 비르케나우 수용소도 다 점령된 폴란드령에 있었다. 애초에 폴란드 현지에서 유태인들을 많이 잡아들이기도 했거니와….
“아! 막 폭격기가 이륙했다고 합니다!”
“그래?”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자 희미하게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이 보였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해, 그 어떤 폭탄보다도 거대한 것이 간다.
아마 인류는 앞으로 저런 것을 수천, 수만 개씩 만들어 서로를 위협하는 도구로 사용하겠지만 너만은 죽어야 할 사람을 줄여 줄 것이다.
아마 이 세상에서 핵무기는 몇 번은 더 사용될 것이다. 소련은 이미 몇 개의 핵무기를 더 준비하고 있었고, 끊임없이 가동되는 비밀도시의 원자로들은 계속 그 원료가 될 플루토늄을 토해 내고 있었다.
‘두 발? 세 발?’
독일보다 더 미쳐 있는 일본이 항복하려면 몇 발 정도를 떨어트려야 할까? 아직 미군은 실제 역사의 44년, 45년만큼 일본을 때려 부수고 있지 못했다. 이제 막 전략폭격으로 일본의 주요 도시들을 불태워 버리기 시작했으니, 일본은 아직 저항할 힘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유능’하기 짝이 없는 베리야는 이미 일본 내에서 폭격할 곳들의 우선순위를 뽑아 온 바 있었다.
도쿄, 오사카, 나고야, 교토, 요코하마, 고베…. 그냥 일본 내 도시들 중 인구순으로 정렬한 것 같았지만 알 게 뭐람.
앞으로 타국들과의 외교 관계를 풀어 가야 할 차에 일본 민간인들이 얼마나 죽고 다칠지 걱정하는 것은 시간 낭비 같았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나 스페인 같은 서유럽 국가들, 앞으로 우리 위성국이 될 동유럽 국가들, 중국과 일본과 한국까지.
“모스크바로 빨리 가도록 하지! 어쩐지 피곤하군.”
* * *
1943년 독일의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행복한 기념일이기 어려웠다.
많은 가정에서 아들이나 아버지가 전쟁에 끌려가고 말았다. 그들 중 얼마는 러시아의 한파를 온몸으로 맞이하며 추위에 떨고 있었고, 또 얼마는 죽어 뼛가루로 돌아왔으며, 또 얼마는 돌아오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커다란 거위 구이와 소시지, 크림이 가득한 맥주나 사과주, 생강과자와 건포도가 가득 들어 있는 케이크 따위는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먼 옛날의 사치가 되었다.
아기 예수가 ‘더러운 유태인’의 몸으로 왔다는 것을 지극히 싫어한 나치 정권은 크리스마스를 게르만 신화와 접목한 무엇으로 바꾸려 했다.
“하일 히틀러!”
“하일 히틀러!”
베를린 광장의 사거리에는 거대한 전나무가 서 있었다. 원래라면 ‘크리스마스 트리’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그 나무는 나치당의 공식 프로파간다에 따르면 ‘율 나무’였다.
게르만의 신, 오딘을 기리는 축제에서 사용되었다던 그 나무는 번쩍이는 스와스티카를 꼭대기에 달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굽어보았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멈춰서서 크게 하일 히틀러 따위의 인사를 외쳤다. 마치 남들더러 들으라는 듯. 나치당은 별의별 곳에서 국민들의 삶을 제약하곤 했다.
예컨대 이제 트리의 꼭대기에는 별을 달 수도 없었다.
“크리스마스는 원래 게르만 민족의 전통 축제입니다! 라틴 민족들은 이를 자기네 식대로 변형하였으나 동지(冬至)를 기념하는 게르만 민족의 전통을 우리는 다시 복원하여야 할 것입니다!”
동지가 지나면 해가 새로 태어난다고 그들의 조상은 믿었다나. 그렇기에 독일인은 마땅히 저 유태-볼셰비키들이 끔찍이도 좋아하는 별 따위가 아니라, 태양을 상징하는 스와스티카를 달아야 한다! 괴벨스는 그 갈가마귀 같이 까악대는 목소리로 라디오에서 떠들어 댔다.
트리가 무엇을 달고 있건, 괴벨스 박사가 뭐라고 떠들건, 국민들은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나치에게 반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어디론가 끌려가 버렸고, 그 자리에는 나치당의 프로파간다를 열렬히 찬양하는 이들로 메워졌다.
이 시대의 독일인들은, 적절히 무언가를 듣는 척하고, 무언가를 무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에.
* * *
“총통은 여전히 면담을 거부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선전장관께서는 조금 더 기다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신경질적으로 탁탁 구둣발을 까딱대던 괴벨스는 총통의 비서, 마르틴 보어만이 이야기하자 얼굴을 팍 찡그리면서도 돌아서야만 했다.
총통의 ‘비밀 프로젝트’를 책임지던 과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실종된 이후로 총통은 모든 사람을 만나기를 거부하고 베를린 지하의 벙커에서 칩거하고 있었다.
총통이 가장 신뢰하는 비서이자 최측근인 보어만 정도가 문밖에서 총통의 명령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그마저도 발작적인 고함과 신경질적인 짜증 정도인 것 같았지만.
자기 사람들을 총통부 근처에 심어 둔 괴벨스는 대략은 알 수 있었다. 총통은 엄청나게 강력한 폭탄을 만들겠다는 비밀 프로젝트에 마찬가지로 엄청난 예산을 투자했지만, 그 결과물은 실패였다.
하이젠베르크는 대담하게도 계획을 사보타주했다. 실제로 나오지 않은 결과물들도 그는 거짓으로 총통에게 보고했고, 총통은 그의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고는 달라는 대로 예산을 퍼 주었다.
군대에 가야 할 예산, 민간 생활과 복지를 위해 쓰여야 할 예산을 야금야금 잡아먹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까지 독점했던 그 프로젝트의 결과는 진짜 별것 없는 내용이었다. 하이젠베르크가 남겨 둔 연구 결과를 본 과학자들은 이야기했다.
“이 내용들은 이론적인 내용일 뿐이지, 실제로 뭘 만드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폭탄을 만든단 말입니까? 글쎄요, 한 5년? 10년? 아무튼 시간은 꽤나 필요할 것입니다.”
총통은 이에 절망해 지하에 전용 비밀 벙커를 만들고는 숨어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 하는 일도 별로 없었고, 그저 상징 수준의 무엇이었던데다 쓸데없는 참견도 꽤나 많이 했기에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하지만 그 상징을 다루는 책임자인 선전장관, 괴벨스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무력집단인 공군을 쥐고 있는 괴링, 예산과 생산권한을 틀어쥔 슈페어, 수십만 군대를 자기 휘하에 둔 힘러나 총통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비서이자 문고리 권력인 보어만 등에 비하면 그의 권력은 보잘것없었다.
오직 총통의 신임과 신뢰만으로 권력자 자리를 가지게 된 것인데, 총통이 사라지고 난 이후 권력의 공백 속에서 그의 입지는 축소되어 가고만 있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리무진에 탑승하며, 괴벨스는 엄지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긴장할 때마다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제기랄,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데….’
바로 그때,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공습 경보였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거리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황급히 골목과 건물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제국의 위대한 수도 베를린에 공습이라니….
“빌어먹을, 또 공습인가? 괴링, 그 머저리는 뭘 하고 있는 건가?”
“차를 돌리시겠습니까? 장관 각하.”
“아니, 됐네. 빨리 가도록 하지.”
물론 소련군이나 미군이 실제로 베를린에 떨어트릴 수 있는 폭탄은 극히 적었다. 그것을 믿은 괴벨스는 빨리 베를린 외곽 자신의 저택으로 향하고자 했다.
하늘에서 뭔가 거대한 빛이 번쩍이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