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164화 (164/300)

# 164

164화

오데르강. 체코에서 발원하여 슐레지엔과 포메른을 가로질러 흐르고, 슈테틴에서 발트해와 만나는 거대한 강.

프로이센을 짓밟고 진군한 소련군과 베를린 사이에 놓여 있는 마지막 지형적 장애물이 된 오데르강은 여전히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오데르강 방어선을 지키는 병사들은 멀거니, 제국이 상실한 레벤스라움을 바라보았다.

리가에서, 쿠를란트 반도에서, 그리고 이제는 부됸늬그라드가 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독일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소련군의 물결 아래 짓밟히고 말았다.

오히려, 소련군이 여유롭게 부다페스트와 베네치아, 그리고 ‘오스트마르크주’를 점령할 시간만을 내주었을 뿐.

제3제국의 장병들은 마지막까지 소련군에게 저항했지만, 이제 끝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끝없는 피난민들의 행렬은 그 음울한 현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 * *

킬, 뤼벡, 플렌스부르크, 로스토크.

발트해에 접한 항구에는 끊임없이 피난민들을 실은 배들이 들이닥쳤다.

동프로이센 주민들은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무엇을 저질렀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엄정한 규율하에 대민 범죄는 가혹할 정도로 처벌이 가해졌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제 발이 저린 듯 ‘본토’로 도망쳤다.

하지만 전쟁은 느릿한 피난민들의 발걸음보다 빠르게 들이닥쳤다.

“공습이다! 공습이다! 소련의 공습이다!”

구름에 뒤덮여 어둑어둑한 하늘에 사이렌을 울리며 전투기가 날아다녔다. 루프트바페의 마지막 남은 파일럿들은 도시 폭격을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접전을 걸었지만 압도적인 머릿수로 밀고 들어오는 데는 별수가 없었다.

전투기 편대는 폭격기가 도시로 들어오기 전 제공을 위해 도시의 하늘을 정리할 뿐이었지만 시민들은 전투기만 보아도 벌벌 떨었다.

그다음에 무엇이 오는지는 수십 번 겪어 몸으로 알고 있었기에.

[주민들은 각자 지정된 위치로 대피하십시오. 질서 있게 대피하십시오.]

역설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워야 할 순간에 모두가 가장 질서정연했다. 몇 번이고 겪어 본 상황 앞에서 다들 놀랍도록 침착함을 발휘했다.

타타타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타타! 대공포탑에서는 소련 비행기들을 향해 기관총을 쏴 갈겼다.

육중한 체구와 그만큼 압도적인 맷집을 자랑하는 그들은 기관총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갈수록 저질이 되어 가는 총열이며 강재 때문에 재밍이 걸려 대공포반원들이 낑낑대는 동안 포탑에 매달린 소련군 포로는 그들을 비웃었다.

“***!!! ******!!!”

독일인들은 그 소련군이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거친 발음에,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악을 쓰다 비웃는 그의 모습에서 공포를 느낄 뿐.

보다 못한 대공포반원 하나가 막대기로 그의 머리통을 몇 번이나 내리쳤지만 그 병사는 여전히 미친 듯한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공습이 종료되었습니다. 시민들은 걱정하지 마시고 생업에 복귀하여 주십시오. 배포된 불온 선전물을 소지하는 것이 발각될 경우 처벌이 뒤따를 수 있습니다.]

요사이 소련군은 폭탄보다는 다른 것을 더 많이 뿌리고 갔다.

수백 대의 폭격기들은 독일 전역에 걸쳐 삐라를 뿌렸다. 양면에 러시아어와 독일어로 작성된 그 삐라의 내용은 다양했다.

‘더 이상 나치는 승리할 수 없다. 시민들은 궐기하여 히틀러를 무너트려라!’

‘소련과 소련군은 독일인에 대한 일체의 가학행위가 없음을 보장한다.’

‘도시를 버리고 시골로 피난하라. 소련군은 다음과 같은 날에 공습을 할 것을 미리 예고한다.’

하늘에서 종이들이 팔락거리며 땅으로 떨어졌다. 누군가는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삐라를 피해 건물 안으로 다시 향했다.

또 누군가는 골목길에서, 아니면 길바닥에서, 남들의 눈길을 피해 몰래몰래 삐라를 두어 장씩 주웠다.

적이 주는 것이라고 해도 거르지 않고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독일인들에게는 정보가 부족했다.

[독일인들이여! 봉기하십시오! 사악한 소련군들은 이미 우리 도이치 민족의 고유 영토를 겁간하고 노략질하였습니다. 승리냐! 시베리아냐!]

모든 것이 바뀐 와중에 바뀌지 않는 것은 까마귀같이 까악대는 괴벨스의 목소리뿐이었다.

‘총통 각하의 지혜로 준비 중인 신무기’에 대한 이야기나, ‘소련군을 쳐부수는 막강한 독일의 중전차들’에 대한 이야기는 쏙 들어가 버렸다. 이제 괴벨스 장관은 민족의 열정과 의지로 소련군을 막아 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최후의 결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이치 민족이여! 독일을 위해! 총통 각하를 위해…!]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꽁꽁 여미고,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는 양 거리를 최대한 빨리 지나치고자 했다.

눈에 핏발이 선 게슈타포들과 아직 징집되기에는 너무나 어린 히틀러 유겐트들이 거리를 활보했기에.

“그래도, 요 며칠 간은 공습이나 폭격이 없었군.”

“그러게나 말이네.”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뭔가 이야기할 거리, 즐거워할 거리를 찾았다. 성냥 한 개비를 가지고 각자 담뱃불을 피운 두 사람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요사이 며칠 간은 소련군이 베를린을 공습하지 않았다. 소련 비행기들은 시체, 혹은 곧 시체가 될 무엇 위를 날아다니는 까마귀 떼처럼 불길하게 하늘을 배회할 뿐. 뿌리는 삐라의 양이 늘긴 했다는 것을 시민들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떻게 될까?”

무엇에 대한 질문이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모두들 고민했다.

과연 내일은? 모레는? ‘0의 시간’은 감히 입밖에도 낼 수 없는 단어였다.

“….”

* * *

“저 앞에, 베를린이 보인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독일에겐 ‘0의 시간’이겠지만, 소련군은 이를 다른 단어로 표현했다.

“승리의 날! 승리의 날이여!”

마지막 남은 독일군의 잔해를 격퇴한 기갑군단은 한 강가에 이르렀다.

강 건너편에는 마지막으로 방어진지를 차리고 대항하려는 독일군 한 무리가 있었다.

그들이 수없이 물리쳤던, 사살하고 포로로 잡았던 독일군들처럼 그 무리 역시 나이가 지긋하거나 솜털조차 채 안 가신 애송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봐! 항복이나 해라! 하하하하하하!”

소련군 병사 하나가 전차 위에 올라서서 크게 외쳤다. 저쪽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했는지 땅, 땅, 총을 쏘아 댔다.

“하하하핫, 기관총 하나 없어서….”

대부분 지난 대전 때나 썼을 법한 구식 소총, 나름 ‘정예’ 국민돌격대라면 판처파우스트 정도. 가끔은 군복도 없이 완장과 소총 한 정, 그리고 탄창 하나 정도를 던져 주고 소련군 앞에 내몬 경우도 있었다.

그 모습에서 소련군들은 인민들을 학살한 흉악무도한 파시스트 군대보다는 집에 계신 늙으신 아버지나 어린 동생을 먼저 떠올렸다.

“이봐, 그만하자고. 진격 명령은 여기까지였어.”

“예! 아, 예! 소위님.”

병사는 피식피식 웃으며 전차에서 내려왔다. 이제 전쟁이 끝날 일만 남았다. 병사들은 어지간히도 들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전쟁이 끝나면 집으로 갈 수 있다.

“고향은 여전하겠지, 기차역에서 한 걸음 내리면….”

“어머니! 아버지! 나를 기다려 손을 내밀어 오시는데~”

돌림노래처럼 병사들은 유행하는 가요를 불러 젖히고, 전우들과 고향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 아버지, 가끔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기억해내려 애쓰면서.

동그마한 언덕배기를 넘어가면 고향마을을 휘둘러 흐르는 실개천이 보이고, 빵 굽는 연기 모락모락 피어나는 오두막에는 어머니 아버지가 계실 것이다.

주름살이 좀 늘고, 허리가 좀 더 굽기는 하셨어도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인 부모님이. 정치장교는 고향의 마을 당서기가 대필해 준 편지를 읽어 주면서 큼, 큼, 목을 고르곤 했다.

[아들아 잘 있느냐. 지난번에 네가 쓴 편지는 잘 받아 보았다. 우리는 네가 전장에서 다치지 않고 몸 건강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혹여나 네가 다치지 않을지 밤마다 걱정이 되는구나. 네 어머니는 여전히 밤마다 잠꼬대로 너를 찾곤 한단다….]

“어머니….”

[할머니는 요 며칠 전에 독감에 걸리셨는데 마을 당서기가 가져다준 미제 초콜릿을 끓여 먹고 따뜻한 이불에 들어가서 며칠 계시니 나으셨단다. 참 다행이다. 주변에 독감에 걸린 사람들이 몇 있는데 미제 초콜릿은 무슨 신묘한 효능이라도 있는 것 같구나. 올 때 좀 가지고 오려무나. 나는 요새 영 허리가 시원찮단다. 네가 와야 내년 파종을 할 때 좀 편할 듯하구나.]

부대원들은 정치위원에게 잠시 맡겨 두고, 전차부대의 소대장, 소위 니콜라이 페트로프는 수통을 가지고 강변으로 내려왔다.

저편으로 석양이 져가며 붉은빛을 흩뿌렸다. 강은 꺼져 가는 듯한 햇빛을 받아 넘실거리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수통에 강물을 가득 채운 니콜라이는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

건너편에서는 자신과 같이 물을 뜨는 독일군 하나가 보였다. 워낙 거리가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군인도 이쪽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저자도… 가족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겠지?’

얼마 전 속성 장교훈련이 끝나고 배치되어 온 곳은 독일 영내로 진입하는 선두 기갑부대의 일선 소대였다. 다행히도 독일군의 저항은 미미한 수준이었고, 특히 기갑부대를 잡아낼 만한 대전차화기는 극도로 부족했다.

별달리 다치는 일 없이 여기까지 온 니콜라이는 감상에 빠져들었다.

점점 어둑어둑해져 가는 노을 때문에 그러할까? 그는 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보고 있는 같은 해와 별, 달을 카티아도 보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 한켠이 아릿해져 왔기에.

이제 그는 글을 잘 읽을 줄 알아 예전처럼 정치장교에게 부탁해서 편지를 읽어 달라 할 필요가 없었다. 감히 소대장의 사적인 편지를 뜯어서 읽어볼 간 큰 이도 몇 없었기에 그는 편지의 내용을 오롯이 혼자 음미할 수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읽어 가장자리에 손때가 묻은 편지를 꺼내어 다시 읽기 시작했다.

[니콜라이에게. 어디 다친 곳은 없지? 그랬다면 난 정말 화가 날 거야. 네게 상처를 입힌 독일군에게도, 다쳐서 날 놀라게 한 너에게도….]

여전히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꼭꼭 눌러 쓴 그녀의 편지는 군용 편지지의 끝까지 한가득 꽉 채우고 있었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 이다음에 무슨 내용이 나올지, 눈을 감고도 쭉쭉 읊어 내려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이는 다시 한번 카티아의 글씨를 눈에 새겼다.

편지지의 한켠에는 동그라미가 하나 쳐져 있었다. 동그라미 옆 작은 화살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기에 내가 키스했어. 너도 여기에 키스하면 서로 닿을 수 있겠지?’

편지를 읽을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니콜라이는 동그라미에 쪽, 입을 맞추고는 혹시나 바람에 날릴세라 조심조심 접어 집어넣었다.

뒤에서는 마침 그의 소대원이 달려왔다.

“소대장님! 소대장님! 중대장님이 장교 전원 호출하셨답니다!”

“어 그래! 알겠다!”

아직 자신이 장교라는 것이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툭툭 털고 일어나 막사를 향했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석양은 붉게 지평선을 태우며 꺼져 가고 있었다.

‘저 너머엔… 베를린이….’

파쇼들의 수도 베를린이 저기에 있었다. 그의 부대는 저곳에 진입하는 선봉대였다. 얼마나 희생을 치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작전 전의 여유를 니콜라이는 한껏 만끽했다.

다가온 승리의 날을, 그는 살아서 맞이할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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