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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162화 (162/300)

# 162

162화

“…우리가 여기서 협조할 경우 정권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정권 복구와 독일 괴뢰 축출을 돕는다면 스페인은 다시 미국의 동맹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페인 외무장관 프란시스코 고메즈는 천천히 턱을 짚고 고민을 시작했다.

이미 전황은 뒤집힌 지 오래였다. 독일은 애써 선전을 통해 승리가 멀리 있지 않은 것처럼 거짓을 이야기했지만 동맹국의 고위층들은 다 알고 있었다.

스페인만 해도 파견한 청색사단 등의 전투보고 및 비밀 전문을 통해 동부전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는커녕 베를린이 함락될 위기인데….’

자국민 수십만 명을 제 손으로 학살한 프랑코 정부라지만, 멀쩡한 젊은 청년 수십만을 남의 나라의 전쟁에 보내 죽게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독일은 협박으로 대량의 물자와 인력을 공출해 갔고, 이에 반기를 드는 국가들은 참수작전을 통해 괴뢰국을 세웠다. 그 진한 광기를 보며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프랑코 역시 공포에 떨어야 했다.

언제 독일이 미쳐 날뛰며 동맹국 정부들을 물귀신처럼 같이 끌고 들어가려 하지 않을까? 과연 이 전쟁의 책임을 소련이 독일에게만 물으려 할까?

그리하여 스페인은 줄을 바꿔 잡기로 했다.

“살라자르가 어디 있는지는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미국이 약속된 사항들을 이행한다면 우리는 미국 함대의 지브롤터 통과를 용인할 것입니다. 향후 지브롤터의 영유권 역시….”

“좋습니다. 그의 신병을 확보하는 대로 대사관을 통하여 통보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소련은 멀고 미국은 가깝다. 미국은 아조레스를 확보하고 영국에 상륙하느냐, 프랑스로 가느냐, 이베리아를 확보하느냐로 고민하고 있었다.

스페인은 지중해를 열어 주고 이탈리아에 상륙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한편 포르투갈의 친미 정권을 복원해 줄 것을 약속했다. 유럽 대륙에 영향력을 투사할 교두보를 모두 잃어버릴 것을 걱정한 미국은 그 거래를 수락했다.

프랑스가 친소로 기울어지고, 발칸 반도와 독일, 이탈리아 북부까지 붉은 군대가 휩쓰는 와중에 스페인마저 친소 혹은 반미 공화파 정권이 세워진다면?

미국으로서는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영국은 미국의 충실한 동맹국으로 남을 수 있겠지만 지중해가 소련의 바다가 되어 버린 상황에서 중동-이집트와 인도 식민지는 결코 유지할 수 없었다.

“인도가 없는 대영제국은 대영제국이 아니다!”

죽은 처칠과 현재 내각의 2인자 겸 외무장관을 맡은 이든은 그렇게 주장했다.

어떻게든 유럽 대륙에 친구를 만들어 둘 필요가 있었다. 비록 그 ‘친구’가 예전에 불량아들과 어울린 전적이 있다 할지언정.

스페인은 애써 독일의 협박과 기만 때문에 추축국에 합류하였으며 자기네들은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이 없노라 주장했다. 프랑코는 ‘명목상’으로 자신이 퇴진하고 전쟁에 손댄 적 없는 깨끗한 얼굴마담들을 내세운 신정부를 구성할 수도 있노라 이야기했다.

미국은 아무래도 좋았다. 최소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곧 입성할 남이탈리아, 영국까지 우방으로 확보한다면 유럽 대륙에 영향을 미칠 최소한은 되리라.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소련은 베를린을 함락하지 못했고, 적장이지만 모델은 뛰어난 사령관이었다. 비스와강에서 밀려나기는 했어도, 아직 베를린 앞에는 오데르강이 남이 있었다.

모델이 벌어 주는 시간 동안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을 돈으로, 지원을 미끼로 회유한다면 향후 막대하게 팽창할 소련에 맞설 우군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부디 최대한 빨리 약속한 바를 이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메즈 외무장관은 미국 국무부의 관료에게 손을 내밀었다. 굳게 잡은 두 손은 소련의 팽창에 대한 불안함으로 흔들렸다.

* * *

독일은 아조레스가 완전히 미국의 것으로 굳어진 이후 전함들을 항공기의 사정거리에 두는 대신 후방으로 빼돌렸다.

귀중한 전력들인 전함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도록 숨기면서, 유보트와 중순양함 등의 전력을 운용하는 것으로 미국이 유럽 본토에 상륙하여 제2전선을 열어젖히는 것을 막을 수는 있었다.

새로 건조된 미국의 신형 군함들은 태평양으로 향했기에, 독일은 새로 건조한 전함 없이도 미국의 공세를 막아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전함들도 언제까지나 항구에 숨겨 둘 수는 없었다.

쾅! 쾅! 콰쾅!

육중한 비스마르크의 함포가 불을 뿜었다. 항구에는 조각배며 나룻배들이 아슬아슬하게 떠 먼바다로 도망치고 있었다.

쾨니히스베르크 앞바다는 크고 작은 배들로 가득했다. 먼바다에서는 거대한 전함들이 진군해 오는 소련군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했다. 가까운 앞바다에는 소련군을 피해 도망치는 피난민들이 한가득 탄 배들이 필사적으로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련군 항공기들은 독일 전투기와 부딪혀 싸우며 하늘을 날아다닐지언정 배들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휴우, 저놈들… 어쩐지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래. 왜 민간인들을 공격하지 않는 거지?”

그런 의문을 독일 해군의 승조원들은 품곤 했다. 왜 소련군은 피난민들을 공격하지 않는가? 그들이 익히 들어왔던 흉악하고 사악한 소련군은 민간인들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고 시체를 겁탈하는 족속들이었다.

하지만 소련군 비행기는 바다에 있는 것들은 공격하지 않았다. 집요하게 루프트바페 소속의 비행기들만을 노릴 뿐.

대공포 사격을 준비하던 전함전대는 직접적으로 항공기들이 전함을 노리지 않자 대공경계태세를 풀고는 대공포반원을 민간인 구조에 투입했다.

“감…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저희 해군이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수병들은 기다란 사다리를 낑낑대며 올라오는 민간인들을 정중히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방금 올라온 노부인의 묵직한 보따리를 들어 멘 젊다 못해 어린 수병 하나는 친절하게 꾸벅 인사를 했다.

“저… 그런데 이 배는 어디로 갑니까요?”

“예? 아….”

수병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뭇거렸지만 옆에서 감독하던 장교 하나가 퉁명스럽게 툭 던졌다.

소련군들이 밀어닥치지 않는 것이 더 불안한지, 아니면 전함이 해전이 아니라 이런 임무에 동원되는 것이 불만인지. 그는 민간인이든 부하든 모두에게 퉁명스레 굴고 있었다.

“이 배는 슈테틴으로 후퇴합니다. 여러분들은 그곳에서 열차로 갈아탄 후 베를린 근교로 집결하게 될 겁니다.”

“아이고, 그러면 안 되는데….”

“예?”

노부인은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손을 파들파들 떨었다. 수병과 장교 모두 노부인을 바라보자 그녀는 울먹일 것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소련, 소련 놈들이 뿌린 삐라에서 그러던데… 베를린으로 가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아, 할머님, 그….”

“적국의 프로파간다에 놀아나는 것인가?”

수병은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할머니를 감싸고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 했지만 장교는 얼굴이 확 굳어지며 권총을 빼냈다.

노부인은 경기를 일으키며 바닥에 주저앉았지만 장교는 개의치 않고 권총을 뽑은 채 뚜벅뚜벅 걸어갔다.

“패배주의는 즉결 처형이다!”

“대, 대위님!”

주변 민간인들이 놀라는 것에 아랑곳 않고 장교는 갑판에 주저앉아 벌벌 떠는 노부인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마지막 유언이 있….”

[탈출하는 독일 민간인들에게 알립니다. 독일 민간인들에게 알립니다.]

방송용으로 개조한 소련 공군기 몇 대가 하늘에서 또박또박한 독어로 선전방송을 시작했다. 권총을 겨누던 장교부터 말리던 수병, 주저앉은 노부인까지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고 붉은 칠을 한 채 떠 가는 소련기를 바라보았다.

“대공포반 위치로! 대공포반 전원 복귀하라!”

[우리 소련군은 독일 민간인들을 해칠 생각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소련군은 독일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입힐 생각이 없습니다. 탈출하는 피난민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가 없을 것을 약속합니다!]

피난민들은 웅성거렸다. 안 그래도 소련군은 도망치는 그들의 뒤편에다가 어떤 공격도 퍼붓지 않았다.

쾨니히스베르크 근교에서 온 사람들부터, 더 내륙방향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중 그 누구도 소련군의 민간인에 대한 잔학행위를 호소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소련이 민간인에게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 하는 것인가? 사람들은 그렇게 의심을 품었지만 서슬 퍼런 장교를 보면서 입 밖으로 그 말을 낼 만큼 간 큰 자들은 없었다.

전함은 대공포를 준비하고 발사를 위해 끼릭거리며 포탑을 돌렸지만 소련군은 마지막 하고 싶은 말을 남기고 다시 육지 방향으로 도망쳤다.

[피난민들 및 민간인들은 안전을 위해 베를린으로 가지 말아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알립니다. 피난민들 및 민간인들은 안전을 위….]

타타타타타타타! 전 함대가 대공포화를 쏘기 시작하자 폭음에 가려 소련군의 선전방송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민간인들이 저 말을 들었을 것임은 자명했다. 멍하니 선전방송기가 사라진 동쪽 하늘을 바라보던 장교는 빠득, 이를 갈더니 권총을 홀스터에 거칠게 쑤셔 넣었다.

“댁이 안 말해도 다 들었으니 그냥 없던 일로 칩시다. 너! 네놈도 괜한 일에 휘말리기 싫으면 아까 같은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닥에서 벌벌 떠는 노부인을 어린 수병은 일으켜 세우고 다시 짐보따리를 들려주었다.

“할머니, 잘 들어가세요.”

“고… 고마워유… 총각….”

함께 피난 온 이들은 서로 떨리는 다리와 마음을 부여잡고 후방으로, 후방으로 향했다.

베를린마저 안전하지 않다고 하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혹은 이 역시 소련의 공작이 아닐까? 사람들은 갖가지 의심을 했다.

군인들이라고 의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저들은 대체 왜 피난민들이 베를린에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인가?”

“….”

한 장군이 그렇게 질문을 던졌지만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저 그동안 했던 말을 반복할 뿐.

“생산인력이 될 수 있는 피난민들이 베를린에서 일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시 내에 불안을 선동하려는 수작일지도 모릅니다.”

“….”

이번엔 장군이 입을 닫았다. 정보부에서는 그런 해석이 주류였다.

그리고 주류였다는 것은 비주류 해석 역시 존재했다는 것을 함의했다. 정보부에서 쉬쉬하며 내놓은 비주류 해석은 조금 더 무서운 것이었다.

“소련군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신사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소련군이 저지른 것으로 보고된 민간인 대상의 전쟁범죄는 선전하는 것과 달리 극히 미미한 수준이며, 이는 이전 스탈린 서기장의 신사협정 제의와 함께 생각해 볼 때….”

분석전문가 하나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많은 사람들이 감히 적의 수괴를 상찬하는 그를 보며 도끼눈을 떴지만 전문가는 역시 전문가였다.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

“이 역시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일 수 있습니다. 베를린에 어떠한 무차별적 공격이 가해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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