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161화 (161/300)

# 161

161화

“명령이란, 절대적인 거야. 알아먹나?”

“예! 예! 국장 동지. 반드시 최대한 빨리 명령하신 과업을….”

“하, 요즘 놈들이란….”

베리야는 스탈린이 봤더라면 기겁할 만한 발언들을 무심하게 툭툭 내뱉으면서 하급자들을 닦달했다.

지난번 미국 첩보 관련한 건에 대해서는 결국 미국이 실질적으로 무언가 정보를 확인한 것이 아니며 첩보원들은 무사했다는 결론이 내려졌지만, 서기장이 잠시간이라도 분노했던 것은 확실했다.

더 많은 성과를 가져다 바쳐야 했다. 더 많은 권력을 위하여.

‘빌어먹을 주코프….’

장군들은 바르샤바를 함락시키고, 쾨니히스베르크를 포위하는 공적을 세우며 나치 파시스트들을 점점 압박해 가고 있었다.

그만큼 첩보 쪽에서 세울 공훈은 줄어들 터, 향후의 권력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었다. 군부 인사들을 여럿 숙청하는 데 앞잡이 노릇을 했는데, 만약 군부 인사가 결국 지존의 자리에 등극한다면?

몇 번이고 한 생각이었지만 등골이 서늘해졌다. 불안하면 할수록, 그는 평소대로 부하들에게 몇 번이고 반복해서 편집증적인 고함을 쳤다.

“우리 때는 말이야! 이렇게 명령하지 않더라도 다 알아서 처리하고 빠릿빠릿했는데 요즘 놈들은 왜 이리 제대로 된 놈이 하나도 없나?”

“송, 송구합니다!”

그의 말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튀어 나가는 젊은 직원들을 보며 베리야는 사디스틱한 기쁨과 편집광적인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겁먹은 초식 짐승처럼 펄쩍펄쩍 뛰는 하급자들은 그의 가학욕을 만족시키고도 남았다. 그는 소련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기관 중 하나를 한 손에 온전히 쥐고 있었으며 그의 권력은 이 강력하고 거대한 국가 내에서도 손에 꼽을 만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위에는 너무도 강력한 권력자가 있었다.

‘스탈린 서기장….’

서기장은 작금의 소련 내에서 현인신이라고 할 만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의 수족으로 명령의 집행에 가장 많이 관여하는 자 중 하나인 베리야는 그 끝없는 권력에 부려지는 동시에 권력을 탐했다.

자신의 권력에 취하면 취할수록, 흥분해야만 할 두뇌는 냉정하게 식어 가며 현실을 직시했다. 자신과 같은 강력한 권력자마저도 한갓 말단 직원처럼 부릴 수 있는 권력은 두뇌의 욕망중추를 맹렬하게 작동시켰다.

“보고서는 이게 전부인가?”

“아… 예! 그, 그렇습니다!”

“다시 써 와.”

욕망에 허우적거리느라 보고서를 제대로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하급자는 가타부타 그의 명령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다시 한번 권력의 맛을 만끽하며 베리야는 본인이 기다려왔던 보고서 뭉치를 하나 집어 들었다.

<미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 관련 정기 보고>

조금 다른 맛의 달콤함이 다시 그를 엄습했다.

‘하찮은 자들….’

그의 앞에서 보고서와 각종 자료들을 들고 오가는 하급자들을 보며 베리야는 입맛을 다셨다. 저들은 하찮았다. 당장 여기서 그가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이들을 마음대로 할 때는 권력의 맛은 달콤하기는 하여도 그다지 강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조종하고 가지고 노는 이들이 강대한 권력자일수록 달콤함은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듯한 강렬함으로 다가왔다.

FBI 국장, 소련군 연방원수, 그 정도는 되어야 장기판에서 가지고 놀 만한 좋은 졸이 될 수 있었다.

“존 에드거 후버, 1895년생. 1924년부터 미 FBI 국장을 역임.”

이렇게 소리 내어 읽으면, 그의 힘이 더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미국은 소련과는 다른 국가였다. 스탈린 동지는 1920년대에 트로츠키를 몰아내고 절대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동안 미국은 대통령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 격변 속에서도 이 에드거 후버라는 자는 자신과 같은 첩보기관의 장 자리를 지켜왔다. 어찌 보면 예조프의 대숙청 이후 발탁된 자신은 그에 비하면 한 수 아래인 것이다.

하지만 그 한 수 아래인 자에게 약점을 잡힌 기분은 어떠할까? 미국의 대통령들조차도 어찌하지 못하고 19년이나 집권을 허락한 강대한 권력자는 이제 내 손에서 놀아나는 장기말이 되었다!

“흐흐흐흐훗후흐흐….”

차마 숨기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찌 보면 서기장 동지는 참 신묘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난리가 터졌다는 말을 듣고는 조사를 지시하고, 또 FBI 국장의 약점을 잡으라고 명령을 내린 것은 서기장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명령하면서 어찌 알았는지, 어디서 수집한 정보인지 정확하게 그자의 약점을 알아맞혔다.

‘그자가 호모일 줄이야…?’

FBI 국장이 동성애자라는 첩보가 있으니 그쪽으로 파 보면 무언가가 나올 것이라고 서기장 동지는 교시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부국장과 동성 연인 사이인 데다가 어린 소년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즐긴다는 것을 NKVD의 첩보원들은 확인할 수 있었다.

동성애를 ‘자본주의적 타락의 상징’으로 여기는 소련이나, 혹은 ‘신의 천벌을 받을 짓’으로 여기는 미국이나 그런 짓은 용납될 수 없었다.

베리야는 혀를 쯧쯧 차면서도 입수한 증빙들의 사본을 들여다보았다. NKVD가 특별히 투입한 소년들은 후버의 다양한 ‘변태 행각’에 대한 증거를 확보했다. 이 사본들을 전해 받은 후버는 평소처럼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감히 자신의 약점을 잡으려 한 불나방들을 징벌하려 했지만….

“푸하하하하하하핫!”

깜짝 놀란 채로 내린 허술한 명령 따위에 소련의 첩보기관이 돌파당할 리 없었다.

후버는 상당히 당황했었고, 그의 수사지시는 별 볼 일 없었다. 협박 따위로 정치인들이나 영화배우들, 혹은 뒷골목 깡패들을 상대하던 자 따위쯤이야.

차르의 비밀경찰들과 총격전, 첩보전을 벌이고 반대당의 정치깡패들을 처리하고, 물리적으로 당파 단위의 청소를 감행하던 그의 경륜 앞에 후버 같은 자들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베리야는 연신 흐뭇한 웃음을 터트렸다.

여기에 쏠쏠한 추가 수입도 있었다.

후버라는 자는 자기의 권력을 이용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포르노 컬렉션을 만들었다. 수사 과정에서 압수하거나 드러난 내용들을 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모은 모양인데 베리야는 고스란히 그 자료들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불콰한 욕망이 솟구치며 벗겨진 이마에 번들번들하게 땀이 흘렀다. 그의 성벽 역시 후버만큼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용납되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슬며시 손을 아래로 내려 아랫도리를 주물럭거리며 그는 상상했다.

뭐 아무튼, 그 자신에게 별 쓸모는 없겠지만 서기장 동지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 절대권력을 가지고도… 불능이라니….’

스탈린 서기장은 그가 알기로 꽤 오랜 기간 불능이었다. 노화와 신체적 원인으로 인한 것이니 포르노 컬렉션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첩보부가 군부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 권력자가 원하는 가장 내밀한 것까지 파악하고 제공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서기장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개전 이후의 급격한 변화 때문에 정확히 알기는 어려웠다. 그가 수십 년간 알아 온 서기장은 뭔가 확실히 달라졌다.

그만큼, 뭔가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했다.

똑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그의 충실한 부하, 세르게이 크루글로프가 문을 빼꼼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국장 동지, 아드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혹시 다른 업무가 있으십니까?”

“아닐세, 들어오라 하게.”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의 아들, 세르고가 문을 열고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그의 입꼬리는 어느새 다른 흐뭇함을 띄고 올라가 있었다. 자신의 아들인데, 어떻게 저렇게 잘생겼단 말인가?

훤칠한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에, 제 엄마를 닮아 그윽하게 깊은 눈까지.

“어이 아들.”

“예?”

“넌 누굴 닮아서 그렇게 잘 생겼냐? 하하하하하하!”

기분 좋게 웃는 아비를 보며 아들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베리야는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제 아비와 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아비로서 기쁘지는 않았을 테니. 세르고는 제복의 가슴팍을 뒤적거리더니 종이 몇 장을 턱, 베리야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더 이상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아버지.”

“…다 널 위한 거란다. 어디 한번 볼까?”

부모다운 상투적인 말을 건성으로 내뱉으며 베리야는 기다렸다는 듯 종이뭉치를 집어 들었다.

흥분으로 숨이 가빠지고 땀이 나는 것을 과연 아들은 알까? 베리야는 왠지 모를 배덕감에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

흘끗 곁눈질한 세르고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세르고는 자신과 같은 모략가, 첩보관이 아니었다. 제 어미를 닮아 잘생긴 외모처럼 적성도 공학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베리야는 아들이 그저 공학자로 살다 조용히 끝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흐으음… 아주 좋아. 좋아.”

“…다 되셨으면 가 봐도 될까요?”

흐흐흣, 어쩐지 우스웠다. 아들은 착했다.

착해 빠져서 아비가 시키는 일은 곧이곧대로 하고, 당장 박차고 뛰어나가도 될 곳을 나가고 싶어 하며 끝까지 아비에게 물어보는 저 순진함이란.

그래서 스베틀라나가 반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가 보거라. 아!”

“…?”

“너 용돈 필요하지 않니?”

“…아뇨, 됐어요.”

정보료 겸, 신념을 꺾는 대가 겸, 스베틀라나와의 데이트 비용 겸하여 얼마간이라도 돈을 주려 했더니 세르고는 끝까지 받지 않았다.

강요해서 한 행동을 가지고 보상을 주는 것은 그의 경험상 신념을 꺾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의 아들은 자기 마음을 더럽힌다고 생각하여 끝까지 아비가 주는 ‘용돈’을 받지 않았지만.

어차피 제 어미를 통해서 들어가니 이러나저러나. ‘여자친구’의 비밀 일기장을 첩보국장에게 고해다 바치면서 끝까지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는 아들은 귀여웠다. 꼬물거리던 것이 어제 같은데…

“아들, 너무 그러지 마라.”

“그럼 시키지를 마시던가요?”

“너는 소련에서 태어났지. 난 짜르의 제국에서 태어났고. 많은 소련인들이 짜르의 제국에서 태어났다.”

몇 번이고 반복한 말에 세르고는 질렸다는 듯 문고리를 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베리야는 이 말을 반복하는 것이 즐겁다는 듯 듣는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않으며 노래하듯 이야기했다.

“짜르의 제국은 언제든 이 땅에 되돌아올 수 있어! 야코프와 바실리가 죽은 이상 그 권좌가 누구의 것이 될지는 모르지. 제국에서 부마가 황위를 계승한 적은 없지만 여기는 그래도 제국이 아니잖냐?”

“….”

노골적인 그 말에 세르고는 손을 떨었다.

아비는 자신의 욕망을 항상 저렇게 이야기했다. 그는 소련의 최고권력자가 되고 싶어 했으며 그 수단으로 아들과… 스베틀라나마저 사용하고자 했다.

“난 너와 나를 위해서 앞길을 치워 주는 거란다. 아무도 우릴 막지 못해.”

부됸늬도, 주코프도, 아니면 저기 바다 건너 미국인들도.

흐흐흐, 제 흥에 겨워 음습한 웃음을 터트리는 아비를 뒤로하고 아들은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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