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158화
“이제 나치 독일의 패망과 바르샤바의 해방이 가까워졌습니다. 우리가 이 국면에서 폴란드의 자주독립을 얻어 내기 위해서는….”
폴란드 망명 정부의 무슨 무슨 고관이라 했던 자는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그 말을 관심 깊게 듣는 사람은 적었다.
‘폴란드 망명 망명 망명 정부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우리에게 쓸모가 있는가?’
사람들은 농담삼아 망명정부를 망명 망명 망명 정부라 일컬었다.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분할 이후로 프랑스로 망명했던 그들은 프랑스가 독일에게 단 6주 만에 점령당하자 다시 영국으로 망명했다.
영국마저 나치의 마수 아래 떨어지자 그들은 영국 정부와 함께 캐나다로 다시 망명했다. 몇 번이고 살길을 찾아 도망 다니는 과정에서 그들은 근거지와 대부분의 지지자들, 그리고 병력을 상실했다.
나치의 잔혹한 토벌작전 앞에서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탈출하지 못한 병력들은 학살당했다. 소련은 자기네들이 포로로 붙잡고 있던 폴란드군에게 전향을 강요해 ‘폴란드 공산당’이 이끄는 20만 폴란드 야전군을 구성했다.
고작 2개 사단 병력뿐인 자유 폴란드군은 말 그대로 힘이 없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미국 국무성의 관료들은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당장 미-영 연합군은 영국 본토조차 수복하지 못하는 상황. 몇천 킬로미터나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폴란드 땅 쪼가리에 관심을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었다.
“저희 자유 폴란드군을 무장시킬 무장을 지원….”
“그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미국은 상황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세계 지도 위에 베를린-도쿄 추축에 대항하는 ‘강대국’은 4개가 있었다. 미국, 소련, 영국, 그리고 중국.
그리고 저 4개의 강대국이 모두 대등한 위치인 것도 아니었다. 영국은 본토를 상실하고 산발적인 봉기를 일으키거나, 간신히 살려서 빼낸 함대로 크릭스마리네와 일본 제국 연합함대를 상대하는 데 거들 뿐이었다.
중국 역시 일본 육군을 막아 내는데 허덕이며 발버둥 칠 뿐이었다. 중화민국에 파견된 미 육군 중장 스틸웰은 매일 장개석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장개석과 그의 정권은 부패했으며 일본과의 항전보다는 미국이 보내주는 물자 지원에 더 관심이 많다며!
미국과 대등한 유일한 강대국이자 동맹국은 소련뿐이었다. 수백만의 인명을 희생해 가며 전 유럽을 상대로 일전을 치르며 독일을 몰아붙이고, 이제 일본마저 함께 징벌하겠다고 선언한 최고의 동맹국.
그 동맹국의 심기마저 거슬러 가며 폴란드를, 과연 미국이 지원할 명분이라도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소련 대표부와 상의하십시오. 폴란드 정부의 ‘바르샤바 봉기군’을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쪽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망명정부의 관료들은 어깨가 축 처져 돌아갔다. 미 국무성의 동유럽 담당관은 보고서에 적어 내려갔다.
[폴란드 ‘망명정부’의 승인을 취소하고 폴란드 인민정부를 새로 승인하는 건에 대하여]
* * *
소련과 폴란드는 역사적 악연으로 인하여 빈말로라도 사이가 좋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러시아는 제국 시절부터 폴란드를 분할해 지배했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이후 폴란드는 잃어버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시절의 영토를 되찾겠다며 적백내전에 개입, 신생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했다.
소련 역시 반격해서 바르샤바 앞까지 진군했다가 패퇴하고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 일부 영토를 내주어야 했다. 이에 칼을 갈던 소련은 다시 독일과 짜고 폴란드를 분할했고.
이제 소련은 폴란드를 아예 영향권 내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었다.
“폴란드 인민 공화국 만세! 해방군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민스크 해방 이후 진격해 온 소련군은 르보프, 루블린, 비아위스토크 등 폴란드인이 다수 살고 있는 도시들을 해방시켰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그리고 사악한 파시스트들을 무찌르기 위해 소련군 휘하 폴란드 해방군에 입대했다.
소련은 이들을 위한 장비와 물자 제공을 아끼지 않았다. 무슨 속셈이 있는지 보이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청년들은 맹세한 바 있었다.
“독일 놈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악마와도 손을 잡겠다!”
“미국도, 영국도 우리를 버렸다. 소련이라도 도와준다면, 우리는 소련 편을 들겠다!”
일부 열렬한 사회주의자들, 민족 해방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와도 손을 잡겠다는 사람들, 독일군에게 가족 형제들이 학살당한 이들.
그 모두가 소련군 휘하에 입대했다. 러시아 내부의 폴란드계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폴란드계까지 모조리 편제된 야전군은 이제 20만 규모, 3개 기갑군단을 휘하에 가지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전투의지에 불타는 이들을 선봉으로 소련군은 진군했다.
비스와강을 향하여.
* * *
바르샤바에서는 이제 소련군의 포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애써 시가지에서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시민들의 흥분은 막을 수 없었다.
“거기 청년이여, 총칼을 들라!”
“여명은 밝아 온다, 바람은 불어온다. 새로운 폴란드의 승리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소련군의 대규모 항공 투하를 시작으로 바르샤바 봉기는 시작되었다.
이미 봉기군은 소련군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바 있었다. 5만여 명의 봉기군은 극도로 무장 및 장비가 부족했지만 이들이 향후 ‘폴란드 인민정부’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전제하에 스탈린은 무장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아! 저기다! 저기!”
“무장 캡슐이다!”
소련군의 폭격기가 바르샤바 하늘을 날았다. 흰 낙하산을 줄줄이 내뿜으며. 낙하산에는 상자가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각 상자 안에는 소총이며 탄약, 수류탄 등 보병들이 사용할 수 있는 화기가 대량으로 들어 있었다. 수만 명이나 되는 봉기군을 생각한다면 부족할 법도 했지만, 아무튼 하늘을 가득 메우는 흰 낙하산은 무한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사전에 준비한 장비들 역시 독일군을 향해 불을 뿜었다.
투타타타타타 타타타타! 기관단총이 골목 사이를 이동하는 독일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독일군 분대는 혼비백산하며 흩어져 각자 엄폐했다.
“폴란드 해방 만세! 이거나 먹어라!”
“으아악! 엎드려!”
쾅! 수류탄 한 발이 데구르륵 굴러오는 것을 본 독일군들은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바닥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파편이 튀고, 다시 기관단총의 총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르샤바 내의 지리는 현지인들이 훨씬 잘 알았기에 독일군들은 신출귀몰한 봉기군에게 농락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부비트랩이 터지고, 폐건물인 줄 알았던 곳에서는 기관총이 날아와 독일군을 찢어발겼다. 레닌그라드, 스몰렌스크, 민스크의 악몽을 겪은 독일군은 시가전이라고 하면 치를 떨었다.
여유만 좀 있었더라면 봉기군에게는 없고 독일군에게는 있는 야포와 탱크를 가져와 시가지를 하나하나 자근자근 밟아 버렸겠지만, 독일군은 여유가 없었다.
도시 외곽에서는 소련군, 그리고 그들 휘하의 20만 폴란드 야전군이 점점 포위망을 조여 오고 있었기에.
바르샤바를 수비하는 7만여 독일군은 내부의 봉기와 외부의 공세를 함께 처리해야 했다.
* * *
쾅! 쾅! 쾅!
소련군의 중포가 불을 뿜었다. 겹겹이 참호와 벙커를 구축하고 눌러앉은 독일군을 제거하는 데 별 효과는 없었지만, 독일군 기동병력의 기동을 저지하는 데에는 꽤나 효과가 있었다.
또, 벌써 수천 명의 독일군 병사들은 쉘 쇼크를 앓고 있었다. 그들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자극하고, 병사들의 정신을 깎아 버리는 데에는 소련군식의 융단 포격이 제격이었다.
참호를 돌파하는 데에는 다른 무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전차다! 퇴각하라! 제기랄.”
강폭이 좁은 곳에는 도강용 부교들이 몇 개씩이나 설치되었다. 이미 비스와강의 최상류 부분은 소련군에게 점령당했다.
그 점령당한 부분에서 부교를 반조립한 소련군은 배를 타고 강을 내려와 기다리고 있는 기갑부대 앞에 부교를 설치해 주었다. 강이라는 천연의 방어물을 믿고 기관총탄을 퍼붓고 포격을 쏘다가 갑자기 기갑부대의 진격로가 생기자, 독일군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기 시작했다.
“아니, 우리 포병대는 뭐 하는 거야! 제기랄….”
“저쪽 포병대랑 싸우고 있겠지….”
물론 포탄 한 방이면 부교는 산산 조각나 부서졌다. 적당히 빗맞히더라도 뒤집어 버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포의 여유가 없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는 이제 슈투카의 것이 아니라 불곰의 것이었고, 시체를 찾아 숲을 배회하는 불곰처럼 그들은 포병의 발사광만 보이면 하늘에서 강하해 포대를 습격했다.
“으아아아악!”
타타탁, 타타탁 타타탁. 집속폭탄에서 터져 나온 작은 자탄들은 견인포를 끌고 다니는 트랙터나 포 자체, 아니면 그 포를 운용하는 병력들을 학살하기에 충분했다.
오히려 이쯤 되면 부교가 미끼처럼 보일 정도로, 소련군 항공기들은 집요하게 독일군의 지상 포병들을 습격했다.
그리고 그동안 소련군 기갑부대는 파죽지세로 진군했다. 방어선을 돌파하여, 서쪽으로, 서쪽으로. 참호에 틀어박혀 있던 독일군 병력들은 전차에 탑재된 기관총과 고폭탄으로 정리당했다.
“하나, 둘… 셋!”
캉! 캉! 날카로운 포성과 함께 매복해 있던 독일군의 대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하지만 마침 부됸늬 전차는 포탑을 돌리던 와중이라 포탄은 도탄되어 튕겨나왔다. 포탑 설계 면에서 부됸늬 전차는 반구형이라는 새로운 설계를 채택했기에 어지간한 각도에서는 관통이 어려웠다.
“11시 방향 거리 500!”
“고폭탄, 장전 즉시 발사!”
무거운 대전차포를 인력 견인해서 전차의 반격을 피하려던 보병들은 결국 100mm 고폭탄 한 방에 전장의 희생양이 되었다.
깡 소리를 내며 대전차포의 탄이 적중할 때만 해도 기겁하던 소련 소총병들은 전차가 긁힌 자국 외에는 무사하자 함성을 터트렸다.
“우라! 우라!”
“전차는 무사하다! 돌격하라!”
대전차포가 부디 전차를 터트려 버리고 주위 소총병들도 같이 휩쓸어 버리기를 기대하던 독일군 보병들은 후퇴해야만 했다.
독일군의 장기이던 제병협동은 이제 소련군이 더 잘 구사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제병협동을 구사하고 싶어도 공군과 포병이 쌍으로 박살 나는 바람에 도무지 정교한 전술을 뽐낼 방도가 없었다.
여기에, 소련군에서 두 번째로 사기가 높은 부대인 폴란드 야전군의 몸을 사리지 않는 맹렬한 공세가 더해졌다.
“퇴각하라! 퇴각!”
“다음 방어선으로 향한다!”
물론 독일은 모델 원수의 명령하에 구축된 겹겹의 방어진지를 바탕으로 최대한의 지연전을 펼쳐 나갔다.
이 방어선이 돌파당한다면 다음 방어선에서, 그 방어선도 돌파당하면 또, 또 다음 방어선에서.
그러는 와중에 공명심에 불타거나 적을 과소평가해 너무 깊숙이 진격한 소련 기갑부대는 역포위당해 파쇄당하며 독일군 전차의 킬마크가 되었다.
공세와 역공, 공지전과 기갑전, 보병간의 시가전, 복합적이기 그지없는 전투가 바르샤바를 놓고 벌어졌다.
독일 지휘부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역량을 쥐어 뽑아 투입하는 와중, 소련군은 비장의 카드 하나를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