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155화
소련군이 모델 원수 때문에 뒷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모델은 몰랐다.
아니, 그 자신부터가 소련군 때문에 역으로 뒷목을 잡고 있었다. 작금의 소련군은 단 2년 만에 순식간에 오합지졸에서 역전의 강군으로 탈바꿈했다. 41년 6월 그가 겪었던 그 약졸들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다고 미리 알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소련에 쳐들어오면 안 됐지.’
혹독한 전쟁 속에서 독일군이 가지고 있던 정예병들은 소모되어 전장에서 사라졌다. 팔다리가 잘리고 눈 하나가 없는 이를 현역병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나마도 베테랑이 부족하다는 명목으로 후근부대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거나 서류를 다루는 일로 전속시키고,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사지 멀쩡한 행정병이나 참모들을 일선으로 끌어내야 했다.
물론 그 정도에서 끝나지도 않았다. 모델은 얼마 전 장병 위문을 위해 병원에 시찰을 나갔을 때를 떠올렸다.
“발터? 발터 모델?”
“누가 감히 원수 각하 이름을 함부로 부르나!”
병실을 도는 와중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병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이 확 쏠렸다. 그 끝에는 늙수그레한 부상자 하나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모델 원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그의 얼굴에 모델 원수는 눈을 찌푸리고 그의 얼굴을 유심히 훑었다.
“나 한스 뮐러다! 나움부르크 돔김나지움의 한스! 발터, 네가 이렇게 됐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구나!”
“저… 저놈이!”
주위 참모들과 호위병들은 발끈했지만, 자기 모교의 이름을 들은 모델은 그들을 저지시켰다. 그리고 끝내 어린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을 뒤져낸 끝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그를 알아보기 더 어렵게 했었지만.
“선생님? 한스 선생님?”
“그래! 발터 너 맞구나!”
60대 노인은 어느새 그 당시의 자신보다 한참은 늙어 버린 제자를 바라보았다. 모델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선생님은 지난 대전에도 나이가 많으셔서 안 가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옛 은사를 포옹하러 달려간 그는 지극히 어색한 상황에 처하고야 말았다. 씁쓸하게 피식 웃는 선생님의 헐렁한 오른쪽 소매는 반가운 제자를 향해 뻗어올 수가 없었다. 한스 선생님은 잠시 뭐라 말할지 곱씹다가 툭 하고 내뱉었다.
“나라에 바치고 왔다.”
“….”
눈물이 핑 돌았다. 목이 메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모델은 말없이 한참이나 늙어 버린 옛 선생을 와락 끌어안았다.
주변 사람들 역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스승과 제자가 병원에서 감동의 해후를 하는 것은 충분히 신파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그 제자가 50대 야전 원수요 스승은 60을 훌쩍 넘긴 노인이라면 이것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젊은이들은 모두 죽어 없어지고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전쟁에 끌려 나오는 이 전쟁이란.
* * *
“신문에서 종종 보기는 했는데 동명이인이겠거니 했다. 직접 보니까 좀 알겠구나.”
“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김나지움에 다니던 내성적인 선생님 집 아들은 어느새 역전의 백전노장이 되어 있었다. 보고서도 도무지 못 믿겠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한스 선생은 어색한 손놀림으로 커피를 한 잔 더 따랐다.
“후방에서는 커피도 한 잔 마시기 어려워. 이게 얼마 만에 마시는 제대로 된 커피인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각설탕과 크림을 커피에 듬뿍 털어 넣었다. 모델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후방에는 지금 모든 물자가 부족했다.
영국을 몰락시키고 해운로를 뚫기는 했지만 국가 재정이 적자인바, 정권은 국민들에게 전쟁 국채를 살 것을 강제했다. 입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외화는 가격이 폭등한 전쟁 물자를 사들이기 위해 징발되었다.
그마저도 부족해 군수생산에는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지만. 동부전선 총사령관으로 그쪽 자료를 들여다보기 시작한 모델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그런데… 선생님 나이가 몇이신데….”
“허허, 나라가 나오라니 나와야지. 우리 집에 군인이 없다고 끌고 온 것 같아. 손주 녀석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걱정인데….”
“예? 선생님 아드님 있지 않으셨습니까?”
“…전사했어.”
아차, 괜한 것을 물어보았다는 생각에 모델은 흠칫했다. 선생님은 눈을 지그시 감고 오래간만에 마시는 진하고 달콤한 커피의 맛을 음미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모델은 진하고 씁쓸한 죄책감을 가득 맛보아야 했다.
“그나저나 너희 총통은 대체 무슨 생각이라느냐? 그런 거나 만들고.”
“예? 무엇 말씀이십니까?”
“그, 그거 말이야. 그… 대공포탑?”
* * *
“그게 뭐가 문제인가? 전투기가 부족하다면 그런 수단이라도 사용해야 하지 않겠나?”
“예, 예, 물론 그렇습니다 총통 각하. 다만….”
근래 들어 총통에게 이견을 제시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 총통이 가지게 된 절대 권력에 한 마디라도 이견을 제시했다가는 ‘공장’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는 공포가 사람들을 지배했다.
공포의 통치, 그 단어가 작금 독일을 가장 잘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는 이들도 어느 구석엔가 양심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중대한 전쟁 범죄입니다….”
“범죄? 지금 범죄라고 했나!”
히익! 총통의 목소리가 올라가자 다들 움츠러들었다. 용맹한 자들은 이미 질려서 제 발로 걸어 나가거나 모함을 받아 숙청당했다.
모델 원수는 동부전선을 총괄하느라 너무 바빴고, 후방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총통에게 진언할 수 있는 자들이 모조리 사라진 이상 그를 멈출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범죄는 승리자들이 규정하는 것일 뿐. 우리가 승리한다면 역사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했던 정당화할 수 있어! 저들이라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겠나? 하지만 승리하고 난 이후 누가 그따위 것을 기억하겠나!”
역사 앞에서 너무도 오만한 총통의 말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미 지난 전쟁에서 독가스를 비롯한 화학무기를 겪어본 이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악몽 같은 참호전이 다시 되풀이되는 것인가? 그 외에도, 총통은 ‘SS 방역대’가 개발하는 생물학 무기도 최대한 빨리 실용화할 것을 명령했다.
“시간을 끌면 우리가 승리한다! 시간만 조금 벌면 된단 말이다!”
“….”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총통은 계속 ‘열등 인종’들을 지워버릴 초대형 폭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홀려 수천만 마르크, 어쩌면 수억 마르크에 이르는 예산을 투자했다. 아조레스를 빼앗기고, 전투기가 없어 본토가 공습당하고, 광대했던 육군의 점령지를 대부분 빼앗기고 원 국경 이전까지 밀릴 정도로.
그러면서도 총통은 시간이 조금만 더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드디어 총통의 이지가 흐려진 것인가….’
한때 신묘한 귀책으로 프랑스와 영국을 농락하고 대양의 패권을 휘어잡게 해 주었던 예언자, 독일 민족의 지도자인 총통은 더 이상 없었다. 늙어 죽어가면서도 불로불사의 엘릭서에 집착하는 노쇠하고 무능한 왕을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모두가 장광설을 토하는 총통을 응시했다.
“또 불만이 있나?”
“그… 그렇다면 대공포탑에 배치하는 포로들이라도 내리게 해 주십시오! 이는 포로 학대일 뿐만 아니라….”
“에잇, 시끄럽다!”
사람들을 경악시킨 것은 사실 생화학무기의 생산 명령이 아니었다.
총통은 명령을 내려 적의 공습으로부터 도시들을 방어할 대공포탑을 짓게 했다. 수많은 시민들을 동원해 그렇게 포대를 짓고 나니 포탑 역시 적의 공습에 완전무결한 방호력을 갖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
철근과 콘크리트가 부족하기에 허술할 수밖에 없는 이 포탑을 가지고, 총통은 그 위에 포로들과 유태인들을 묶어둘 것을 지시했다. 사람들, 특히 전우들이 고기 방패로 묶여 있는 대공포탑에 전투기들은 함부로 공격을 가하지 못했다.
시범적으로 고기 방패를 배치했던 몇몇 포탑에서 어느 정도 성과가 있자 총통은 모든 포탑이 의무적으로 얼마간의 ‘범죄자’들을 배치할 것을 명령했다.
그 범주에는 아직 ‘공장’에 가지 않은 유태인들이나 강제노역에 부적합하다고 판단을 받은 소련군 포로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차피 식량이나 축낼 뿐인 버러지들 아닌가? 분명히 악의를 가지고 사보타주를 저지른 자들만 배치하게 된 것이잖나!”
“하지만 국민들의 사기 문제가….”
“그놈의 패배주의! 패배주의를 선동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이제 전쟁 범죄니, 도덕이니 하는 말은 총통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은 침묵을 선택했다. 국민들이 그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아 사기가 낮아질 수 있다는 반박에 대해서는 패배주의라는 마법의 낙인이 찍혔다.
씩씩거리는 총통의 축객령을 듣고 모두들 회의실을 나섰다. 대부분이 무언가를 해 볼 희망을 버린바, 회의는 사실상 요식행위나 다름없었다. 총통의 독촉과 명령을 하급자들에게 전달하는.
근래 이런 회의 이후엔, 총통은 항상 하이젠베르크를 불러내곤 했다.
“박사, 박사, 제발… 얼마나 남은 거요!”
“총통 각하, 제발 1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근래 들어 페르비틴을 더욱 많이 복용하게 된 총통은 눈에 핏발이 선 채 발작적으로 고함을 치고 발을 구르며 땡깡을 부렸다. 비서관들과 호위병들이 애써 총통의 몸에 손을 대 가면서까지 진정을 시키고 나면 하이젠베르크의 차례였다.
“각하, 각하의 명령에 따라 저희 연구소의 모든 인력들은 최대한의 노력과 열성으로 프로젝트 슈판다우의 조기 완료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더 많은 시간이 없다면….”
“1년은 너무 늦어! 저 빌어먹을 열등 인종들이 언제 베를린으로 밀려올지 모른단 말이다! 벌써 독일 제국 내에 폭격이 떨어지는데… 으허허허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각하!”
총통은 아예 울부짖는 것 같았다. 이 편집증적인 광기를 호위병들은 질린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한 1년간 이런 꼴을 보다 보면 그럴 법도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그때마다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는 이야기밖에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알았네… 알았어… 제발… 조금이라도 빨리 개발하게… 우리는 어떻게든 더러운 열등 인종들이 몰려오는 걸 막아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각하!”
“독가스와 세균이 있다면 아마 잠시간은 저들을 막을 수 있을 것이야…. 박사는 연구개발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해!”
하이젠베르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신문을 통해 일본에서 과학자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한데 그것을 독일도 하고 있었다니?
물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것이 없었다. 총통에게 충고하고 조언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많았을 테고, 그들이 말했음에도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와 같은 일개 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하일 히틀러!”
“하일 히틀러!”
총통의 집무실을 떠나며 나치식 경례를 올린 하이젠베르크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의 등 뒤에 박히는 모든 눈초리들이 두렵기 이를 데 없었다.
“아빠!”
“아바, 아바!”
“어? 여보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내내 야근에 밤샘을 하다가 갑자기 일찍 집에 돌아온 아빠를 보고 그의 아이들과 만삭의 아내가 다들 달려 나왔다. 그는 벌써 5남매의 아버지였고, 아이들은 그동안 못 본 아버지의 관심을 위해 그에게 와글와글 달라붙었다.
“얘들아… 잠시만, 잠시… 리자! 내 만년필을 가져다주겠소?”
“알겠어요. 당신 무슨 일 있어요? 급한 것 같은데….”
그리고 실제로도 급했기에 하이젠베르크는 후다닥 자신의 서재로 달려 들어갔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금고 앞에서 두 번이나 비밀번호를 틀린 그는 심호흡을 하며 와들거리는 손으로 비밀번호를 맞추었다.
“여보, 대체 무슨 일이길래….”
“잠시만! 잠시만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두겠나?”
그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버럭 고함을 친 하이젠베르크는 금고 안의 편지뭉치를 꺼내 들고, 아내가 준 만년필을 집어 들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뭉치에는 혹시나 그가 접선하고자 할 때 연락해야 하는 곳과 그 방식이 적혀 있었다. 그는 천천히 편지에 쓰여 있는 방법을 곱씹으며 하고 싶은 말을 쭉 적어 나갔다. 물론 하이젠베르크의 뛰어난 두뇌는 편지에 들어 있는 암호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이 그를 따라오지 못할 뿐.
몇 번이나 손이 떨려 글자를 잘못 쓰고 찍찍 그으며, 하이젠베르크는 편지 한 장을 완성했다.
“아… 그리고 추신을….”
P.S…. 무어라 적어야 하나….
“VIP는… 끔찍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후우. 간신히 편지를 완성한 그는 제대로 마르는 것도 보지 않은 채, 편지봉투에 황급히 종이를 쑤셔 넣었다.
마지막으로 벽난로에 그동안 받은 편지뭉치를 휙 던져넣은 하이젠베르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던 아내에게 말했다.
“난 편지 한 통을 부치고 오겠소. 당신은….”
“네?”
“당신은 최대한 빨리 짐을 싸시오. 당신 부모님께도 연락드리고… 귀중품만 챙기시오.”
며칠 지나지 않아 편지가 도착했다. 건장한 남자 두 명과 함께. 그들은 흠잡을 데 없는 독일어로 하이젠베르크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박사님. 준비는 되셨습니까?”
“여보, 이건 대체….”
“날 믿어 주시오. 빨리 갑시다.”
하이젠베르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 스스로가 만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독일은 소련보다 훨씬 늦게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라는 것도.
결코 핵무기가 사용되는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독가스와 세균전을 시도한다는 총통의 말을 듣고 그는 직감했다. 대대적인 보복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치 정권은 이미 선을 넘어도 넘은 지 한참이 되었다.
대공포탑에 포로를 매달아 놓고 공습을 막아 보려는 것 자체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막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이젠 천벌이 내릴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도피행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