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154화
“이 새끼들이 제 누이를 강간하고 죽였습니다! 열네 살짜리를요!”
“…자네의 그 마음은 잘 알겠으나 이는 명백한 전쟁 범죄일세.”
“전쟁 범죄는 이놈들이 먼저 저지른 것 아닙니까?”
정치장교는 씩씩거리며 포로들의 머리통에 권총탄을 박으려던 병사 하나를 제지하고 점잖게 만류했다.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대부분 지역이 해방되며 새로 입대한 병사들은 불타는 복수심으로 독일군에 대한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주로 파르티잔 출신이거나, 수용소를 탈출해 소련군에 입대한 이들은 독일군이 저지른 만행을 가장 오래, 가장 많이 보아 왔다. 포로 학대, 민간인 학살, 부녀자 강간 등을 눈뜨고 지켜보아야 했던 그들은 모든 독일인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네들은 그럼 저들과 똑같이 될 참인가? 소비에트 연방은 그런 범죄자들은 용납하지 않네. 그것이 적군이든….”
“정치위원님!”
“혹은 아군이든.”
정치위원은 포로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던 병사의 머리에 자기 권총을 겨누었다. 그 서슬 퍼런 눈빛에 병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총을 거두었다.
눈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흉측하게 화상에 덮인 그 얼굴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평소 병사들에게 존경을 받던 그 정치위원이 말했기 때문일까?
“똑같은 인간이 되지 말게. 우리는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를 위해서 싸우는 거고, 그것을 잊는다면….”
저렇게 될 뿐이지. 정치위원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본연의 임무로 복귀했다.
“자! 편지를 쓸 사람은 내게 오게나. 핫 초콜릿도 한잔하지.”
* * *
중전차가 없는 대부분의 전장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을 압도했다.
소련의 휴대용 대전차로켓을 베낀 ‘판처파우스트’ 같은 물건을 전장에 배치하기는 했다. 하지만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자, 하나, 둘….”
“셋!”
휘유우우우웅, 말 그대로 코앞까지 다가온 소련군 전차에게 판처파우스트를 발사했지만, 장비가 부족해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해서인지 저 집채만 한 전차를 빗맞히고 말았다.
“으아아아아악!”
“도, 도망가라!”
그리고 되돌아온 것은 기관총과 자동소총의 총탄 세례. 애초에 방어용으로 철망으로 된 대 로켓탄 장갑을 부착하고 있었기에 어지간히 잘 맞힌 것이 아니라면 격파조차 하지 못했겠지만.
판터와 티거 같은 중전차들은 비쌌다. 말단 보병들 수십, 수백 명을 무장하고 훈련시킬 수 있는 비용을 독일군 수뇌부는 전차 한 대를 위해 털어 넣었다.
거의 100만 제국마르크에 이르는 신형 전차들은 3호 전차나 4호 전차에 비하면 대여섯 배는 더 나갔다. 티거 한 대를 생산할 돈과 인력과 자원이면 4호 전차를 6대쯤 일선에 배치할 수 있었다.
그랬다면 기갑부대의 지원을 받지 못해, 보병이 일방적으로 소련군 전차부대에 박살 나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럴지도 모르는 수준이었지만.
“자, 철갑탄 장전!”
“파시스트 놈들, 이거나 먹어랏!”
4호 전차나 3호 전차를 잡는 데에는 굳이 부됸늬 중전차를 데려올 필요도 없었다. 중전차들은 방어선의 가장 강력한 부분을 깨부수고 쭉쭉 전진했고, 쪼개진 잔해들을 격멸하는 데에는 85mm 급으로 업건된 T-34가 투입되었다.
“T-34에도 밀리는 4호 전차가 몇십 대가 더 있다고 해도… 별 차이는 없었을 것입니다.”
기갑전의 최고 이론가 구데리안은 그렇게 촌평을 남겼다.
이미 수적으로 압도당한 상황에서 4호 전차는 변수를 창출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전차병들의 소모 역시 훨씬 증가했으리라, 참모부는 그렇게 예상했다.
그래서 제3제국의 모든 자원과 기술력을 짜내어 신형 중전차를 개발했지만 이것 역시 문제가 있었다.
반강제적으로 일당백을 강요당했기에 압도적인 공격력과 수비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 낸 슈퍼 전차의 엔진과 설계는 독일의 기술력으로도 한계가 많았다.
총통이 명령한 것처럼, 그들은 전차의 고장과 연료 부족 등으로 후퇴하지 못하고 결국 옥쇄했다. 퇴각하는 아군 보병들을 엄호하면서, 그 압도적인 체구를 토치카로 활용하면서, 하나하나 소모되었다.
“당신네들은 먼저 후퇴하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후퇴를 엄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잇….”
거대한 전차는 육중한 체구를 주저앉힌 채 포를 펑, 펑 쏘아댔다. 빗발치는 소총탄 정도로는 두꺼운 장갑에 흠집이나 내고 그쳤기에 소련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전차 뒤편으로 후퇴하는 독일군 보병들의 뒤통수를 향해 총을 갈겨 댔다.
“제기랄… 우리 전차는….”
소련군 부됸늬 전차 4대가 이미 격파당했다. 구동계 고장으로 앉은뱅이가 된 채로도, 자기는 아직 건재하다 울부짖는 호랑이처럼 독일군 전차는 으르렁댔다.
물론 사냥꾼들 수십 명이 몰려와 작살을 박고, 그물을 던지면 제아무리 흉포한 맹수라도 잡혀 죽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소련군은 수십, 수백 대의 중전차들을 사냥해 본 경험이 있었다.
“후퇴! 아군 포격이 떨어진다! 후퇴!”
“와아아아아!”
무전기에서 포격 신호가 떨어진다는 내용이 전달되자 소총병들은 낮게 환호하며 우르르 뒤로 퇴각했다.
한 번도 우세한 지원 속에서 싸워 본 적 없던 베테랑 병사들은 낄낄 웃으며 후임들에게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우리가 갓 징집돼서 싸울 때는 말이야!”
“그땐 포병도 다 견인포에다 76mm 같은 거나 한가득 있고, 부됸늬 전차 같은 것은 상상도 못 해 봤고….”
“너희들이 공군 지원도 못 받고 싸워 본 적이나 있냐? 칵!”
이제 적의 기갑부대가 나타났다면 아군 기갑부대를 호출할 수 있었다. 중전차가 설치고 다닌다면 불곰 공격기들을 불러서 대지공격을 때릴 수 있었다.
그마저도 안 된다면 기갑부대를 따라온 자주포병부대에 포격 요청을 넣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얻은 포병부대는 이 위험하고 재미있는 장난감들을 쓰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했다.
한때는 무전기도 없어서 자기가 뛰어다녀야 했다, 신병들이 도무지 믿지 못하는 썰을 풀던 고참 중사는 목에 맸던 쌍안경을 들어 눈에 댔다.
“오! 떨어진다!”
쿵, 쿵, 쿵, 뒤에서 묵직한 중포의 발사음이 들려왔다.
‘즈베라포이’, 즉 맹수사냥꾼들은 표범(판터) 전차나 호랑이(티거) 전차를 충분히 사냥할 수 있었다.
장갑을 관통하지는 못해도, 그냥 강재를 때려 부수고 직격할 경우 전차를 박살 내는 위력은 실로 무지막지했다. 빗맞아도 궤도가 나가 버리거나, 구덩이에 빠져 기동불능이 되는 상황도 흔하게 발생했다.
“자! 이제 진격하자!”
“우라! 우라! 붉은 군대 만세!”
결국 거듭되는 포격 앞에서 티거 전차는 완전히 정지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소련군들은 굳이 고민하지 않았다. 파시스트, 독일군 놈들은 모조리 약탈자요 침략자요 강간마, 방화범들이다.
대부분의 소련군은 그렇게 생각했다. 프롤레타리아트 세계혁명을 위하여, 스탈린 동지의 명령으로 포로들에게 굳이 화풀이를 하지는 않지만 기회가 된다면 독일 놈들을 쏴 죽이는 것을 피하려 하는 사람은 적었다.
파괴된 전차 주변에는 탈출하려다 죽었는지, 아니면 전차 뒤에 엄폐했다가 죽은 것인지, 아무튼 독일군의 시체 몇 구가 있었다.
“칵, 퉷!”
“잘 가라, 더러운 파시스트 새끼들.”
소련군은 진격하며 한마디씩 욕지거리를 퍼붓거나 침을 뱉었다.
에이스들이라 하여 포탄을 이겨 내지는 못했다. 질척질척한 붉은 피가 흙냄새와 화약 냄새가 자욱한 대지로 스며들었다. 이미 어머니 조국에 뼈를 묻은 수백만 독일군들처럼.
다만, 아직 전쟁이 휩쓸고 간 도시와 마을들을 보지 못하여 복수심이 덜한 신병 하나는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고 앞서가는 선임을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저들도 사람일까?’
온전하게 제 모습을 남기지도 못한 그들을 보며 도무지 살아 숨 쉬는 인간을, 신병은 연상하지 못했다.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들은 이후에는 더더욱.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럴 수 있을까?
* * *
“빌뉴스가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제3 벨라루스 전선군은 카우나스를 해방시키고 쾨니히스베… 아니, 부됸늬그라드로 진격합니다.”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루블린으로, 제2,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크라코프를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루블린은 2주 내로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서기장 동지.”
내가 직접 ‘우상화 방지’를 위해 도시에 사람 이름을 붙이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부됸늬그라드는 마지막 예외로 삼기로 했다.
실제 역사에서 쾨니히스베르크, 즉 ‘왕의 산’은 소련의 혁명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칼리닌이 죽자 그를 기려 칼리닌그라드로 개명되었다.
뭐, 아직 그는 죽지도 않았고 모스크바 인근 도시 ‘칼리닌’을 개명하는 김에 칼리닌그라드로 하려 했으나 실제 역사와는 달리 전장에서 용맹히 싸우다 전사한 부됸늬를 기리기 위해 정치국은 만장일치로 ‘부됸늬그라드’라는 지명을 승인했다.
“그리고… 그놈의 심문은 끝났나?”
“아! 예! 서기장 동지. 그자는 끝까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만….”
오토 슈코르체니는 티토 참수작전에서 우리가 심어 둔 스페츠나츠 요원들과 교전을 치르다 부상을 당하고 포로가 되었다.
감히 부됸늬 원수를 비겁하게 기습한 자를 살려 둘 수 없다며 베리야는 즉결 처형을 건의했지만 나는 굳이 그를 살려 두었다.
어차피 전쟁에서 죽고 죽이는 일은 흔했지만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는 흔하지 않았으니까. 거기에다, 부됸늬를 사살한 것은 자기네 대원일 뿐이고 자기가 미디어를 탄 것은 위장용이라고 주장한 것도 있었다.
“참, 대단한 자 아닌가? 국가원수를 둘이나 생포하고, 세 번째도 거의 당할 뻔한 것 아닌가. 거기서 성공했더라면 무솔리니도 구출할 수 있었겠지?”
“그… 그렇습니다. 아직 저희 스페츠나츠가 미진하여….”
보로실로프 휘하의 특전여단장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굽신거렸지만, 모든 사람이 오토 슈코르체니 같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생포당해 준 덕분에 독일군은 무솔리니도 구출하지 못하고 뻘짓을 하며 이탈리아를 헤매게 되었으니, 솔직히 고맙기도 했다.
“한번 가서 무용담이나 들어 보도록 하지. 설마, 줄을 끊고 나와 내 목을 졸라 죽이고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서기장 동지! 믿어 주십시오!”
“하하, 농담일세 농담.”
농담 한마디라도 할라치면 부하들이 편집증적일 수준으로 놀라는 바람에 도무지 뭐 한마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NKVD가 원래 심문 쪽은 전담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
“왜 스페츠나츠가 아직도 붙잡고 있는 것인가?”
비밀 심문실로 내려가며 여단장에게 묻자 그는 또다시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생긴 것은 무슨 카렐린처럼 생긴 사람이 그러니 어딘가 참 어색했다.
“저기, 그것이…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