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153화
“아마 장군들도 참 골치가 아플 거야.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럴 것 같습니다.”
모델이 명장이면 뭐 하는가?
아니, 애초에 명장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군인으로서야 영예겠지만, 사령관으로서는 불행이나 다름없다.
불리한 병력과 자원을 가지고 분전해 잘 막아 내는 것, 전술적 승리를 얻어내는 것, 모델은 이런 면에서는 탁월했지만 그렇다 해서 대국을 뒤집을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이미 뒤집힌 판에서 조금이라도 예정된 파멸을 늦추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히틀러는 외교적 실착을 연이어 저지른 끝에 동맹국들을 거의 다 잃어버렸다.
“도무지 제정신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뭐, 다른 방법은 없었지만. 이탈리아 쪽은 조금 아쉽군?”
“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저희 붉은 군대는 꼭 올해 안에 베를린에 붉은 깃발을 휘날릴 것입니다!”
“뭐, 그럴 수야 있겠지.”
동맹국이 판이 뒤집힌 것을 알고 동맹을 손절하려 하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독일은 프로이센 시절부터의 종특, 전술에서 이기고 전략과 외교에서 패배하는 허술함을 여지없이 보여 주었다.
히틀러, 아니 빙틀러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한 것일까? 영국과 프랑스를 순식간에 굴복시킨 것까진 좋았다. 미국한테 선전포고 없이 선빵을 갈기면서 소련과의 양면 전쟁을 시도한 것은 최악의 패착이었고.
밀리다 못해 이탈하는 동맹국들을 잘 어르는 것이 아니라 참수 작전으로 괴뢰정부를 세우는 것 역시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도 독일은 그랬지만.
“이탈리아로 건너뛰는 건 그러면 우리 선택지에서 제하고… 남은 것은 ‘바그라티온 작전’ 인가?”
“그렇습니다! 파시스트들의 중부집단군을 완전히 궤멸시키고, 북부집단군을 쿠를란트, 발트에 가둬 버릴 것입니다!”
이탈리아가 이쪽으로 넘어올 경우 우리는 아드리아해를 건너 병력을 이동시킨 후 프랑스나 독일 남부로 치고 들어가려 계획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발끈하며 이탈리아로 군대를 보내 북부 일부를 점령하고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해서 결국 계획은 포기했지만.
뭐, 그것도 패착이었다. 독일은 전략적으로 방어하는 입장에 몰려 소련이 밀고 들어올 수 있는 수많은 곳을 하나하나 막아야 했다.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헝가리 평원, 이제는 이탈리아까지.
그 모든 구멍을 틀어막으려 병력을 쪼개고 쪼개 보내는 만큼 나머지 부분은 취약해진다.
지금도 독일은 중부집단군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하고 발칸 야전군을 뚝 떼어 이탈리아를 틀어막았다. 중부집단군을 향해 공세가 기획된 줄도 모르고.
바실렙스키는 보기 드물게 자신만만했다.
“봄비가 그치는 대로… 파시스트들을 밟아 버리게.”
“예! 서기장 동지!”
* * *
민스크의 해방으로 소련군의 앞길에는 길이 활짝 열렸다. 듣기만 해도 군침 도는 목표물들이 앞에는 쭉 늘어서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동프로이센의 중심 도시 쾨니히스베르크,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마찬가지로 폴란드의 대도시인 크라쿠프와 카토비체 같은.
작전명 <바그라티온>은 이 도시들을 파시스트들의 손에서 해방시키려는 작전이었다. 끊임없이 증강되는 소련군들은 점점 약해져 가는 독일군들을 사뿐히 즈려밟고 전진했다.
목적지는 비스와강. 바르샤바와 단치히를 끼고 흐르는 거대한 강이었다.
“진격! 진격하라!”
“우라! 우라! 우라!”
빈틈이 뻥뻥 뚫린 전선 사이로 거대한 전차가 포효하며 질주했다. 하늘에는 수적으로 독일 공군을 압도하기 시작한 불곰 전투기들이 우렁찬 엔진음을 뿜으며 화답했다.
국방군 최정예, 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는 지평선을 메우며 몰려오는 소련 전차들을 막기 위해 투입되었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집단군의 마지막 예비대요.”
“…알겠습니다. 사령관 각하.”
쾨니히스베르크, 저들은 이미 ‘부됸늬그라드’라고 이름 붙여 부른다는 이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몰려오는 소련군은 못 해도 수십만.
제1부터 제3벨라루스 전선군 200만이 이쪽으로 몰려오는 가운데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집단군의 가장 강력한 기갑부대로 전선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을 명령받았다.
“잘 알고 있겠지만, 쾨니히스베르크가 포위당하면 발트 지역의 아군은 모조리 저 북단에 고립될 것이오.”
“….”
현 독일 제3제국의 모태가 되는 프로이센의 수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는 유서 깊은 고도였다. 독일인의 동방 진출과 개척, 천 년에 가까운 동방식민운동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곳마저 열등한 슬라브인들에게 침탈당한다면, 게르만 민족의 레벤스라움 건설은 그야말로 한낮의 꿈처럼 사라질 것이다.
모델 사령관은 나치즘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독일을 수호하기 위한 국방군의 사명만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많은 장병들,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를 가리지 않고 나치즘에 심취한 이들은 죽음으로 이곳을 지키겠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의지만으로 모든 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 * *
“불곰이다! 공습 대비하라!”
“전차대 산개하라! 지그재그 기동!”
소련군은 독일이 써먹었던 수법들을 그대로 배워 와 사용하고 있었다.
“집속탄 떨어집니다!”
“씨발! 102호차! 102호차! 응답하라!”
소련 기갑부대를 맞상대하기 위해 투입된 독일군 기갑부대는 불곰 전투기들의 대지공격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우왕좌왕했다.
독일군이 슈투카를 근접항공지원으로 요긴하게 사용하며 ‘전격전’의 전설을 써 내려갔던 것처럼, 소련군 역시 대지공격기를 일종의 공중 포병처럼 사용했다.
봄비가 그치고 푸르게 맑아 오는 하늘에서 수십 대의 불곰 전투기들이 기수를 꺾고 강하하여 대전차 집속탄 PTAB를 뿌렸다. 독일군 전차들은 이리저리 기동하며 어떻게든 피해 보려 했지만 한 손이 열 손을 당할 수는 없었다.
“대대급 부됸늬… 그리고, 하….”
[601대대는 적 기갑부대와 조우했다. T-34-85, 규모는… 연대급!]
이곳에는 적게 잡아도 대대급은 되는 부됸늬 중전차들, 저쪽에는 연대급이라는 T-34들.
전차전만 보면 혈전을 헤쳐 나오며 억세게 단련된 독일군 전차병들은 나름대로 자신이 넘쳤으나 공군과 포병의 지원까지 받는다면 전차부대가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오우, 파시스트 놈들 전투기가 몰려오는데요?”
[저는 무장 다 썼습니다!]
[우린 그냥 다시 돌아가고 2파 오면 알아서 상대할 거니까 빼자!]
미제 엔진은 소련군 조종사들이 사용하던 그 어떤 전투기들보다도 강력한 추력을 제공했다. 저출력 저속에 적응해 살아남았던 에이스들이 오히려 적응하지 못할 정도로.
지평선을 넘어 독일군 요격기들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소련군은 그저 쿨하게 기수를 돌리고 동쪽으로 도망쳤다.
다목적 전투기 겸 공격기인 불곰은 대지공격 무장을 장착할 수도 있었고, 대공 전투용 무장을 장착할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대지공격을 위해 출격한 상황. 무전을 보냈으니 대기 중이던 편대가 대공 무장을 하고 출격할 것이다.
예전처럼, 필사적으로 아군 머리 위에 떨어질 기관총탄을 막아 내기 위해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었다.
“하하하하하! 잘 있어라 파시스트 놈들!”
잘 가라고 인사하듯, 지상에서 대공포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아군 엄호를 위해 화망 속으로 기어들어 온 파시스트 놈들을 어머니 조국의 대지에 묻어 버리기 위해.
“1번부터 6번 포대까지, 전탄 발사!”
“발사!”
대공포대장은 기분이 좋은 듯 연신 발사! 를 외쳤다. 대공포탄이 만들어내는 불꽃놀이에 한 번 걸린 독일군 전투기들은 순식간에 연기를 내뿜으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이제 소련군 대공포들은 미국과 기술협력을 통해 개발한 근접신관을 대량으로 채용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비싼 가격 때문에 대구경 대공포에 제한적으로 도입되었지만, 일선 제대들에서 충분히 사용할 정도는 되었다.
15kg짜리 포탄이 터지며 뿌리는 파편들은 갈수록 불량해져 가는 독일군 항공기의 강판을 갈가리 찢어 버릴 수 있었다.
쾅! 쾅! 쾅! 쾅! 4초에 한 발씩, 수십 개 포대가 일제히 아군 항공기가 후퇴한 하늘을 향해 쏘아 대자 독일군 파일럿들이 제아무리 용맹하다 할지언정 버틸 수가 없었다.
[후퇴한다! 제기랄, 후퇴!]
다시 기수를 돌려 날아가는 독일군의 뒤꽁무니에다 대고 한참을 쏴 대던 소련군 대공포대원들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저리 꺼져라! 개 같은 새끼들!”
“이거나 먹어라!”
하늘을 향해 주먹 감자를 한 방 먹인 대원들은 이제 사악한 웃음을 씨익 지었다.
대공포를 꼭 하늘을 향해서만 쏘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군들이 88mm 포를 비행기 잡는데도 써먹고 전차 잡는데도 써먹는데 소련이라고 못 할 게 뭔가?
“자… 이제 저놈들 머리 위에 뿌려 볼까?”
* * *
티거와 판터 전차를 장비한 중전차대대들은 그야말로 일당백의 위력을 자랑했다.
대대급으로도 소련군의 군단급 공세를 지연시키고 막아 내는 것은 4호 전차나 3호 전차, 혹은 잡다하게 구축전차나 하프트랙 같은 것을 편제 받은 여타 기갑부대로서는 불가능한 위업이었다.
“제기랄….”
지평선을 메우며 몰려오던 소련군 기갑부대들은 다시 다음 공세를 기약하며 후퇴 중이었다.
너른 들판에는 아직도 뭉클뭉클한 연기를 뿜어내는, 격파당한 소련군 전차들이 널려 있었다. 단 16대 1개 중대로도 백여 대의 공세를 저지하고 수십 대를 격파한 것이다.
하지만 티거 중대의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후퇴하라, 1중대, 후퇴하라.]
사령관은 지연전을 명령하며 계속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티거 전차는 다른 전차의 두어 배나 되는 70톤이라는 우람한 체급을 자랑했기에, 도저히 끌고 갈 수가 없었다.
궤도가 망가졌거나, 구동계가 퍼졌거나, 연료가 떨어진 것만으로 이 강력한 전차를 버려야 한다니!
중대장은 낮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빌어먹을 소련 놈들.
“전투에서 잃는 것보다 이런 비전투 손실이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럴 것 같네.”
부중대장이 나직하게 감상을 이야기하자 중대장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대의 전차들 중 적군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단 3대뿐. 하지만 4대를 버리고 가야 할 상황이 되었다. 구난전차들은 어디 갔는지 올 줄을 모르고 있었고, 소련군이 언제 다시 공세를 취할지 부대원들은 전전긍긍했다.
“자폭시키세. 연료를 나누어 넣다간 우리 모두 복귀하지 못할 판이야.”
“중대장님!”
“어쩔 수 없다.”
이것 한 대만 더 가져간다면 얼마나 많은 아군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까?
몇 대의 소련 전차들을 멈춰 세울 수 있을까? 우리 아내와 누이들을 겁간하고 도시들을 약탈할 흉악한 소련군들을 단 하루라도, 단 한 걸음이라도 막아 내야 할 텐데.
쾅! 포탄을 몇 개 넣고 유폭시키자 티거 전차는 한번 들썩였다가 포신을 아래로 꺾고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렸다.
중대원들은 훌쩍이기도 했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우리가 왜 져야 하는가!’
독일인들은 절규했다. 왜, 왜 우리가 패배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