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152화
<제국의 미래를 바닷속에 던져 넣으며 제국이 천년을 가길 바라는가?>
병사들은 수군거렸다. 특공에 투입된 한 젊은 제대생(帝大生)이 마지막 술잔을 뿌리치며 남겼다는 이 말은 특공출정식이 있을 때면 항상 회자되곤 했다.
진주만 이래로 해군과 연합함대의 수뇌부들은 일종의 ‘뇌격 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자랑하던 야마토의 거포는 결전 병기라는 이유로 뒤로 돌려졌다. 오직 저 가이텐(回天) 어뢰만을 사용할 뿐.
‘이것이 점감 요격인가? 야마토 호텔, 무사시 료칸에서 사령장관이 노니는 동안 청년들은 장렬히 산화하도다!’
요즈음 대일본제국 해군의 동향은 이러했다.
4에서 6척의 가이텐 어뢰를 단 잠수함은 거함으로부터 보급을 받으며 바다를 초계한다. 혹여나 미국의 전함, 항공모함 등 전투함을 발견할 경우 특공대가 출격한다.
폭약을 2톤 정량대로 꽉꽉 채워 넣은 이 필살의 특공 병기, 병사들의 말에 따르면 <자폭어뢰>는 바다를 고속으로 항주하여 귀축 미제의 전함을 들이받고 파괴하는 것이다. 2톤이라는 막대한 작약량은 미국의 신식 거대 전함이라도 제대로 맞힌다면 파괴할 수 있었다.
어지간한 폭격기라 해도 작약량만 2톤인 폭탄을 들고 날아와 정확히 맞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혁신적인 유인어뢰는 저만큼의 폭약을 조종하여 군함의 용골에 때려 넣는 것이 가능했다.
“천황 폐하를 위하여! 대일본 제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출진하라 제군들!”
“덴노 헤이카 반자이! 반자이! 반자이!”
누군들 죽고 싶으랴? 그 어떤 대우를 약속하여도 더 이상 특공에 자원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은 너무 많이 봐 왔다. 군함을 날리고 같이 갈가리 찢겨 산화하건, 불발이나 요격으로 차가운 바닷속에 잠겨 죽어가든. 윗선이 그들에 대해 무어라고 생각하는지를.
하루에도 십수 발이나 되는 가이텐 어뢰 속에 청년들은 들어가 군함을 향해 죽음의 질주를 했다.
들어가기 싫다고 바락바락 반항하는 이를 강제로 밀어 넣고 쇠뚜껑을 닫아 버리거나, 아편과 고량주에 취한 채로 청년들은 질주를 가까스로 통제하며 자신의 죽음이 최소한의 의미라도 있기를 바라곤 했다.
* * *
“저… 미친 쪽발이 새끼들. 이건 도무지 어찌할 방법이 없잖은가?”
“그… 그렇습니다….”
물론 이는 미군을 충분히 곤란하게 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자원하지 않는 자폭 병기일지언정 일본은 어디선가 이 어뢰에 탑승할 이를 구해왔다. 그렇게 하루에도 수십 발씩이나 되는 초중량 어뢰들이 미군 함선을 향해 돌진해 왔다.
40노트나 되는 속도로 인해 느릿느릿한 거함들은 회피가 불가능했다. 고속으로 인해 사실상 직진 일변도라고 해도 피하기 어려운데 여기에 사람까지 들어가 조금이나마 방향을 조종하고 있었다. 여기에 한 방만 직격당하면 침몰이기에 도무지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잠수함에 적재한 가이텐은 항공기들이 초계를 통해 찾아내어 회피할 수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저 유인어뢰의 사거리는 그다지 길지 않았으며 들키지 말아야 할 잠수함은 위험을 감수하고 군함에 가까이 접근해 쏘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미군은 수많은 일본 자폭조들을 발사도 해 보기 전에 침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과 같은 섬 공략전에서 발생했다.
섬 주위의 암초와 환초들, 그리고 해안가에 숨겨 둔 잠수함들에서 발사되는 어뢰는 방법론상에서는 조악할지언정 포격 지원을 위해 접근한 미국 군함들을 박살 내버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해군은 자기네들이 가진 함선을 철저히 뒤로 돌리며 보존하는 전략을 취했다. 미군이 섬에 상륙하는 상황이 되면 섬에 주둔시킨 병사들은 사실상 죽으라고 내버려 둔 채, 어떻게 하면 자기네 전함은 보존하며 미국 함대에 피해를 입힐지만 골몰한 것이 너무도 뻔히 들여다보였다.
“또 기뢰인가?”
“그렇습니다. 일본군은 아예 이 해역에 자기네 함선을 사용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개 같은 쪽발이들, 미친 쪽발이 새끼들. 가끔 날아와 물자를 떨어트리고 가는 수송기들이 일본군이 이 해역에 투입한 전력의 전부였다.
해역에 한가득 풀어놓은 기뢰와 수시로 날아오는 자폭 유인어뢰들. 그런 미친 발상을 한 구식 병기에 미국은 어쩔 줄을 몰랐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자기네 병력을 섬에 버려 놓고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을?
그렇다고 우회하고 지나가자니 맥아더 원수는 반드시 중요 거점들만큼은 철저히 정리할 것을 요구했다.
“너무 멀리 건너뛰면 기습당할 우려가 있다! 중요한 섬들만큼은 점령하도록!”
그 ‘중요한’ 섬이란 활주로가 설치되어 미 함대에 공습을 가할 수 있는 거점이 되는 곳이었다. 혹은 멋진 홍보 거리가 될 목표물이 존재하거나, 혹은 맥아더 원수가 그냥 지정한 곳이거나.
미국의 공군력은 이미 일본의 그것을 압도한 지 오래였지만, 모든 곳에 충분한 공군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충분과 파국 사이의 간격을 장병들은 피로 메워야 했다.
물론 피의 양만 보면 일본이 훨씬 더 많이 흘리긴 했지만.
* * *
“씨발… 이곳은 존나 미친 곳이야….”
“누가 아니라냐….”
슬슬 본토라면 서늘해질 때가 되었지만 열대의 태양은 뜨겁게 작열했다. 미군 병사들은 온종일 삽질을 하며 해안선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제 작업에는 익숙해졌지만, 도무지 이 더위와 모기떼에는 적응할 수가 없었다. 땀이 줄줄 흐르고, 어딘가 간질간질하다 싶어 탁 내리치면 피를 잔뜩 빨아먹은 모기가 터지며 붉은 피가 튀었다.
“몬테주마의 궁전에서 이 좆같은 해변까지~”
“우리는 잽스와 모기들과 싸운다네~”
병사들은 군가를 제멋대로 바꿔 부르며 해변에 참호를 팠다.
개좆같은 잽스들은 바다에서 하던 짓을 땅에서도 비슷하게 했다.
반자이를 외치며 칼을 뽑아 들고 돌격해 오는 것을 처음 겪어 본 미군이라면 항상 충격을 받았다. 아니, 지금이 몇 년도인데 발검 돌격을 하나? 시퍼런 날과 핏발 선 눈과 악을 쓰는 함성을 들은 병사들은 공포에 질리곤 했다.
“기관총을 써 보기 전까지는 그렇지. 이봐 빌리, 한번 겪어 봤으면 다들 잘 넘긴다고.”
“…아, 예. 그래서 지난번에는 오줌을 지리셨… 크흠.”
“아니 그건 그냥 살짝 흘린 거라니까!”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 미군을 울창한 숲속에서 응시하는 이들이 있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저렇게 시계를 불량하게 제약하는 숲은 포격과 폭격으로 쑥대밭을 만들어야 했겠지만, 포격 지원을 나왔던 중순양함이 자폭 어뢰에 피격당하는 바람에 보병들은 이곳에 홀로 던져졌다.
한 무리의 일본군은 이를 천우신조의 기회로 삼아 참호를 다 파고 불을 피워 취사를 시작하는 미군을 조용히 노렸다.
“으음… 저들이 식사를 준비하는군요.”
“이 냄새는… 스팸의 냄새가 아닙니까?”
“대대장님! 지금이라도 돌격을…!”
미군을 노린다기보다는 미군의 식량을 노린다고 할까. 잔뜩 굶주린 일본군은 수백 미터 거리까지 고소하고 향긋하게 흘러오는 냄새에 몸이 달아 있었다.
이들은 보급도 없이 섬에 버려졌다. 상부는 이를 국가를 위한 위대한 희생이요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는 ‘신가리’(후위 부대, 주로 죽기를 각오한 이들)로 표현했다.
살아있는 이들에게 희생에 고맙다고 말하는 것은 썩 좋은 방법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기무라 중좌는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귀축 같은 미군에게 처자식이 능욕당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지 못했다.
‘이것도 그닥 좋지는 못하지만….’
이름 모를 섬의 수비대로 차출된 89사단 2연대 3대대는 어느샌가 중대 규모까지 줄어 있었다. 부상자들은 섬의 동굴에 모여 오늘내일하고 있었고,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은 식량을 가지고 있는 미군을 노려야 했다.
탄약과 총화기는 습기에 젖어 못 쓰게 된 것이 다수 있어 모두가 총화기로 무장한 것도 아니었다.
“빌어먹을 윗대가리는 항공 보급이랍시고 보내 놓고는….”
“예? 잘못들었습니다?”
“아닐세….”
한참을 증원과 보급을 기다리다 2주 전, 수송기가 떨어트리고 간 화물 상자를 열어 본 이들은 탄식했다.
그 안에는 군도(軍刀)와 그 정비를 위해 필요한 물품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어디 먹을 게 없나 휙휙 상자를 열어젖혔다 난데없이 도검수입용 기름을 한 통씩 떠안은 장병들은 망연자실했다.
그 덕에 지금 병사들은 꼬락서니는 거지 떼 같았지만 칼만은 번쩍번쩍 빛나는 것으로 들고 있었다.
“저놈들이 식사 중일 때 돌격한다. 반쯤 먹었을 때….”
“그… 그러면 식량이 사라지지 않습니까?”
“….”
병사들의 표정이 확 나빠졌다. 요 며칠간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한 채, 스스로 초식동물이라 자조하며 풀을 뜯어 먹던 병사들의 모습을 기억한 대대장은 끄응 한숨을 쉬었다. 지금 저 거리를 제대로 돌격할 수 있을까?
미군이 가지고 있는 기관총만 잘 제거한다면 어찌어찌 근접전에서 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계태세는 흐리멍덩해 보였고, 초병 몇몇을 제외하면 아예 볼을 차며 노는 놈들도 보였다.
“알겠다. 씨발….”
“예?”
“아니다. 3분을 기다렸다 돌격하도록 한다!”
“예! 덴노 헤이카 반자이!”
* * *
중무장한 방어선에 들이쳐 피를 피로 씻는 혈전부터, 거지꼴을 한 일본군이 허접한 스테인리스 칼을 들고 미군의 기관총 진지로 돌격하는 학살까지. 아름다운 비취색 바다를 낀 서태평양 섬들의 해변에서는 수시로 젊은 생목숨들이 죽어 나갔다.
미군이건 일본군이건 죽음은 평등하게 찾아왔다.
물론 어느 한쪽이 더욱 평등하기는 했지만, 일본 정부보다는 미국 정부가 자국민의 목숨을 더 소중히 여겼기에 두 집단의 반응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어느덧 훨씬 쇠약해져 수시로 와병하게 된 루즈벨트는 젊은이들의 목숨과 다음 선거를 생각해서라도 대책을 찾고자 했다. 이름 모를 섬에서 청년들이 수백 명씩 죽어 나가는 것은 결코 선거에 도움이 되지 못했고, 빌어먹을 맥아더가 인기를 끄는 것 역시 비슷했다.
“쿨럭, 쿨럭… 그 멍청한 개새끼 같으니라고….”
루즈벨트는 맥아더에 대해서, 그리고 군부에 대해서 종종 지인들에게 농담을 하곤 했다.
<맥아더는 멍청한 개새끼지만 그를 파면할 수는 없다. 만약 그랬다간 우리에겐 장군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을 것이니!>
하지만 맥아더를 유독 루즈벨트가 싫어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군에 대한 문민 통제를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게 무시했다. 정치인이 더 어울릴 정도로, 맥아더는 대중과 언론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며 정부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렸다.
여기에는 공화당이 의도적으로 강조한 루즈벨트의 ‘용공’ 논란까지 끼어 있었다. 소련과의 협력이 필수 불가결한 것이지만 아무튼 대중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이를 빌미 삼아 공화당은 수시로 루즈벨트 행정부를 공격했다. 루즈벨트뿐만 아니라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성향의 부통령 월리스, 소련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주장해 온 참모총장 마셜까지 도매금으로 매도당했다.
그 와중에 공화당은 미국적 가치를 수호할 전쟁 영웅으로 맥아더를 은근슬쩍 내세웠다. 맥아더 역시 군인으로서 정치 중립을 지켜야 했지만 공화당 행사에 참석하고, 친 공화당 언론들에 얼굴을 비추며 정치적 행보를 거듭 이어 나갔다.
언론들 역시 독자들이 원하는 내용을 보여 주었다. 독자들은 위대한 미국의 패전을 바라지 않았다. 맥아더는 전과를 제 입맛대로 가공해 찌라시 기자들에게 던져 주었고, 황색언론들은 그걸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온갖 망상의 나래를 펼쳤다.
“차라리 소련이 참전해서 일본 육군을 박살 내주면 좋겠다만….”
“그렇다면 중국과 일본까지 소련 손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각하!”
“미국이 맥아더 손에 넘어가는 것보단 낫지 않나?”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루즈벨트는 몇 번 쿨럭거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각료들을 쭉 둘러본 그는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더니 뜬금없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런데… 이자는 대체 누군가?”
“예?”
루즈벨트가 탁자에 던진 신문에는 한 젊은 초선의원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신문 제목을 봐도 알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삼류 찌라시였지만, 대통령이 내밀었다면 삼류가 아니라 4류, 5류라도 봐야 하는 것이 각료의 운명.
“…위스콘신 하원의원 조지프 매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