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스탈린이 되었다-150화 (150/300)

# 150

150화

“이봐, 대머리!”

“예!! 예!!! 서기장 동지. 부르셨습니까?”

“그때 말했던 ‘보고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흐루쇼프는 총알처럼 튀어 올라 내게 달려왔다. 담배빵을 한번 당한 이후로 흐루쇼프는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기겁하며 놀라는 게 눈에 띄게 늘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고 흐루쇼프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보, 보고서 말씀이십니까? 아직은 시간과 예산이 더 필요할 것으로….”

“진척사항을 한번 브리핑해 보게.”

그게 아니라면 이런 중책을 맡길 리도 없었다.

나는 흐루쇼프에게 전후 사회서비스의 설계를 총괄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초안을 그리는 작업을 맡겼다.

이른바, ‘흐루쇼프 보고서’. 영국이 나치 독일에 짓밟히는 바람에 아마 십수 년은 미뤄질 베버리지 보고서를 벤치마킹한 기획이었다.

“예! 일단 다섯 가지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우리 소련 사회가 전후 타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은 궁핍, 무지, 불결, 빈곤, 그리고 나태일 것입니다. 이에 따라….”

목적 자체는 비슷했다. 우리 위대한 승리자 인민은 더 나은 삶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영국인들도 비슷한 관념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실제 역사에선 그랬다. 대조국전쟁, 2차대전을 겪으며 인민들의 삶의 질은 날로 처참해져 갔다. 영국인들은 스팸이나 먹으며 독일인들의 공습을 견뎌내야 했다. 소련인들은 우크라이나의 밀밭을 빼앗기고 독일군의 진군을 막아 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그 모든 희생을 치러 내고 결국 조국을 사수한 이들에게는 조금 더 나은 삶이 주어져야 마땅했다. 영국은 그래서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내세운 노동당이 종전 직후 선거에서 압승을 따낼 수 있었다.

소련은 상대적으로 더 경직되었기에 스탈린 생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나, 스탈린 사망 이후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삶의 질 향상을 내세웠다. NKVD의 수장인 베리야마저도.

물론 세부적인 노선은 다를 수 있었다.

“먼저 농업 증산을 위한 5개년 계획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영국은 자본주의 국가기에 베버리지 보고서를 통해 설계하고, 사회보장‘보험’, 국영의료‘보험’ 등의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보험은 기본적으로 가입자 부담을 원칙으로 했다. 자기 월급에서 얼마간을 내고 필요한 보장을 받는 것이다. 일정 부분 국가가 지불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사회보험은 그런 제도였다.

하지만 소련의 경우 질적으로 훌륭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국영, 무상 의료제도가 존재했다. 이미 중앙에서 재원을 조달하여 운영하는 병원들이 존재하는데 의료보험이 무슨 쓸모인가?

그것보다, ‘흐루쇼프 보고서’는 다른 분야를 다루고 있었다.

“콜호즈와 소프호즈는 재편성되어… ‘자본주의적’ 보상체계를 일부 도입할 것입니다. 다만 농기계와 수리시설 등 기반 인프라 제공은 집단농장 체제를 채택한 쪽이 더 유리하도록 조정하여….”

집단농장의 개혁을 통한 농업 생산성 향상이 하나였다.

아직도 세계 농업은 축력(畜力)에 대한 의존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깡촌에서는 소나 말 한두 마리로 적당히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수확하는, 2천 년 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저 사람들을 모아 두고 집단농장을 편성해 농사를 지으라고 하면 의욕의 하락은 불 보듯 뻔했다.

집단화, 분업화의 이점은 항상 그에 걸맞은 생산체계와 보상체계가 존재할 때에나 찾을 수 있었다. 다 같이 땅을 갈아 봐야 서로 게으름이나 피우며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누군가는 농기계를 몰고 누군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작물을 분류한다면 일반적인 공장과 다를 바 없다

‘공장식 체계’가 구축되어야 비로소 집단농장은 제힘을 낼 수 있었다. 현대에 가장 생산성이 높은 농업을 자랑하는 미국 역시 ‘집단’으로 ‘농사’를 짓는다.

그것을 집단농장이라 부르지 않고 기업식 농법이라고 부를 뿐.

다만 이 기업식 농법의 도입으로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전면적으로 붕괴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작업만큼은 필요했다. 흐루쇼프 휘하의 경제 전문가들은 그 부분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바빌로프 동지는 성과가 있다던가?”

“예! 그것 역시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바빌로프 동지가 이끄는 실험국에서는 서기장 동지께서 말씀하신 난쟁이 밀 종자를 바탕으로 하여 개량 종자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올해 파종부터 본격적인 적용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보고했습니다.”

“오, 그래? 벌써?”

숙청당하기 싫어서 열심히 일했나보다… 크흠.

많은 소련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은 숙청의 공포 때문에 내가 지정하는 목표에 대해서는 필사적으로 개발에 매진했다.

요새 한 10년은 늙어 보이는 칼라시니코프나 갈수록 말라서 이제는 거의 해골만 남은 것 같은 코룔로프라던가…. 아무튼 그들의 희생 덕에 소련의 과학력은 세계 제이이이이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럼 한번 심어 보게. 식량 증산에 대해서는 자네와 ‘보고서 그룹’에 일임하도록 하지. 그럼 다음에는….”

곡물 생산은 다른 식량자원들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현대의 육류 생산은 일반적으로 자연 방목이 아니라 공장식 사육에 의존했다. 호주나 미국처럼 가진 게 초원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면.

특히 소련 같은 경우는 워낙 날씨가 추워서 체온과 칼로리 보존을 위해서 축사를 짓고 동물을 몰아넣는 공장식 사육이 더 유리했다. 그런 만큼, 사료로 제공할 곡물을 증산하는 것은 국민들이 그토록 바란 육류 증산과 직결되었다.

소련인들이 미국에 가면서 가장 충격받은 것이 고깃값이 싸다는 것이었다던가?

또, 세계전략에도 막대한 위치를 차지했다. 미국은 비옥한 중부의 평원지대에서 생산한 곡물들을 세계 각지의 저소득 저개발국에 풀어 놓았다.

그 결과? 입맛부터 미국식에 길이 든 수백만을 세계에 지지자로 확보할 수 있었다.

“주택 문제! 이것도 조사를 좀 해 뒀나?”

“그,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그래. 한번 보여 줘 보게.”

폐허가 된 온 국토, 도시들을 다시 재건하는 것 역시 흐루쇼프 보고서의 일부였다.

물리적으로 짓밟히고 파괴된 수많은 서부의 도시들. 그 도시들을 다시 세우는 것은 아마 몇 년 정도는 족히 잡아먹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어디다 적당히 처박아 놓고 대충 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신속하게 건설할 수 있는 주택이 필요했다.

“예! 여기 기본 설계도와 도면이 있습니다. 보시지요!”

실제로도 소련에는 이런 형태의 아파트들이 존재했다. 농촌을 붕괴시키고, 도시로 인력을 짜내면서 집중된 사람들의 거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된 조립식 아파트들은 소련인들의 거주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공장에서 미리 반 조립된 이 아파트 ‘부품’들은 운반되어 현지에서 짜 맞추어 건설되었기에 공사기한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일단 서기장 동지께서 지시하신 대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10층, 대도시형 모델과 5층, 소도시형 모델입니다.”

“흐으음…. 이거 면적이 몇 ㅍ… 아니, 몇 제곱미터라고?”

“옙! 30제곱미터(9평), 44제곱미터(14평), 60제곱미터(18평) 형. 총 3종류가 존재합니다.”

“제일 작은 거는 없애고, 90제곱미터 내지는 그 이상 형태도 고안해 보게.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어차피 면적이 두 배 늘어난다고 공사비가 두 배 늘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몇 년 쓰지도 못할 폐급 주택으로 괜히 도시 부지나 잡아먹고 도시계획을 어렵게 하는 것이 더 치명적이다.

흐루쇼프는 딱 자기가 실제 역사에서 서기장일 때 만들었던 ‘흐루숍카’의 면적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론적으로는 저 9평이나 14평짜리 주택에는 4인 가구가 살아야 했지만, 현실은 좀 더 가혹해서 3대가 껴 사는 일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혹은 18평 아파트에 여러 가족이 살거나.

다 시민들의 불만을 초래할 수 있는 요소였다. 급하게 짓느라고 물이 새고 층간소음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형편없이 좁은 주택이며, 항상 부족한 배급량이며, 뭐 그런 것들.

이곳이 프롤레타리아의 낙원이라고 선전하고, 그 선전을 주민들이 믿게 하기 위해선 실제로 살 만해야 했다.

어차피 독일군을 잘 막아 내는 바람에 전화(戰火)에 휩쓸린 것은 발트, 벨라루스와 서부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일부 정도였다. 재건해야 할 범위가 줄어든 만큼 재건 과정에서 속도를 조금 늦추면서 질적 향상을 꾀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걸 40년, 50년씩 써먹을 수도 있단 걸 생각하면….’

사실 구소련 국가들에서는 2010년대까지도 60년대, 흐루쇼프 시대에 지어진 흐루숍카가 현역으로 살아남아 있었다.

모스크바같이 돈 있고, 공간이 부족해서 허물어 버린 곳이라면 모를까. 반백 년을 그런 곳에서 살게 만드느니 지금 좀 더 돈을 쓰는 것이 나았다.

이것은 일종의 군비경쟁이기도 했다.

“그럭저럭 잘 했군 대머리. 나름 잘했어.”

“감사합니다!!!! 서기장 동지, 감사합니다!!!”

외세, 독일이 끝장난 이후에는 미국과 나토로부터 소련을 지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군사력이 필요했다.

소련은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민들의 삶을 쥐어짜 중공업에 투자하고 쓰지도 못할 무기들을 마구 찍어 냈다. 전혀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안 그랬더라면 군사적으로 패배해 몰락했을 테니까.

하지만 소련의 승리는, 최소한 내 생각에는 다른 곳에 있었다.

“우리가 이만큼이나 잘 산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사회주의가 전 세계의 선망 대상이 되겠지. 풍요롭기로는 미국의 자본주의를 따라갈 수야 없겠지만… 하지만 그 친구들은 밝은 만큼 그림자가 어둡지.”

“아… 역시, 서기장 동지의 혜안은….”

“자네 내가 무슨 말 했는지 못 알아들었으면서 알아들은 척하지 말게. 불평등, 인종차별, 뭐 그런 것 말이네만.”

사회주의는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체제라는 것이 눈으로 보여야 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지만 미국의 흑인들만 떼놓고 계산하면 그 순위는 추락했다. 교육이나 수명에서는 그야말로 이게 최강대국이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그들이 보고 희망을 품을 이상향을, 우리 소련은 실제로 보여 주고 또 제공할 수 있어야 했다. 군사적인 대립으로 자본주의를 거꾸러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손으로 자본주의를 묻어 버리도록.

막대한 군사비 지출은 동유럽뿐만 아니라 서유럽까지 우리 동맹 겸 위성국으로 확보하면서 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를 최대한 친밀하게 유지하려 하는 것도 군비를 줄이기 위한 책략 중 하나였다.

그러고 나면 자본주의는 막대하게 늘어난 생산력을 감당하지 못해 대공황처럼 침몰하고, 사회주의는 생산력을 삶의 질 향상에 투입하며 날아오를 것이다.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그랬다.

‘우리는 너희들을 묻어 버리겠다!’

여전히 벌겋게 달아올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흐루쇼프를 보고 있자니 그의 유명한 말이 떠올랐다.

너희들을 묻어 버리겠다!(We will bury you!)

사회주의가 발전한 생산력으로 인민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동안, 자본주의는 온 세계를 먹여 살릴 물자를 가지고도 분배의 문제, 자본의 농간으로 인해 침몰한다. 그것이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였다.

풍년이 들면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게 아니라 가격을 방어하기 위해 밭을 갈아엎고 불을 지르는 꼴을 보면 아마 꽤 많은 사람들이 심정적으로 공감은 할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자본주의가 자멸한 이후 도래한 사회주의 낙원에서 너희들을 묻는 것은 우리가 될 것이라는 말이었지만….

흐루쇼프는 이 성질을 죽이지 못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초래하고 핵 대결, 미사일 경쟁 같은 것을 걸면서 옥수수 가지고 뻘짓하다가 자기가 되레 먼저 자멸해 버렸다.

내 후계자로서 그런 짓을 하면 안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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