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149화
“이보게 두체….”
“···예, 폐하….”
“두체, 지금 이탈리아의 상황이 어떤지 아는가?”
무솔리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그동안 파시스트당의 집권에 별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태가 이렇게 된 이상, 국왕은 이제 무솔리니에게 입을 열었다.
“꼴이 말이 아니지. 자네도 알지 않나?”
“폐, 폐하!”
“로마가 공습을 받아서 불타올랐네. 밀라노와 나폴리, 볼로냐, 토리노에서는 연일 노동자들의 시위가 잇따르고 있네.”
“···.”
무솔리니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그러나 저러나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는 단 한 건의 전투도 독자적으로 이기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젊은 청년들은 형편없는 처우를 받으며 수만 명이 동부전선에 뼈를 묻어야 했다.
독일은 이탈리아에게 나름대로의 보상을 약속하며 전쟁에 끌어들였지만, 보상은커녕 국토가 짓밟히고 불타오를 지경이 되었다.
“지금 그들을 누가 진압하고 있는지 아는가?”
“···무장 친위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네! 빌어먹을, 이건 내정간섭일세! 제 아무리 동맹국이라지만 흙발로 남의 나라 국민들을 짓밟는다니! 두체, 말 좀 해 보게.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
그리고 그 불을 지르는 주체에는 ‘동맹’ 독일군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반란 진압에 협조한다는 명목하에 이탈리아에서 모병한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시위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유고슬라비아 방향에서 날아온 소련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죽은 사람보다 독일군에 의해 사망한 사람이 더 많을 지경.
이 파국을 초래한 장본인인 무솔리니는 얼마 전부터 반쯤 폐인이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의 경제도, 군대도, 도시들도, 완전히 박살 났네. 국민들은 자네를 증오하고 있어. 파시스트들마저도 자네를 포기한 게 아닌가? 장교와 군인들이 내게 와서 뭐라고 했는지 아나?”
“···.”
“‘무솔리니로는 안 됩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자네를 총리로 만들어 준 검은 셔츠단 출신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더군.”
“폐하…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반쯤 목이 메어 무솔리니가 국왕을 올려다보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사퇴해 주게. 이탈리아와… 국민들을 위하여.”
“···알겠습니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 나도 자네 뒤를 곧 따라갈 테니.”
“예?”
국왕은 결연한 얼굴로, 그러나 너무나 태연하고 별 것 아니라는 듯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마치 내일은 날이 맑을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 역시 자네를 발탁하고 최종적으로 전쟁을 승인한 죄인일세. 나라고 무사할 수 있겠는가? 다행히 공산당은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고 전쟁을 종결한다면 나와 가족들의 목숨은 보장하겠다는군.”
“죄송합니다… 폐하,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다음에 보세나.”
무솔리니는 비척거리는 걸음걸이로 천천히 어전에서 물러났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자기 머리 위의 관을 천천히 들어 옆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제 다 끝났군.”
이제 이탈리아의 전쟁은 끝났다. 끝나야 했다.
소련은 비밀리에 접촉해 이탈리아가 평화적으로 정권 이양 및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 축출에 성공할 경우 패전국으로서의 받을 가혹한 처우를 최대한 경감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정치인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국민들이 책임을 지는 것을 볼 수 없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그 제안에 동의했다.
어지간해서는 그러지 않았겠지만….
‘본토가 전장이 되는 꼴만은… 제발….’
소련군과 유고 해방군은 아드리아해 건너편, 달마티아 해안가의 주요 항구들을 점령했다. 두브로브니크 같은 항구들은 이제 소련군의 손안에 들어왔다.
터키와 그리스 주둔군이 무릎을 꿇었고, 지중해를 지배해야 할 독일 함대는 대서양에서 미국 함대와 치고받고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차하면 아드리아해를 건너온 소련군이 이탈리아 본토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몇 번이고 외세가 격돌한 끝에 엉망이 되었던 그 옛날, 분열된 이탈리아의 참극을 더 이상 재연할 수는 없었다.
벌써 외세의 군대, 독일군은 이탈리아 국민들을 짓밟고 소중한 물자를 끌어내 자기네들의 전장에 가져다 붓고 있었다.
“내 예복을 가져오게! 연설도 준비해 주겠나!”
* * *
“이탈리아 만세! 만세! 외세는 물러가라!”
“파시스트들에게는 죽음뿐! 독일군을 격퇴하라!”
북이탈리아의 대도시들, 토리노, 밀라노, 볼로냐, 베네치아 등에서는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은 점점 인기가 떨어지고 있었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각 지역의 파시스트들마저 무솔리니에게 등을 돌렸고, 국왕은 새로운 총리를 임명하고 전쟁을 그만둘 것을 선언했다.
하지만 독일은 결코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이미 시위 진압이라는 명목하에 진주하고 있던 무장친위대는 파업을 선동하던 노동자들을 잔혹하게 사살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이탈할 기미가 보이자, 독일 국방군은 발칸반도에 진주하던 야전군을 전략상 후퇴시켜 이탈리아 본토에 진입했다.
그들은 같은 민족에게, 시민에게 총을 쏘는 것을 주저하던 이탈리아군과 달리 아무 거리낌없이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다.
“반역자 새끼들! 국왕 폐하와 하느님,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를 보우하신다. 기병대 착검!”
척! 기병대원들은 대검을 총에 장착했다. 서슬 퍼런 칼날이 겨울의 희미한 햇빛에 비쳐 빛나기 시작했다.
파시즘은 중앙집권, 그리고 상부의 명령에 대한 복종을 골자로 했지만 모든 파시스트들이 국왕의 선언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무솔리니가 반역도당들에게 구금당했으며, 국왕은 그들의 협박을 받아 선언한 것이라며 억지를 부렸다. 로마를 장악한 새로운 총리, 바돌리노 원수는 소련의 조종을 받는 국가반역자라며 그들은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두체를 위하여! 돌격!”
“와아아아아! 이탈리아 만세! 로마의 영광이여!”
그 실체는 아마 자기네들이 누리는 권력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없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었겠지만, 최소한 비무장 ‘폭도’들을 상대할 때만큼은 그들은 더없이 용감했다.
붉은 깃발을 들고,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든 채 시위에 나섰던 노동자들은 기병돌격과 군대의 발포하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아아악!”
“살… 살려 줘!”
붉은 피가 광장에 흩뿌려졌다. 무고한 시민의 피가.
그렇다고 터져 나오기 시작한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이미 이탈리아는 1차대전에 뛰어들어 수십만이 죽었지만 변변한 보상도 못 받고 손해만 잔뜩 입었던 적이 있었다.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겠답시고 히틀러의 과대망상증에 협력했고, 또 수만 명이 죽었지만 결국 발칸 영토마저 모조리 상실할 지경이 되자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정권을 탄핵하고, 데모를 일으켰다.
“독일은 물러가라, 독일인들은 꺼져라!”
“인터내셔널 깃발 아래 전진하라! 전진 또 전진!”
공산당 파르티잔들은 이제 도시로 집결해 무기를 들고 진압군에 맞서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파르티잔군에 입대해 저항을 시작했다.
하지만 동부전선에서 패배를 맛보고 있다 하여도 독일군이 약졸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총통 각하?”
“지금까지 하는 말을 뭘로 들었나! 들었으면 가서 임무를 수행하게.”
공군 원수 알베르트 케셀링은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를 곰곰이 고민하면서도 뛰쳐나갔다.
‘이탈리아를 공격하라고?’
이미 독일군이 현지에서 발생하는 시위를 진압 중이라는 것은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격이라니?
총통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새 내각을 구성해 미소와 협상에 나선다는 것에 거품을 물고 화를 냈다.
당장 무솔리니를 구해 와서 이탈리아를 수복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케셀링으로서는 그 명령의 과연 말이나 되는 소리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온 전선이 구멍투성이인데….’
발트,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헝가리…. 이 모든 전선들이 다 후퇴 중이었다. 그나마 대서양에서는 미국이 일본을 몰아붙이는데 정신이 팔려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는 있었지만, 함대를 빼서 지중해를 제압할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추가적으로 군대를 편성해 이탈리아로 진격하라고?
이탈리아군은 미안한 말이지만 끔찍한 약골, 잡졸들이었다. 별 도움도 안 되면서 보급은 또 있는 대로 받아갔기에 오히려 짐 덩어리나 다름없었지.
그렇다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영토 내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결코 좋은 선택이 될 수 없었다.
어차피 소련에게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고, 남쪽에서 ‘부드러운 아랫배’를 찌르고 싶다면 이미 열어 둔 발칸 방면에서 진격하면 되는 것이니까.
“제기랄… 이건 완전히….”
진창이다. 사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었다.
추축 3국 동맹의 원조였던 이탈리아가 이탈한다면 다른 추축국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비시 프랑스 정부가, 스페인이, 포르투갈이 과연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보고 있을까?
아니면 자기네들도 전쟁을 이탈할 좋은 기회로 보고 우르르 빠져나갈까?
독일의 산업은 이제 많은 부분 동맹국들에 의존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공장에서 생산된 탄약과 스페인에서 생산된 강철, 포르투갈에서 캐 온 텅스텐이 독일군의 무기가 되어 동부전선으로 향했다.
동유럽 동맹국들은 주로 인력을 차출하고 서유럽 동맹국들은 주로 산업역량과 물자를 제공했는데, 이제 동유럽이라는 방파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남은 것이라도 유지하려면 군대를 쏟아부어서라도 이탈리아의 탈주를 막고 괴뢰정부를 세워서라도 그들을 조종해야 했지만… 동부전선에서 밀어닥치는 소련군은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했다.
“게다가 무솔리니는 대체 어떻게 구하란 말인가?”
반병신이 된 첩보부는 이탈리아의 신정부가 무솔리니를 알프스 어디 산골짜기에 가두어 두었다는 정보를 어찌어찌 물어오기는 했다.
‘그런데 거기가 어딘데?’
하지만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있었다. 기습작전을 수행할 프리덴탈 특공대나 정예 공수부대원들은 티토를 잡으러 갔다가 모조리 사살당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총통이 마치 조커처럼 휘두르던 오토 슈코르체니는 현지에서 체포당해 모스크바로 끌려가 고문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어디선가 떠돌기 시작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케셀링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적당히 파시스트 한 놈을 골라잡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면 되겠지만… 애초에 이따위 전장에 끌려 들어간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짓이다.
다행히도 총통은 별 병신같은 짓을 시키기는 하여도 그 안에서의 자율성만큼은 보장했다. 모델이 동부의 전권을 받은 것처럼, 그 역시 이탈리아 내에서의 전권을 보장한다고 총통은 말했다.
언제 죽 끓는 듯한 저 히스테리로 뒤집어 버릴지는 몰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