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148화
“호오, 진짜 그냥 습격을 했단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작전명 ‘기사의 도약’(Rosselsprung)이라고….”
베리야는 내게 공손히 보고서를 가져다 바쳤다. 실제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치 독일은 티토를 생포해서 유고군을 무너트리기 위해 작전을 펼쳤다.
물론 실제 역사처럼 실패했지만.
“어이 보롱… 보로실로프! 자네 병사들이 꽤나 활약을 한 모양인데?”
“하하하하, 내가 좀 병사들은 잘 키우지!”
혹시나 몰라 유고군에 보낸 병력 중에 정예 스페츠나츠 대원들을 심어 두었다. 이번 습격을 막는 데에도 그들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고 보고서는 말하고 있었다.
목적은 사실 두 가지였다. 어쨌든 지금은 친소 지도자인 티토를 무사히 지켜내어 기껏 아군으로 만든 유고슬라비아가 산산조각 나서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는 것.
그리고 티토의 간담이 서늘해지게 하는 것.
실제 역사에서 티토는 공산권의 맹주이자 절대권력자로 등극한 스탈린에게도 반항했다. 각종 정보를 서구권에 넘겨주는 한편, 양다리 외교를 하며 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을 창설하고 양대 제국주의 국가의 영향력 팽창에 제동을 건 것이다.
지금이야 지중해를 지배하던 영국이 몰락하고 추축의 바다에 둥둥 뜬 섬이 될 꼴이니 소련이란 동아줄을 꽉 붙들고 있지만… 언제 제멋대로 자주노선을 탈지 몰랐다.
“티토만 한 거물도 몇 없지… 암.”
그는 그 정도의 거물이라 할 만했다. 아닌 말로 제3세계라는 말을 만들어 내고, 외세에 갈가리 찢겨 지배당하던 발칸의 소국을 국제 외교무대의 주역으로 만든 것이 바로 티토였다.
경호요원 겸 스파이들이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그리고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결코 그는 철두철미한 친소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민족주의자에 가까울 뿐.
“어찌하시겠습니까?”
베리야는 그렇게 물으며 눈을 빛냈다. 보통 누군가를 암살하거나 파묻어 버릴 때 나오는 표정을 한 그는 혀를 날름거리며 당장이라도 처치해 버릴 것 같이 굴었다.
하지만 난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는 기회가 아닌가? 하하하하하!”
* * *
“하여… 이렇게 ‘제안’을 하는 것이오.”
[서기장 동지의 제안은 분명히 흥미롭습니다….]
티토는 자율성을 원한다. 소련이 시키면 하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발칸 제 민족이 화합하여 자기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어차피 ‘내’가 무슨 집단농장을 강요하거나, 부르주아지를 모조리 숙청하라 명령할 것은 아니기에 일정 부분은 기우라고 할 수 있었지만. 아무튼 폴란드나 독일 등에 괴뢰정권을 세우려는 의도는 있었기에 아예 틀린 내용은 아니었다.
“우리는 유고슬라비아의 세계적 역할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소.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후발 독립국가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소. 제국주의의 지배에 탄압받던 제(諸) 민족이 단결하여 자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이룩하는 것!”
[….]
“소비에트 연방의 건국은 분명 세계 사회주의 발전에는 거대한 한 걸음이었으나 유혈이 낭자하고 폭력으로 가득 찼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소. 내 그 점만은 인정하리다. 필요한 유혈도 있었으나 너무 과도했어.”
내 옆에서 묵묵히 통화내용을 듣던 몰로토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화적인 경제성장과 공업화를 이룩했지만, 그것은 짓밟힌 농민의 피눈물 위에 세워진 것이라. 붉은 군대가 든 적기에는 노동자, 농민, 그리고 혁명가의 핏방울이 뚝뚝 흐르고 있을 것이다.
“또, 우리 소련은 한 번도 제국주의하의 피억압 민족인 적이 없었소. 일부 국토가 파시스트들에게 점령당하기는 하였어도. 하지만 유고슬라비아의 역사적 경험은 분명 제3세계의 피억압 민족에게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오!”
[아… 음… 서기장 동지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헌데….]
티토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헌데 제3세계는 대체 무엇입니까?]
“아! 하하….”
그렇다. 이 시대는 아직 냉전기를 상징하던 단어들을 모르고 있었다. 제3세계, 철의 장막, 상호확증파괴 같은.
어쩐지 도둑질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만.
“우리와 같은 제1세계 사회주의 자유진영에도, 영미로 대표되는 2세계 부르주아 제국주의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제3세력을 의미하오. 프랑스 혁명 당시 제3신분과 같이 막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되 아직 개발도상에 있기에 앞으로 발전하고 꽃피울 잠재력 역시 무궁무진한 국가들을 포함시킬 수 있겠소.”
[그렇다면 그 ‘3세계’에서 우리 유고슬라비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내 의도는 간단히 말하자면 ‘친구의 친구는 친구’였다.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동유럽 국가나 이집트, 인도네시아 같은 피식민 국가들은 심정적으로 반제국주의를 표방하는 소련과 더 가까울 수밖에 없다.
이런 국가들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상대적으로 영국 같은 제국주의 동맹국들을 내려놓을 수 없는 미국의 영향력은 축소된다. 소련은 상대적으로 이득을 볼 것이고.
“유고슬라비아는 우리 소련의 노선에 반대해 주면 되오.”
[예?]
“모든 사안에 대해 우리와 일치된 의견을 낼 필요는 없소. 그리해도 소련은 여전히 유고를 최우선 동맹국으로 삼아 지원할 것이며, 티토 동지가 뜻을 펴는 것을 도울 것이오.”
대놓고 소련의 모든 의견에 찬성표를 던지는 꼭두각시라면 누가 ‘비동맹 국가’들의 맹주로 추대해 줄 것인가?
“몇 가지 핵심적인 국가이익이 걸린 사안에 대해서는 다만, 유고가 우리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을 위하여 협조해 줄 것이라고 믿소.”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만은 확실히 우리 편을 들어주면 된다. 평소에는 소련과 각을 보이면서 큰소리를 치고 서방에도 손을 내밀며 중재자 노릇을 하지만 결국 소련을 도와주는, 일종의 조커 같은 패.
그것이 내가 유고슬라비아에 원하는 역할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더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좋소. 이는 결코 유고슬라비아의 국제적 영향력에 해가 되는 일은 아닐 것이오.”
초강대국의 주니어 파트너 정도로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것보단 훨씬 나았다. 실제로 체면 구겨 가며 소련 말을 들을 필요도 없고, 막말로 옮기면 약소국들에게 바람잡이 노릇을 하면 두둑하게 개평을 쳐 주겠다는 이야기였으니.
티토는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수락할 것이다.
다른 지도자들처럼.
* * *
동부전선은 독일이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전쟁 발발 전 국경선의 회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멀어도 올해 중 실전용 핵탄두 ‘다수’가 제작이 완료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소련은 다른 방향으로 눈을 좀 돌렸다.
극동에서는 한국에서의 총파업과 일본 공산당의 대투쟁을 일으켜 일본 제국주의를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만주와 내몽골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일부를 덜어내 지역을 자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조직을 키우고 있었고.
“프랑스 친구들은 최종적으로 동의한 건가?”
“예!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몰로토프는 크렘린의 특사로 한 번 더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이번에 만난 이들은 프랑스 내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던 프랑스 공산당의 밀사였다. 우리가 보내 준 활동자금과 온갖 지원을 받아먹은 이들은 이제 코가 꿰여 버렸다.
누가 뭐라 하여도 파시스트를 상대로 하는 이 세계대전의 최고 공헌자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순식간에 얻어터지고 전열에서 탈락했고, 오직 소련만이 나치 독일의 막강한 지상군을 상대로 맞상대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은 그 소련을 배후의 물주로서 지원하고 있었지만 아무튼 유럽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소련인이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은 받아먹은 돈 때문이든 아니면 이념적인 지도자라서든, 어쨌든 소련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의 해방이 그렇게나 못 해먹을 짓인가. 쯧쯧쯧….”
“알제리는 백수십 년간 지배하여 프랑스의 본토나 다름없다고 끝까지 주장하기는 했습니다만… 국민투표를 통하여 알제리인들이 프랑스 공화국에 잔류할지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당연히 잔류할 리 없지. 무슬림주의자든 아니면 사회주의자든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달가워하는 자들은 없었다.
프랑스가 지난 세월 동안 알제리를 근대화시켰다 해도 그것은 본토 이주민들(Pied-noir, 검은 발-구두를 신은 유럽 이주민들을 의미함)이 몰려 사는 대도시들 중심의 개발이었다.
대부분의 현지 토착 민중은 풍요로운 해안가의 대지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밀려나 사막에서 땅을 파먹으며 연명하거나 프랑스인들의 하인 노릇이나 하게 되었다. 이것을 세계 피억압민족의 해방을 주장하는 소련으로서는 두고 볼 수 없는 일.
프랑스 레지스탕스에게 빚을 지워 둔 김에 우리는 승전 이후 프랑스가 식민지를 독립시킬 것을 요구했다.
“아닌 말로 식민지가 그렇게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 민간 사업가들은 제 나름대로 식민지에서 막대한 부를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다 국민들의 세금을 퍼부어 만들어 냈을 뿐인데.”
물론 이는 프랑스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프랑스는 식민제국을 끝끝내 유지하겠다고 집착하며 이미 2차대전에서 충분히 희생당한 자국의 젊은이들을 알제리 전쟁과 인도차이나 전쟁에 던져넣었다.
결국 디엔비엔푸에서 패전하고, 제4공화국이 뒤집히며 드골이 집권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식민지의 정글과 사막에서 피를 뿌렸고, 온건하게 식민지를 독립시켰기에 후에도 영연방의 맹주 노릇을 할 수 있게 된 영국에 비해 손해만 잔뜩 입었다.
한때 영국과 버금가는 경제력을 지니고 서유럽 최고 강국으로 군림하던 프랑스는 분단된 서독 하나도 이기지 못할 수준으로 추락해 버렸다.
“또, 베트남의 호치민과도 접촉하여 우리 측 의사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래? 잘 됐군.”
거의 모든 식민지가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기에 식민지에서 활발한 공산주의 활동, 즉 친-연합군 저항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대국을 위한 것이란 핑계를 댈 수 있었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도 역시 똑같은 논리를 사용했다.
우리 소련은 극동에선 일본의 위협 때문에 개전으로 이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처신하겠다. 하지만 일본 제국이나 비시 프랑스에 대항하는 조직을 지원하는 것은 분명 연합군에 이득이 되는 일이 아닌가?
프랑스인들은 씁쓸하게 지켜볼 것이고, 미국은 소련이 계속 사회주의 영향권을 확장해 가는 것을 긴장하고 지켜보겠지만 아무튼 할 말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자네, 도미노 효과라고 내가 말해 주었던가?”
“예? 아니오, 그런 말씀은….”
“하하하… 그래. 도미노 효과는 말이네, 한 국가의 혁명으로 인한 정치 격변이 인접한 타국에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일세.”
예컨대, 프랑스 레지스탕스들과 협상해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에 탈식민 운동의 깃발을 올렸다.
여기서 만들어 낸 변화에 주목한 이웃 국가의 지식인들이나 농민들은 분명히 생각할 것이다. 우리라고 못 할 게 뭐냐, 다를 게 뭐냐고.
아프리카에서 제일 넓은 나라인 알제리가 혁명의 물결로 물들면 이는 인접한 모로코나 리비아, 이집트로 확산될 수 있다. 그다음은 같은 문화권을 공유하는 아랍 국가들로 퍼져나갈 것이고.
또, 인도차이나반도의 베트남이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농지를 배분하면 버마나 태국, 말레이시아의 소농들은 과연 그것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까? 탐욕스러운 지주와 무능한 왕정을 무너트리고 분배를 요구하겠지.
“우리는 민중의 요구가, 발전과 자유를 향한 그들의 열망이 터져 나올 환경을 만들어 주면 되네!”
우리가 미국처럼 막대한 돈을 퍼다 줘서 경제를 개발해 주고 우리 편으로 만들 능력은 없지만, 최소한 발목을 붙드는 족쇄들은 떼 줄 수 있었다. 구체제, 식민주의 압제자들, 지주 등 봉건적 압제자들과 같은.
그리고 하나 더, 가장 귀중한 것 역시 제공할 수 있었다.
아니, 이미 제공하고 있었다.
“그 학생들은 잘 지낸다는가?”
“아! 예. 아직 날씨에는 적응 중이지만….”
하하하, 적응이 안 되기는 할 것이다.
돌아가서 조국과 민족의 부흥을 이끌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무장한 유학생들이라도 따뜻한 남쪽 나라 출신들에겐 이런 겨울은 익숙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의 겨울은 아직 한참은 길게 남아 있었다.
식민지 출신의 유학생들 역시 이 겨울을 견뎌내고, 또 조국의 겨울을 인내해야 할 것이다. 봄, 싹이 트는 계절이 올 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