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145화
“빨리! 빨리 치워 버려!”
“자! 이쪽이다!”
벨라루스 SSR의 수도 민스크에서는 대대적인 방어전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스몰렌스크가 함락당하고, 붉은 군대는 드네프르강을 넘어 벨라루스 영토를 한 점 한 점 탈환하고 있었다.
이제 독일군은 소련군의 손에 돌려주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도시를 ‘소개’하고 있었다. 치안을 담당하던 SS 병사들은 민스크 게토에 마지막까지 격리되어 있던 유태인들을 폴란드 동부로 이송했다.
겁먹은 양 떼처럼, 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태인들은 독일군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려 나와 짐짝처럼 열차에 실렸다.
“우, 우린 어디로….”
“닥쳐!”
콱! 어린 손녀의 손을 붙들고 파들파들거리는 다리로 걸음을 옮기던 늙은 유태인 노파는 독일군의 발길질에 나동그라졌다. 손녀는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할머니를 붙잡고 울었지만 SS는 그런 그들에게 자비 따위는 베풀지 않았다.
“못 걸으면 그냥 저쪽으로 끌고 가! 딱 보니 일도 못 하겠는데.”
“옙!”
41년,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진격하며 벨라루스 전 영토를 점령했다.
가혹한 스탈린주의적 통치에 염증이 나 있던 많은 벨라루스 주민들은 독일군을 해방자로 여기며 반겼다. 학살당하기 전까지는.
독일인들은 ‘레벤스라움’에 슬라브인들이 살아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마스강에서 우랄산맥까지! 저 광대한 동유럽의 영토는 오로지 가장 우수한 아리안족이 통치하여야만 한다!
벨라루스에 살던 100만 유태인들은 사냥당해 수용소로 끌려왔다. 수도 민스크 주변의 말리 트로스테네츠 절멸수용소에서 이들은 말 그대로 학살당했다.
가족 친지들과 이웃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 총을 잡은 파르티잔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레벤스라움에 열등인종을 위한 공간은 없다]
독일군은 구호를 외치며 마을들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였다. 수만 명을 맨몸으로 지뢰제거를 위해 내몰았고, 또 산 채로 가둬 놓고 불태워 버렸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여유롭게 ‘정리’에 몰두할 시간이 없었다. 붉은 군대는 마치 해일처럼 지평선을 가득 메우며 진군하고 있었다.
유태인들이나 슬라브족, 운터멘셴들이 혹여나 전투 와중 ‘배후로부터의 중상’을 할 수 없도록 그들을 처리한 국방군과 SS는 이제 전투를 준비했다.
민스크 방어전의 사령관, SS 상급집단지도자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흐스키는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마구 고함을 쳤다.
“여기서 패배하면 우리 아내와 누이들은 악마 같은 소련군들에게 강간당하고, 부모들은 시베리아의 황량한 벌판으로 끌려가 얼어 죽을 것이다! 아버지 조국(Vaterland)을 위하여 싸우라! 게르만의 청년들이여!”
사실 그렇게 설명하는 것보다, ‘너희들이 소련인들에게 했던 짓을 돌려받을 것이다’가 일반적으로는 더 와닿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잖은 독일군들은 소련’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지만 열등한 무언가라고 생각할 뿐.
물론 그 멸시는 오래갈 수 없었다.
“제기랄! 좆대가리 날아온다!”
끼이이이이익!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가 울부짖는 소리를 내며 소련군의 미사일과 로켓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혼비백산하면서 각자의 전투 위치로 향했다. 철근과 콘크리트의 방벽 뒤로, 기관총과 소총을 잡고서.
제발 소련군의 눈먼 총알과 포탄이 그들을 찾지 못하도록, 병사들은 짧은 기도를 올렸다.
* * *
전투개시의 보고를 들은 모델 원수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 멍청이 새끼가 과연….”
총사령관으로서 그는 동부전선의 전 부대에 대한 군령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군령권으로 총구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을지언정 군인들, 특히 SS 장성들에 대한 통제는 거의 불가능했다.
친위대 제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국방군 장성, 즉 모델이 명령을 내릴지언정 ‘당과 총통의 친위대’인 SS가 전공을 세울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끝끝내 주장했다.
차라리 멍청하고 무능한 자들을 인사권을 가지고 쳐낼 수 있었다면 모를까. 아무튼 벨라루스의 최고 거점도시인 민스크의 수비는 SS가 결국 담당하게 되었다.
“폰 뎀 바흐, 그자는 민스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을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음… 아마 국가를 위해선 제 놈 골통보다야 중요하단 것을 알고 있겠지만 과연 그놈이 공사구분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 하, 하….”
전공을 위해 상급자에게 아부하여 최고 격전이 될 곳에 자진하여 기어 들어가는 멍청이를 보며 그들은 비웃을 수만은 없었다.
민스크가 돌파당하면 그다음에는….
“빌뉴스는 소련군을 막을 수 없겠지. 리가에 있는 아군 부대들은 쿠를란트에 갇히지 않도록 후퇴해야 할 것이고. 그다음에는 쾨니히스베르크와 바르샤바인데….”
거기까지 밀리면 전쟁은 진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도 열심히 미제 폭격기를 가져와 독일 본토를 두들겨 대는 미소 연합군은 코앞에 있는 베를린을 폐허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이 중요한 곳에 고작 저따위 잡병들을 배치해야 한다니!”
“….”
비무장 민간인들을 일방적으로 도살하는 데 특화된 SS의 학살부대들을 이끌고 윗대가리들에게 아부하는 것밖에 모르는 멍청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 막강한 붉은 군대의 최정예 기갑군들을 저지할 수나 있을까? 그놈들은 과연 소련군 전차라는 것을 본 적이나 있을까?
예비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간신히 끌어모은 보병 몇 개 사단뿐. 총통이 긴급 생산을 지시해서 투입한 ‘중전차대대’ 몇 개가 있었지만 모델은 그들에게 의존할지언정 신뢰하지는 않았다.
“후… 한스, 내 결정이 필요한 시간이 오면 불러 주게.”
“예! 원수 각하!”
사령관은 이 전선에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었다.
북부에서 프스코프를 탈환하고 밀고 내려오는 소련군의 발트 전선군. 르보프 방향으로 공세를 펼치며 헝가리를 북에서 압박하는 우크라이나 전선군. 유고슬라비아 해방군과 함께 추축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노리는 발칸 전선군까지.
수백만의 소련군을 상대로, 그리고 뒤통수를 노리는 미군의 폭격까지 염두에 두면서 그는 전쟁을 이끌어야 했다.
며칠이나 야근과 철야를 반복한 나머지 눈 밑의 짙은 음영이 턱까지 내려올 지경이 된 오랜 친구를 보며, 그의 참모장인 한스 발렌틴-후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철갑탄 장전! 1시 방향 부됸늬 3대!”
“거리 800에 조준, 발사!”
쾅! 포구가 불꽃을 뿜었다. 소련군 기갑수색대의 부됸늬 전차 한 대가 포탄에 직격당해 새카만 매연을 뭉게뭉게 뿜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온다!”
“괜찮아, 다시 장전!”
스몰렌스크에서 민스크까지 수백km를 후퇴해 온 1SS기갑군에는 새로이 4개의 중전차대대가 편성되었다.
601부터 604의 단대호를 받은 신편 중전차대대는 민스크를 사수하는 6SS군단의 양익에 배치되었다. 1SS기갑군의 본대는 모델 원수의 전략예비대가 되어 후방에 있었으나 가장 귀중한 전력인 중전차대대만큼은 최전선의 조커로 배치되었다.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전과를 올린 전차병들만이 선발되어 최고, 최신의 전차를 지급받아 만들어진 중전차대대는 그야말로 일당백이었다.
“와하하하하! 이놈 진짜 물건인데?”
깡! 둔탁한 금속음을 내며 소련군의 포탄이 장갑에 맞아 튕겨 나갔다. 전차장, 미하엘 비트만 중위는 껄껄 웃으며 감히 자신들에게 포격을 날린 소련군 전차를 향해 포구를 돌렸다.
“자 먹어라! 하하하하!”
8,8cm 71구경장의 거포가 포효하자 소련군 전차가 하나 더 터져 나갔다. 독일군의 최신예 중전차, ‘6호 전차 티거’는 압도적인 체급과 화력을 바탕으로 전차전을 위해 접근하는 소련군 전차들을 하나하나 잡아나갔다.
70톤이나 되는 강철의 야수는 쉬지 않고 포탄을 쏘아 댔다. 부됸늬 중전차의 100mm 대전차포를 지근거리에서 정통으로만 맞지 않으면 티거 전차는 웬만한 타격을 버텨 낼 수는 있었다.
[적들이 퇴각한다! 추가적인 매복 및 반격이 있을 수 있으니 추격은 금지한다.]
“음, 아쉽군….”
중전차대대의 전차병들은 거친 웃음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어지간히 운수가 나쁜 것이 아니라면 소련군 전차와의 정면 교전은 그저 격파 수와 훈장을 늘려줄 뿐이었다.
혈전을 뚫고 지나온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저만치 멀리 민스크의 하늘에서는 전투기들이 날아다니고, 쾅쾅 천지를 진동시키는 포성이 들려왔다.
물론 도시에서 혈전이 펼쳐지건 말건, 어차피 전차는 시가전을 위한 무기가 아니었다. 동유럽의 광막한 평원을 달려 적진을 돌파하고 적의 전차를 때려잡기 위한 것이었지.
어느샌가 조국을 위해 싸운다기보다는 전투의 쾌감 그 자체에 탐닉하기 시작한 에이스들은 전장을 바라보면서도 별 감흥들이 없는 것 같았다.
“하, 저기가 뚫리면 어찌 되려나?”
“뭐 그럼 빨갱이 새끼들 전차들이 더 몰려오겠지!”
그렇게 말하고 씩 웃은 비트만 중위는 콧노래로 반주를 넣으며 병사들을 독려하려는 듯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폭풍우 불어와도, 눈보라 휘몰아쳐도!”
“태양이 우릴 향해 미소지어도, 불타는 한낮에도 얼어붙을 듯한 밤에도!”
아스라이 먼 곳에서 들려오는 카츄샤 로켓의 휘파람 같은 발사음에도, 전차병들은 그것조차 배경 삼아 노래를 불렀다.
“먼지투성이 얼굴에도 우리들은 행복하다. 그래, 행복하지! 우리 전차는 폭풍 속에서 진군한다!
동장군이 몰아쳐 온 칼바람이 후우우웅 하는 소리를 내고 지나쳐 가도, 전차병들은 껄껄 웃었다.
아직도 활활 불타며 시커먼 연기를 풀풀 뿜는 소련군 전차를 배경으로 하고 부르기에는 적잖이 살벌한 감이 있었지만, 전차병들은 즐겁게 판저리트를 합창했다.
앞으로 무엇이 다가오는지 알지도 못한 채.
* * *
“씨발… 씨발! 야 탄약 좀 더….”
“으아악!”
압도적인 중량과 장갑으로 무장하고 소련군을 ‘손쉽게’ 격퇴한 중전차대대들에 비해 민스크의 방어군은 훨씬 고된 싸움을 치르고 있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방어전술을 지극히 잘 이해하고 있었다. 기관총 중심의 방어진지는 기관총 사수를 제압하거나 제거하면 화력이 급감한다는 것을 언제 깨달았는지, 기관총 사수의 머리 위로는 자동소총의 연사가 쏟아졌다.
병사들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철갑을 두르고 총탄을 튕겨내지는 못했기에 콘크리트와 철근의 벽 뒤로 숨었다.
그리고 그럴라치면 소련군의 유탄이 휙 하고 날아와 독일군의 방어진지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저기 아래까지 올라왔다!”
“기폭시켜!”
이들이라고 소련에서 배워 온 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향성 지뢰’, 격발시키면 해당 방향으로 파편과 폭발을 쏟아붓는 지뢰는 개발 자체가 어렵지 않았기에 순식간에 일선 부대들에 배치되었다.
벽돌 건물에 숨어 있는 독일군을 소탕하기 위해 계단을 올라오던 소련군 일개 분대는 순식간에 전멸하고 말았다.
물론 지향성 지뢰로는 건물을 포위한 소련군을 모두 소탕할 수는 없었다. 의욕만 높았지, 전투 경험이 부족한 6SS군단의 병사들은 가진 탄약을 순식간에 허투루 쏟아붓고는 탄약이 고갈되어 후퇴하거나 사살당했다.
“아, 제기랄… 이거, 윽….”
과열된 나머지 쿡오프가 일어난 기관총의 총열을 갈려던 기관총 사수 하나가 손을 데었는지 화들짝 놀라며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그들은 주로 일방적으로 화력을 퍼붓는 쪽이었다. 무력한 민간인들은 총을 들고 협박을 하면 두려움에 떨거나 자기네 말로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마을 중앙의 회관이나 공용 창고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주로 나무로 된 그런 건물의 문을 잠근 채 불태우며 기관총을 퍼붓는 일은 쉬웠다. 기관총에 탄피가 걸려도, 혹은 총열을 갈아야 할 때도 별다른 압박은 없었으니.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그동안 해 왔던 도살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소련군의 베테랑 사수들은 독일군이 엄폐물 밖으로 몸을 내놓을라치면 정확한 사격 한 방으로 화답해 주었다. 너무 달아오른 총열은 귀중한 기관총을 고장 냈고, 그러다 잠시라도 사격이 멈추면 소련군은 우글거리며 접근했다.
“아아아악!”
어머니 조국에 발을 딛고 선 또 하나의 침략자를, 소련군은 사살했다.
“파시스트 침략자들을 격퇴하라! 우라! 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