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144화
몇 번이고 외세에 짓밟혔던 도시, 스몰렌스크.
조국전쟁 시절 나폴레옹의 대육군에게, 이번 대조국전쟁에서는 파쇼 독일군에게 두 번이나 불타오른 스몰렌스크를 붉은 군대는 해방시켰다.
전쟁의 폐허 속에 숨어 살아남은 시민들과 도망쳤던 사람들은 다시 스몰렌스크로 모여들었다. 폐허를 다시 재건하기 위하여.
“붉은 군대 만세! 해방군 만세!”
“우라! 우라! 우라!”
처절한 사투 끝에 스몰렌스크를 해방시킨 예료멘코 대장의 제2벨라루스 전선군은 스몰렌스크 시가지에 진입해 퍼레이드를 벌였다.
시민들은 위풍당당한 붉은 군대를 보고 환호했지만 사령관은 결코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도시는 말 그대로 돌무더기 속에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무엇이 되어 있었다.
독일 9군은 북부집단군이 붕괴하는 동안 결국 스몰렌스크를 버려두고 퇴각했다. 그 과정에서, 소련군이 도시를 탈환하여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도시의 중요 시설들을 철저히 부숴 두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빌어먹을 새끼들.”
물론 소련군이 발사한 포탄 역시 한몫 톡톡히 했을 것이다. 또, 41년 스몰렌스크가 점령당하던 당시에 발생한 피해 역시 있을 것이다.
하지만 키예프 루스 시절부터의 유서 깊은 고도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을 본 병사들에게 그런 것이 생각 날 리 없었다.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며 파시스트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사령관 동지! 사령관 동지! 찾았습니다!”
“…알겠네. 내 가 보도록 하지.”
도시의 중앙은 특히 잔혹하게 부수어졌다. 폭격이 집중되었던 시 청사는 돌무더기가 된 채 독일군의 힘을 보여 주는 상징물로 남아 있었다.
그 밑에 깔린 소련군의 시신들과 함께. 최소한 수백 명의 소련군 사상자들이 사망 1년이 넘도록 건물 아래 깔려 있었고, 제2벨라루스 전선군의 병사들은 도시를 군사적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복구하면서 시신을 발굴하고 있었다.
무너져 쌓인 콘크리트와 벽돌 사이에서 차마 손댈 수 없이 부패한 시신들을 발굴하고, 인식표와 군번줄을 회수하는 일은 고되고 역겨울 법도 했지만 병사들은 묵묵히 일했다.
그 자신들, 그리고 전 소련 인민을 위해 잠시의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 장렬하게 전사한 용맹한 선배들.
병사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그들의 안식을 돕기 위해 사역에 착수했다.
“사령관 동지께 경례!”
예료멘코가 그들이 파헤치고 있는 현장에 왔을 때는 이미 동원된 중장비들과 수만 명의 인력 덕분에 어느 정도 폐허가 정리된 이후였다.
“찾았나? 제기랄···.”
“예, 여기···.”
영현이 담긴 검은 자루들은 조심스레 질 좋은 나무로 짜인 관에 안치되었다. 담당 장교는 병사들이 가져온 인식표를 바탕으로 하나하나 이름과 계급 등을 문서에 정리하고 있었다.
사령관이 다가오자 척 하고 경례를 붙인 그는 한 구석으로 예료멘코를 안내했다.
“후···.”
관은 홀로 외따로 놓인 채 붉은 소련 국기로 덮여 있었다.
관 주인의 이름을 읽으며, 예료멘코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야코프 이오시포비치 주가슈빌리···.”
“신원은 확실합니다. 인식표와 개인 소지품들로 교차검증을 완료하였습니다.”
“수고했네.”
서기장의 큰아들은 스몰렌스크를 지키려다 재작년에 전사했다. 이제서야 그 시신을 되찾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세 자식 중 아들 둘을 모조리 전쟁터에 바친 서기장의 심경이 어떠할까?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게 부패해 버린 아들의 시신을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예료멘코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기는 하였으되 제2벨라루스 전선군의 피해가 작지는 않았다. 혹여나 서기장이 무리한 진격명령을 내릴 경우 더 큰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일단 정치국에 보고하도록 하게. 어찌할지는 두고 보세나.”
“예! 알겠습니다!”
* * *
야코프 주가슈빌리의 유해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하자, 크렘린에서는 즉각 지시가 내려왔다.
[스몰렌스크 인근 전몰용사 매장구역에 매장하라.]
스몰렌스크에서 전사한 수만여 명의 용사들은 하나하나 인근 언덕에 매장되었다. 스몰렌스크 정동쪽에 위치한 발루티노 언덕에는 순식간에 전몰용사들을 기리는 묘역이 조성되었다.
서기장은 최대한 빨리 ‘해방된 스몰렌스크’를 방문할 것임을 알려 왔다. 제2벨라루스 전선군은 여느 군대가 그렇듯 최대한 권력자에게 좋은 모습만을 보이기 위한 준비를 했다.
발견된 유해는 소속 부대별로 모인 묘역에 재빠르게 매장되었다.
“…그놈이 여기 있단 말이지?”
병사들은 서기장의 도착 직전 간신히 완성된 활주로에 도열했다.
전용 수송기를 타고 날아온 서기장은 돌처럼 굳어진 얼굴을 하고 아무 말 없이 예료멘코 대장의 안내를 따라 전몰용사 묘역을 돌아다니다 결국 아들의 묘 앞에 이르렀다.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다 한마디를 툭 던진 서기장 때문에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 하지만 서기장은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닌지 외로이 서 있는 비석 앞으로 걸어갔다.
“야코프 I. 주가슈빌리 포병대위. 1907-1941.”
“….”
“어디서 찾았나?”
“예! 예! 시 청사의 폐허 아래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장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대답했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자기 아들이 폐허 밑에 1년도 넘게 묻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특히 그것이 강철의 독재자 스탈린이라면. 하지만 서기장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작은 비석만을 바라보았다.
전몰용사 묘역에는 끝도 없이 똑같이 생긴 비석들이 늘어서 있었다. 물론 이렇게 일일이 생몰년도까지 새긴 것은 시간이 부족했던 관계로 아직 많지는 않았지만.
“사진은 찍었나…?”
“아, 아니오 서기장 동지! 미처 사진은···.”
“잘했네.”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서기장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그를 수행했던 수십 명은 서기장의 불편한 기색을 감지하고는 후다닥 십수 미터 바깥으로 물러났다.
예료멘코 대장은 바쁘답시고 증거사진 같은 것을 남겨 놓을 생각을 하지 않은 멍청한 발굴담당 장교를 속으로 욕하고 있었지만 차마 무슨 말을 하지는 못했다. 아무튼 서기장은 짙은 감상에 젖어 자기 아들의 비석을 쓰다듬고 있었기에.
“가세! 할 일이 많네!”
“예?”
“언제까지 여기 있을 것인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야지.”
애써 웃는 척하며 이야기하는 서기장의 눈이 붉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것을 굳이 말로 하는 사람도 없었다.
진짜로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서기장은 유쾌한 척을 하며 우스갯소리를 하려 했다.
“자네들 그 영화 봤나? <레프 일병 구하기>라고··· 거기서 스페츠나츠들이 총을 참 잘 쏘더군···. 어, 그래 자네. 어땠던가?”
“그, 그렇습니다. 위대한 붉은 군대 우라!?”
“하하하하하, 아주 좋아. 우라! 우라!”
<레프 일병 구하기>는 칠 형제 중 여섯이 모두 전선에서 전사한 바람에 마지막 남은 아들 하나를 구하러 스페츠나츠가 전장에 뛰어드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굳이 그 영화가 생각난 이유가 무엇인지 말단 병사들도 알 수 있었기에, 그들은 서기장의 역린을 혹시라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조심 말했다.
* * *
“내 아들만 전사한 게 아니야. 그놈만 특별대우를 받는 것은 아주 불공평한 일이라고.”
“서기장 동지···.”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말하자 주코프는 애처로운 듯 나를 바라보았다. 딸만 넷인지라 자녀들을 굳이 전장에 보내지 않아도 되는 그는 내 심정을 감히 이해조차 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물론 ‘나’한테 스탈린의 두 아들들은 자식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스탈린부터가 자기 자식들과 그닥 사이가 좋지도 않았거니와, 솔직히 원래 나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큰 애들이 갑자기 자식이라니?
내 안의 스탈린은 울분과 광기로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나는 굳이 그 감정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풀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치열했던 스몰렌스크 전투를 기념하고 전몰자를 추모하는 의미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특혜라고 보기 어렵겠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조각상 이름은··· ‘어머니 조국이 부른다’가 어떻겠나?”
주코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조국은 짓밟힌 스스로의 복수를 위해 소련의 아들들을 불렀다.
적군의 피와 아군의 피가 메마른 도랑에 강이 되어 흐르도록, 조국의 아들들은 싸웠고 영웅적으로 죽었다.
“예브게니와 갈리나가 충분히 자라면, 제 아비가 무엇을 위해 싸우다 죽었는지 그곳에 가면 알 수 있도록. 영웅들을 매장한 묘역을 하나 만들자고.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가서 치열했던 대조국전쟁을 기억할 수 있는···.”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스탈린그라드의 마마이 언덕에 있는 <어머니 조국상> 을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 동상의 본명이 바로 ‘어머니 조국이 부른다’(Rodina-mat' zovyot!)였으니.
“그,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보다 더 크게 만들어 보세나. 우리 소비에트 연방이 어떤 혈전을 겪고 이 전쟁을 이겨냈는지 온 세계가 알도록.”
주코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비서가 또 보고서 한 뭉치를 가져왔다.
“민스크 진격?”
“아! 예, 그렇습니다 서기장 동지.”
소련군은 이제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전선에서 독일군을 밀어내고 있었다.
모델은 보급선이 안정화될 수 있는 위치까지 후퇴하며 소련에게 소모를 강요했다.
스몰렌스크부터 베를린까지는 1,400km.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로부터 베를린까지의 거리보다 200km나 멀었다.
하지만 민스크 진격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전장의 판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독일군은 개전 2주 만에 민스크를 함락시키고 질풍같이 밀고 들어왔다. 소련군의 철벽같은 방어에 막혀 저지되었고 결국 레닌그라드에서 패배하여 다시 밀려났지만.
민스크 탈환으로 본토 코앞에 소련군이 등장하면 과연 독일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알겠네. 민스크 전투는 누가 총괄할 것인가?”
“예, 로코솝스키 원수가 제1, 제2, 제3벨라루스 전선군을 이끌 것입니다. 총 160만 병력으로 파쇼들의 군대를 짓밟아 버릴 것입니다!”
단위수부터가 어마어마했다. 독일군은 이제 200만이 넘는 완전손실을 기록하고 있어 병력자원을 박박 긁어 끌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은 어떤가. 스노우볼이 휙휙 굴러간 나머지 한반도 정도 크기인 벨라루스에 160만 병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첩보부에서 가져온 모델의 기본 전략은 ‘손실 누적’이었다.
방어전에서는 전술적으로 방어자가 훨씬 유리한 만큼, 전략적 대패를 겪지 않으며 소련군에게 피해를 계속 입힌다면 감당하지 못하고 평화협상을 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게 착각임을 보여 주도록 하게. 주코프 장군. 알겠나?”
“예! 서기장 동지!”
물론 실제로 모델이 막아 내도 별 상관은 없다.
그냥 베를린에 핵이 떨어지겠지. 오히려, 너무 잘 막아 내는 게 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베를린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들도 핵의 불길로 물들어 버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