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140화
조선의 주요 항구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파업이 일어났다. 이미 20년대에 파업을 경험해 보았던 노동자들은 순식간에 몇 개의 노조로 조직되었다.
인천하역노동자회, 원산부두노동자연맹 등 노동조합은 쌀이 수출되는 항구를 점거하고 농성파업을 벌였다. 뿐만 아니라 파업은 다른 분야로도 확산되어 고무공장, 석유공장에까지 이르렀다.
“더 이상 침략전쟁에 협조하지 않겠다! 일본은 물러가라! 왜놈 쪽발이들은 물러가라!”
“저, 저, 저… 빨갱이 새끼들!”
일본인 감독들의 괴롭힘과 장시간의 고된 노동, 쥐꼬리만 한 월급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순식간에 급진적인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되어 우리 나선다 승리의 그날까지~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해골 두쪽나도 지킨다!”
부두와 항만에서 노랫가락이 울려퍼졌다. 우렁찬 파업가를 들으며 노동자들은 억센 팔뚝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붉은 깃발이 오르고, 붉은 머리띠를 맨 사람들이 곳곳에서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파업! 총파업이다!”
“제국주의는 종이 호랑이일 뿐이다!”
일제라고 해서 작금의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쯤 되면 공산당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디서 저럴 자금이 나왔는지. 30년대의 탄압 이후 어디론가 숨어들었던 조선공산당의 적색분자들은 막대한 돈줄을 손에 쥔 것 같았다.
[하루 5전씩 파업 기금을 모으자]
[파업이 끝날때까지 술과 담배를 금하자]
물론 저들은 조합원들에게 파업을 위한 자금을 걷고 있었다. ‘한 푼의 공비(空費)도 반동이다’라며 금주, 금연을 통해 일당에서 받은 돈을 떼고 있었지만 그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자금이 넉넉한 것 같았다
“설마 내지의 불령단체들이?”
“그…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일본공산당 역시 당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하에서, 음지에서 들불처럼 세를 불려 나갔다. 주요 조직원들이 대부분 검거당하고 고문 끝에 옥사했지만 또 어디선가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나 저항의 횃불을 들었다.
“저놈들을 그냥 짓밟아 버릴 수도 없고… 끄응….”
예전 원산 총파업 때에는 어용 노동단체를 조직하고, 생계를 통해 압박해 파업을 말려죽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양상이 조금 달랐다. 파업이 지속되는 것이 쌀 유출을 막아 생계에 더 유리할뿐더러,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자금 때문에 말려 죽일 수도 없게 되었다. 어용 노릇을 시켜보려 포섭한 이들이 린치당해 맞아 죽었다는 것을 안 경찰들은 자기네들도 비슷한 꼴을 당할까 벌벌 떨었다.
또, 무작정 밟아 버리면 누가 거기서 일할 것인가! 대체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전쟁에 청년들이 싸그리 끌려갔으니 몇천, 몇만 명이나 되는 저 빨갱이들을 모두 감빵에 쳐넣으면 선적과 하역이 마비되는 것은 똑같은 것이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걸 왜 나한테… 아니지.”
전임 경무국장이 테러범들에게 사살당해 새로 경무국장에 취임한 니시히로 다다오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당황한 것 같았다.
“제기랄… 군대에 협조 요청이라도 하게. 정 안 되면 주둔군 투입해서 진압하고 군대에 사역 좀 시키면 되는 것 아니겠나?”
“예! 알겠습니다!”
강경하게 진압해야 했다. 본때를 보여 줄 수 있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황국이 승승장구하고 있겠거니 했지만 고위 관료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태평양에서 미국은 결사적인 항전을 통해 일본의 동태평양 진출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지나 진출에서 단련된 에이스 파일럿들은 하나하나 태평양에서 산화했고, 미국은 압도적인 수의 항공기를 바탕으로 황국의 무적함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나마 중국으로 간 육군의 사정은 조금 낫다 할 만했다. 중국 공산당의 사실상 방조하에 일본군은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을 대륙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지나대륙은 도무지 끝을 모르게 넓었다. 장개석의 병력 몇만 명을 섬멸하는데 성공해도 또 어디선가 병력이 징집되어 나왔다. 한 손이 열 손을 못 이긴다고, 일본군은 점점 물량에서 밀려 지쳐갔다.
거기에 극동에 자꾸 스믈스믈 기어오는 소련까지.
‘지금 이 파업도 소련이 배후조종하는 게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선과 일본의 좌익단체들을 조종하는 것이 소련이 아닌가?
소련은 누가 뭐래도 미국과 가장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었다. 미국이 일본을 제초제로 말려 죽이고, 소련이 노동자들의 파업을 선동해 정치적 불안정을 유도해 황국을 몰락시키려는 것이 아닐까?
“쯥, 너무 나갔군….”
물론 어디까지나 자생적인 빨갱이들, 노조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분명 경제상황은 나빠지고 있었고, 국민들에게는 과중한 부담이 쏠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배후를 추론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소련이 배후면 무엇 할 것인가? 소련에 선전포고라도 할 건가?
* * *
“극동에는 지원금이 마련되는 대로 바로바로 보내도록 하게. 당장 한 푼이 아쉬울 테니.”
“예!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일본에 고엽제를 잔뜩 뿌려 말려 죽인다면 만주나 조선을 수탈해 모자란 만큼을 채우려 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런 참사를 막기 위해 조선과 일본의 공산당을 통해 파업을 조직했다. 조선공산당은 재건 이후 세력의 과시와 대중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파업에 동참했다.
일본공산당은 탄압 때문에 지하로 숨어들었지만 ‘제국주의 침략전쟁으로부터 인민들을 구원하기 위해’ 파업을 이끌었다. 안 그래도 식량 가격 폭등으로 부글부글 불만이 많던 일본 노동자들은 적극적으로 공산당의 파업 선동에 협력했다.
그 결과, 일본은 이제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미국한테 진 빚은 톡톡히 갚을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전후의 조정에도 충분히 개입할 수 있겠고.”
극동에 당장 병력과 자원을 투입하기에는 독일을 밀고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도 벅찼다. 모델은 한 발 한 발 물러나고는 있었지만 독일인의 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효율적으로 짜내어 소련군을 갈아 버리는데 사용하고 있었고.
이후 이 지역을 모조리 미국 영향권 하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는 발판이 필요했다.
소련이 일본을 뒤흔들어서 미국의 전쟁 수행을 도와주었으면 미국 역시 반정부 투쟁을 했던 조직들을 일방적으로 탄압하지는 못할 것이다.
“서유럽과 극동을 우리 영향권 안에 넣을 수 있다면, 우리는 차르가 그토록 바랬던 부동항을 수십 개씩이나 확보하는 게 아닌가! 하하하하하!”
“그렇습니다! 서기장께서는 실로 위대하십니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가 바다로 나갈 출구를 얻기 위해 발트해 앞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즉 레닌그라드를 건설했다. 하지만 발트해의 출구는 덴마크와 독일이 틀어막을 수 있었다.
또 다른 바다로 나갈 출구인 흑해는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투르크를 조종해 틀어막아 버렸다. 흑해에서 지중해로 나간다 하더라도 수에즈와 지브롤터를 틀어쥔 영국은 러시아, 소련의 확장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극동에서 한반도와 일본을 손에 넣는다면 드넓은 태평양으로의 출구가 열린다. 터키를 굴복시키고,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이란, 이집트와 알제리에서 좌파의 봉기를 통해 민족주의 정권을 세우면 인도양으로 남하할 수 있다.
미국은 영국과 서유럽의 동맹국들을 통해 유럽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겠지만 독일을 탱크로 밀어 버리고 프랑스 레지스탕스들과 협조해 정권을 손에 넣는다면? 영국은 ‘그냥 섬’이 될 뿐이다.
소련의 전후 세계전략은 대략 이러했고, 최소한 극동에서는 톱니바퀴가 착착 맞아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어떻게 됐나?”
“아드리아해를 건너 파르티잔 출신자들을 밀항시키는 중입니다. 곧 볼로냐와 밀라노에서 파업을 터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장군들은 자기네들이 독일군에 붙들린 사이 세계를 손아귀에 넣고 주물럭거리려는 베리야가 고까운 듯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날은 추워져 더 이상 군대를 급기동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마 내년, 43년의 늦은 봄쯤은 되어야 비로소 소련군은 다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첩보전에 열중할 수밖에.
“다만 아쉬운 것은… 독일 본토에서는 혹독한 탄압 끝에 대부분의 조직이 절멸되어 첩보공작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군내 첩보망은 살아 있으나 전위당이 될 만한 대중조직은….”
“독일은 그냥 짓밟고 새로 정권을 세우는 것으로 하지. 이쪽으로 망명한 이들은 꽤 있지 않나?”
“아, 그러면 그렇게 알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소련은 동독 부분을 점령한 후 35년에 소련에 망명했던 독일 정치인, 빌헬름 피크를 국가수반으로 내세웠다. 현재는 코민테른의 수장이지만 어쨌든 우리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여기서도 유럽의 최강국인 독일은 어떻게든 우리가 조종해야 했기에, 소련 군정하 독일정부를 출범시키기 위한 사전 준비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독일은 이렇게 토막 내버리고….”
“호오….”
내 손가락이 지도를 슥슥 지나가자 사람들의 눈동자가 휙휙 이리저리 지나갔다.
하나 된 독일은 너무나 강력했다. 프랑스와 영국을 몇 번이나 쥐어 패고,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패배한 이후에도 다시 유럽을 주도할 수 있을 정도로.
동서 두 토막 정도로는 독일 민족주의의 발흥을 막을 수 없었다. 갈가리 찢어 버리고, 공산 프랑스와 함께 자근자근 밟아 버려야 독일이 소련의 적수로 떠오르는 것을 원천 차단할 수 있었다.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는 신생 폴란드에게 떼어주도록 하지. 동프로이센은 리투아니아에 합병시켜 버리고….”
동쪽은 대략 실제 역사에서 동독이 차지한 몫과 비슷했다. 오데르-나이세 서쪽의 슈체친까지 폴란드령으로 넘겨 버리는 것도.
“대신 대서양으로 나가는 항구를 위해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함부르크는 이 동쪽 독일, ‘브란덴부르크 공화국’ 에 넘겨주세나. 남쪽 바이에른과 바덴-뷔르템베르크는 또 따로 찢어 버리고….”
그리고 ‘서독’은 최소 두 개 이상으로 찢어야 했다. 독일제국 시절의 영토를 반이나 뺏기고도 유럽 최강국으로 올라선 잠재력은 절대 무시할 수 없으니.
“서기장 동지, 이렇게 되면 폴란드가 너무 커진 것 아닙니까? 폴란드에게 이렇게 힘을 실어주면….”
“뭐, 최소한의 보상이라고 하지.”
카틴 숲 학살은 이 세계에선 드러나지 않았다. 스몰렌스크는 계속 최전방이었기에 독일인들은 한가롭게 어디 유골이 없나 하면서 파헤칠 시간이 없었다.
물론 지금 소련은 폴란드 출신 망명자들로 구성된 ‘폴란드 해방군’을 키워 주고 있었다. 향후 폴란드 해방에서 전공을 세워 소련의 명령을 받아 폴란드를 통제할 이들을.
한 줌도 안 되는 자유 폴란드 망명정부는 무려 2개 야전군이나 되는 폴란드 해방군에 비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군사력이란 채찍으로 통제를 한다면 당근도 필요한 법. 독일이 열심히 개발해 둔 프로이센 영토는 폴란드에겐 최고의 당근이 될 것이다. 영국 망명정부와 함께 도망간 폴란드 망명 망명정부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못했으니 얼른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도록 처박아 놓고.
핵무기의 개발과 함께, 세계전략은 점점 윤곽이 잡혀가고 있었다.
“이젠… 독일군을 빨리 무너트리기만 하시오. 알겠나?”
“예! 서기장 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