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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탈린이 되었다-139화 (139/300)

# 139

139화

전쟁을 수행하려다 당장 아사 위기에 처한 일본 수뇌부는 하급자들을 닦달했다.

“만주 짱꼴라들, 조센징들 천만 명이 굶어 죽어도 좋으니 만주와 조선반도의 식량을 모조리 긁어 가지고 와!”

“각하, 만주와 조선에서는 민심이 날로 불안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경성, 부산 등 대도시에서는 조선공산당이 다시 세를 펴고 있습니다….”

“제기랄! 당장 내지(內地, 일본)가 굶어 죽을 마당에 식민지 놈들이 문제인가! 지금 내지라고 공산당이 조용히 있는 줄 아나!”

한 해 농사가 미군의 제초제 때문에 모조리 작살나 버렸다. 쌀값은 벌써부터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고, 곳곳에서 쌀을 사재기하려는 큰손들이 설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전쟁으로 인한 업무 과중으로 공장 노동자들의 불만이 날로 커지는 판에 쌀값 폭등이라는 치명적인 악재가 겹치면? 일본인들은 불과 몇십 년 전에 전쟁과 식량난 때문에 무너져 버린 제국을 하나 알고 있었다.

“저 로스케 놈들이 호시탐탐 극동을 엿보고 있는데….”

러시아 제국은 러일전쟁과 1차대전에서 패배하고, 곡물 수출로 노동자들의 빵값이 폭등하여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차르 정부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피의 일요일’처럼 총칼을 들이대며 진압했지만 결국 몇 년 가지 못해 볼셰비키 혁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작금 일본의 정세는 그 당시의 러시아 제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사실 더 심하다고 해도 좋았다. 최소한 그 당시에는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에서 음흉하게 웃고 있을 소련이 없었을 테니.

당시의 공산당은 별다른 자원도 인력도 없는 군소 조직이었으나 이제 그들은 전 세계 무산계급의 조국을 자처하는 소련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당장 그들마저 적으로 돌리면 육군이 붕괴할 위기에 처해 있었기에 감히 공산당을 탄압할 수도 없었다.

“아무튼 어떻게든 쌀이 있어야 저 빨갱이 놈들이 설치는 꼴을 좀 덜 보지 않겠나! 이는 천황폐하의 뜻이기도 하네.”

“…덴노 헤이카 반자이!”

* * *

“아이고, 이것마저 없으면 우리는 굶어 죽습니다요!”

“썩 꺼져! 요보놈, 이걸 그냥 콱!”

아이쿠,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진 시골 아낙은 어디가 부러졌는지 끙끙거리며 바닥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악질 순사로 동리에서 유명한 나까무라는 간신배마냥 기른 수염을 배배 꼬며 우마차꾼의 어깨를 두들겼다.

“우리 서에서는 이만큼이나 공출을 걷었다고 꼭 군수 어르신께 잘 이야기해 드리게. 알겠나?”

“예이! 알겠습니다유.”

“자, 이건 가면서 요기라도 하시게.”

음흉하게 웃으며 봉투 하나를 허리춤에 찔러 넣어준 나까무라는 아직도 바닥에서 끙끙대는 아낙 옆에 침을 칵 뱉었다.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으로서 황국의 전쟁에 협력하길 거부해? 그러니 네놈들이 열등한 조센징인 것이야!”

“하늘이, 하늘이 네놈들을 용서치 않으실 것이다!”

사람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순사의 행패를 바라만 보아야 했다. 하늘이 저놈들을 벌할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제의 순사와 읍면의 관리들은 상부에서 명령한 쌀 공출에 눈이 시뻘게져 있어 다른 쪽을 주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공출에 몰두하는 사이, 청년들은 야밤에 돌아다니며 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날’이 오고 있소…!”

“저 왜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줄 날이 올 것이오! 다들 준비하시오!”

그들은 천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역사에 주목할 뿐.

갓 수확한 쌀마저 한 톨 남김없이 닥닥 긁어간 일본놈들의 뒤통수에 소리 죽인 욕설만을 퍼부으며 아린 마음을 달래야 했던 농민들 사이에 소문은 들불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왜놈들 황궁이 불바다가 된다더라!”

“이미 저놈들은 굶어 죽고 있다 카더라. 우리가 조금만 더 버티면…!”

그러나 대부분은 그저 이를 악물고 참을 뿐이었다. 나라 잃은 백성의 비참함을 곱씹으며.

일본은 강대했고, 민초들은 말 그대로 풀뿌리처럼 군홧발 아래 짓밟힐 뿐이었다.

민초들이었다면, 짓밟힐 뿐이었을 것이다.

* * *

전국 팔도에서 긁어모은 쌀은 조선의 주요 항구로 모여들었다. 원산, 인천, 군산, 부산 등 일본으로 가는 쌀이 모여드는 대형 항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북적거렸다.

혼슈의 주요 항구들이 봉쇄되었다 한들 소해작업은 진행 중이었으며, 기뢰가 설치되지 않은 다른 작은 항구들도 충분히 많이 있었다.

곧 떨어질 출발 명령을 기다리며, 일제의 수송선들은 항구에 가득 쌓인 쌀가마니를 차곡차곡 싣기 시작했다.

‘그 날’ 전까지는.

“여러분! 조선인 노동자 여러분!”

우렁찬 목소리가 항구에서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울려 퍼졌다. 연일 배에 물자를 선적하고 하역하느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항만노동자들은 잠시라도 쉴 핑계 삼아 우렁찬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선인 노동자 여러분! 저는 이 인천항 제2부두에서 일하는 김용식입니다!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높이도 쌓인 쌀가마니 위에서, 노동자 한 사람이 팔뚝을 걷고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에는 잔뜩 핏대가 솟아올랐다.

“이 많은 쌀들을 보십시오! 우리 조선의 농민들이 피땀 흘려 일군 쌀입니다! 하지만 이 쌀은 우리 조선인들이 결코 먹을 수 없습니다. 간악한 왜놈들은 우리가 일군 쌀을 저들의 전쟁을 위해! 제 놈들의 병사들을 먹이기 위해 우리에게서 앗아 가고 있습니다!”

“휘이이이익! 저놈 끌어내! 끌어내려!”

“옳소! 옳소!”

일본 본토의 쌀값 폭등은 이미 조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벌써부터 발 빠른 사업주들은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점심 배식량을 줄여 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먹을 것이 없어 처자식들이 배를 곯는 것을 보아야 했던 부두의 노동자들은 하나둘씩 동의를 외치기 시작했다.

물론 일제의 순경들이 그를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권총을 들고 칼을 찬 경찰들이 튀어나와 김용식이 연설하는 쌀가마니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매일 죽도록 일하면서도, 잔업에, 특근에, 철야에! 뼈가 부서져라 일하면서도 배불리 먹지도 못하는 더러운 제국. 우리가 개입니까? 우리는 사람입니다! 살아 숨 쉬는 인간! 씨발, 밥 한번 먹어 보자! 개새끼들아!”

“잡아라! 쏴 버려!”

노동자들이 웅성대는 사이에 순사들은 권총을 탕, 탕 발사했다. 구릿빛 억센 팔뚝에서 붉은 피가 튀었다.

“아악! 조선의 노동자들이여, 내 형제님들이여! 저놈들이 쌀을 가져가게 하지 마십시오…!”

“입 닥쳐! 빨갱이, 조센징 새끼!”

그가 비칠거리자 어느샌가 올라온 순사 하나가 그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질질 끌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명의 조선인 부두 노동자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뭣들 하는 거야! 다시 일이나 해! 게으른 것들….”

“우리더러 게으르다 했소?”

“그래! 네놈들이 게으르니 나라를 빼앗긴 것 아닌가? 우리 일본인들처럼 부지런히 일해야… 컥!”

어디선가 날아온 짱돌이 조선인들에게 훈계하던 일본 경관의 얼굴에 적중했다. 코피를 터트리며 얼굴을 쥔 경관은 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을 붙잡고 악을 썼다.

“누구야! 어느 놈이냐!”

“우리는 기계처럼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일만 하는데, 우리가 게으르다고?”

“퉷! 개만도 못한 새끼. 뚫린 아가리라고….”

야유 소리와 함께 일본인 경찰들에게 짱돌이며 쓰레기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일본 순사들은 권총을 겨누며 위협했지만, 거친 부두 노동자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야유를 하며 오물을 던졌다.

“그 게으른 놈들 없으면 굶어 뒈질 것들이 말이 많아!”

“우우, 우우, 왜놈들은 꺼져라!”

소란을 보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햇볕에 그을려 시커먼 얼굴과 고된 노동으로 다져진 억센 팔뚝을 한 사람들이.

피를 흘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김용식에게 몇몇 사람들이 뛰어왔다.

“용식아! 용식아! 정신 차려 봐라!”

“너, 너… 괜찮으냐!”

“모두 물러나라! 당장 일터로 돌아가라!”

점점, 노동자들은 순사들을 노려보며 한 발짝씩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경관들은 이제 등골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불과 십여 년 전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더랬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부당대우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부두의 하역노동자 조합을 중심으로 뭉쳐 총파업을 일으켰었다.

“제기랄….”

서슬 퍼런 눈빛을 보며, 포위당한 경관들은 욕설을 내뱉었다. 가지고 있는 총알보다, 분노한 노동자들이 더 많았다.

“쏴라!”

“죽여 버려!”

* * *

“깃발을 올려라!”

“와아아아아아!”

부두 한구석에서 벌어진 경관의 노동자 살해사건을 기폭제로, 인천항에서는 파업이 시작되었다.

손으로 그린 태극기와 붉게 물들인 깃발이 부두에 올랐다. 노동자들은 부두를 거점으로 바리케이드를 쌓아 경찰 병력의 진입을 막았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노동시간을 일 10시간으로!”

“쌀을 다오! 먹을 것을 다오! 우리 땅에서 난 쌀, 우리가 좀 먹어 보자!”

갖가지 구호가 터져 나왔다. 흰 천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플랑이 곳곳에 나붙었다. 노동자들은 각자 머리를 싸매고 요구사항을 적어 내려갔다.

[조선 땅에서 난 물산을 수탈하지 말라]

[특근 철야 수당을 제때 지급하라]

바리케이드를 쌓아 항구에 진입을 막은 이후, 노동자들은 항구에 바리바리 쌓인 쌀로 간만의 포식을 했다.

“어우, 뱃가죽이 등가죽에 들러붙는 줄 알았는데….”

“간만에 포식 좀 해 봤네!”

허접한 보리쌀이며 조밥을 섞어서 설설 담아 주던 급식소의 밥공기에 한가득 쌀밥을 푸지게 담은 이들은 희희낙락했다. 집에 있는 처자식들이 굶지 말라고 보자기에 퍼낸 쌀을 담아 가지고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분, 잠시만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이 파업을 이끈 사람이 비로소 앞으로 나섰다.

“구라파와 태평양의 전쟁은 비로소 혁명적인 전기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은 왜놈들의 본토를 폭격하여 불바다로 만들고 있고, 소련은 독일의 나치스에 대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주먹을 불끈 쥔 채 연설하는 그에게 모든 사람의 눈길이 집중되었다. 손가락 몇 마디가 잘린 뭉툭한 주먹이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끓어오르는 군중의 열기를 본능적으로 감지한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지금 인천항뿐만 아니라 원산, 부산, 그리고 군산항의 노동자들 역시 파업에 돌입할 것입니다! 항만노동자들은 쌀 선적을 거부함으로써 일본을 굶겨 버릴 수 있습니다. 저 거대한 제국을 우리 손으로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와아아아아아!!”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 개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던 노동자로서의 설움. 그렇게 맺혔던 한이 튀어나와 함성이 되어 온 부두를 울렸다.

“우리 손으로! 우리 힘으로 해방을 쟁취합시다! 해방 조국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만세! 만세!”

남자, 조봉암의 연설에 부두 노동자들은 다 함께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목청껏, 그동안 일본인에게 받았던 설움을 씻어 보려 하며 수천 명이 내지르는 함성은 깜깜한 인천 앞바다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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