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137화
파상공세 앞에서 꾸역꾸역 버텨 내던 독일군은 새로운 대적을 하나 더 맞이해야만 했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러시아를 지켜 온 수호신. 유럽의 정복자 나폴레옹을 실각시키고 차르 알렉산드르를 이끌어 파리에 입성하게 한 대장군!
“동장군이 왔다! 으하하하!”
기어이 웃음을 터트리는 나를 보면서 모두가 즐거워했다. 아마 다들 진짜로 기분이 좋기는 했을 것이다. 이번 겨울 역시 지난 겨울만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추웠다.
“파쇼 돼지들은 아직도 충분한 동계 피복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영 엉뚱한 곳에 자원을 쏟아붓느라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듯합니다.”
“암, 암. 우리가 얼마나 그걸 위해 노력했었나?”
보로실로프는 기분 좋은 듯 끄덕거렸다. 정규전 지휘관으로서는 낙제점이었던 그는 군정 방면에서는 괜찮은 재능을 보여 주었다. 그가 훈련시킨 스페츠나츠 부대들은 밤을 틈타 적의 후방으로 공수 강하해 침투했다.
우리가 간신히 전해 주는 소량의 보급으로도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그들은 독일의 보급선을 계속 교란시키고 있었다. 철도를 끊고, 도로를 폭파하고, 차량을 저격하고, 파르티잔 부대들과 협조해서 보급대를 습격하는 것까지.
동장군님의 활약과 스페츠나츠의 작전으로 인해 독일군의 보급은 갈수록 나빠져 가고 있었다.
포로로 잡혀 심문당하는 독일군들은 한결같이 이야기했다.
“먹을 것이 부족합니다. 얼어 죽은 수송용 말이 제가 먹어본 마지막 고기입니다! 뭐… 노획한 소련군 장화를 뺀다면 말이지요….”
“저는 비겁자가 아닙니다. 총알이 없는데 싸우라는 명령을 받아서 이렇게 포로가 됐을 뿐이지….”
전투 이후 전장에서 시신을 조사해 본 결과도 비슷했다. 영양결핍, 동상, 각종 질병들이 독일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제 저들은 명백히 한계에 달해 있었다.
“현대군은 공격부대요. 그리고 붉은 군대는 현대군이지!”
그리하여 야심차게 공격을 명령했다.
* * *
“이걸 못 민다고? 이걸?”
발터 모델은 방어의 사자가 맞다! 수많은 소련군의 목숨과 부상으로 그 이름에 한 줄 찬란한 기록을 더해 주고 만 것이다.
단 몇 킬로미터를 전진하기 위해 희생당한 우리 군대 병사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
물론 이제 독일측의 손실이 우리 쪽을 초과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대규모 포위전을 제외하면 1:1을 넘어가지 못했던 교환비가 드디어 소련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저 잡병들을 상대로도 아직 1대1이라고? 레닌 동지 맙소사!”
방어자의 이점을 살려, 모델은 철저하게 소련군이 방어선 뒤로 돌파하는 것을 차단하고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여 가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더 아껴서 후퇴시켜 다음 방어선에 집어넣는 그의 신들린 방어전술에, 소련군은 불필요한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서기장 동지….”
“면목 없습니다….”
뒷목이 뻐근해 왔다. 아… 으어….
내가 뒷목을 잡고 얼굴을 찡그리자 수많은 참석자들이 경악하며 내게 몰려왔다.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알 수 있었다.
아… 이렇게 가는 것인가?
* * *
“서기장 동지!”
“아빠!”
“코바!”
눈을 떴을 때 내 주위에는 십수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종종 보는 내 주치의는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기가 질려 하면서도 차분하게 내 상태를 이야기해 주었다.
“대략 하루 정도 누워 계셨습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심장신경성 실신과 피로가 누적된 결과물로 추정됩니다. 앞으로는 술과 담배를 줄이시고 건강에 유의하시어….”
“알겠네, 알겠네….”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하며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일종의 기회였다. 누가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기회.
권력을 줄줄 흘리고 다닐 것 같은 내게 가까이 있을수록 권력의 단물을 빨아먹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단물이 흐르는 자리에 밀접히 붙어 있는 자야말로 힘 있는 자.
눈물 콧물 흘리며 내 침대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고 흐느끼는 저 베리야와 같은 인간이 바로 차세대 소련 권력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베리야… 보로실로프… 몰로토프… 주코프….”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자는 내 딸, 스베틀라나를 제외하면 저렇게 네 명이었다. 부됸늬가 살아 있었다면 아마 주코프를 대신해 끼어 있었겠지만 아무튼.
스베틀라나는 아버지가 깨어나 놓고는 자기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다는 것에 경악한 듯했지만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만약 곧 죽는다면, 저들이 과연 소련 정권을 잘 끌어나갈 수 있을까?
내가 만들어 둔 이 승리가 형편없이 부서지지는 않을까?
하… 고민거리가 또 하나 생겼다. 동부전선의 총사령관이 되어 우리 병사들을 갈아먹는 저 흉악한 모델과, 호시탐탐 권력을 노리는 이 호랑이 같은 놈들. 주코프는 흐느끼는 베리야를 아니꼽게 노려보고 있었고, 그 모습이 내겐 마치 불길한 전주곡처럼 느껴졌다.
“전선은… 전선은 어떤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습니다. 모델 원수는 절대적인 열세에 있는 상황을 잘 아는지, 적극적인 역습보다는 후퇴 후 전술적 정비에 들어가는 쪽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렇군….”
주코프가 그렇게 대답하자 방 안 사람들의 눈길이 그에게 확 쏠렸다. 이제 선배 원수들을 제치고 군부의 사실상 1인자가 된 주코프는 당당하게 내게 전선 상황을 브리핑했다.
그나마 전선에서 큰일은 없었다 하니 다행이었다.
주코프가 그렇게 단독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베리야는 질투가 났던지, 갑자기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서기장 동지, 그…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그래?”
갑자기 기분이 확 좋아졌다. 모델이 제아무리 방어의 사자요 뛰어난 명장이라도 날아오는 폭격기에 실린 폭탄 하나를 막아 낼 수는 없다.
베리야는 제 공로를 치하해 달라는 듯 눈물 콧물 분비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씨익 웃었다. 평소라면 극히 역겨웠겠지만 지금만큼은 베리야가 너무도 유능하고 훌륭해 보였다.
“하하하하, 좋군. 자! 몰로토프, 주코프, 바실렙스키, 이 셋하고 자네만 남고 나머지는 나가도록 하게!”
“아빠…?”
“스베틀라나,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잠시만 나가 있거라.”
경호원들은 사람들을 훠이 훠이 내보냈다. 스베틀라나도 함께.
‘이 병실에 도청기는 없겠지?’
혹시나 몰라 둘러보는 내 눈빛을 보고 베리야는 흐흐 웃으며 이야기했다.
“걱정 마십시오 서기장 동지. 이곳만큼 안전한 곳은 없을 것입니다.”
“알겠네. 자, 실험이 성공했다고?”
* * *
카자흐스탄 외곽의 사막에는 거대한 비밀 핵실험장이 있었다.
나를 비롯해 소련 수뇌부 중 몇 명은 ‘건강을 위한 휴가’라는 명목으로 모스크바에서 나와 이 핵실험장이 있는 세미팔라틴스크로 몰래 향했다.
소련 핵개발의 총책임자, 이고르 쿠르차토프는 본인의 연구성과를 소련의 최고위층 앞에서 자랑할 기회가 왔다는 것을 직감한 것 같았다.
“이 원자로에서는 자연상태의 우라늄이 핵반응을 거쳐 플루토늄이 됩니다! 우라늄으로 핵무기를 만들려면 개중 1%도 안 되는 우라늄-235를 농축시켜야 하지만, 이를 반응시킨다면 훨씬 더 효율적인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성과는 영명하신 서기장 동지의 명령과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라는, 상투적인 감사 인사도 빼먹지 않으며 쿠르차토프는 원자로를 구경시켜 주었다.
체렌코프 현상으로 은은하게 푸른빛이 비쳐나오는 원자로를 몰로토프나 주코프, 바실렙스키는 신기하게 들여다보았다.
“조심하십시오! 저 안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핵반응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원자로 하나로 도시 몇 개가 필요로 하는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답니다!”
시험적으로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는 소련이 그동안 전력이 부족해 생산하지 못했던 알루미늄 같은 경금속 제련을 하는데 전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 결과 얼마 전부터 알루미늄 생산량은 기존의 3배 이상으로 증가했고, 대부분 군용 항공기 제작에 투입되었다.
대체 어디서 이 많은 알루미늄이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고 있던 장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만들 수 있는 폭탄이… 얼마나 강력한 것입니까?”
바실렙스키가 조심스레 묻자 쿠르차토프는 그것 참 흥미로운 질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으음… 그거야 규모를 어느 정도 크기로 만드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서기장 동지의 명령하에 저희가 만든 것은 저 플루토늄이 대략 십 킬로그램 정도 들어가는데….”
고작? 베리야와 몰로토프마저 고작 10kg짜리로 무엇을 하겠냐는 듯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플루토늄 폭탄, ‘팻 맨’은 플루토늄이 대략 6kg 정도 들어가 있었다. 그러고도 화력은 TNT 20킬로톤이 넘는 수준. 즉 2만 톤이 넘는 TNT를 터트리는 것과 동등했다.
“계산하자면… 대략 TNT 30킬로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30톤? 생각보다 강력하지는 않군요?”
주코프는 대뜸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베리야와 쿠르차토프는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주코프 장군님! 30톤이 아니라 30킬로톤입니다! 천 배요 천 배!”
“예?”
“주코프 장군, 저걸로 만든 폭탄 한 발이면… TNT 3만 톤을 떨어트린 위력이라는 것일세.”
우리가 불곰 전투기에 실어서 사용하는 항공폭탄, ‘충격탄’이 500kg짜리에 고폭탄을 꽉꽉 채워 넣어 300kg를 넣었으니 TNT 0.3톤.
이런 것 10만 개를 떨어트리는 것만큼의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잘못 알아들었을 법도 했다. 각종 안전장치를 부착해 본체의 크기는 대략 5톤 정도 되는 규모로 커지겠지만… 한 방이면 도시를 삭제할 수 있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게 된 것이다.
“저희는 22킬로톤급 기폭 실험에 이미 성공한 바 있습니다. 규모만 조금 키워서 30킬로톤급의 핵무기 시제품을 2개 제작했고, 원자로 증설과 가동에 성공한다면… 이런 폭탄을 수십 개 정도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예산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이를 말인가? 얼마든지 가져가시게.”
이후에도 쿠르차토프는 이 무기체계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돈줄을 쥔 이들에게 끝없이 늘어놓았다.
“이런 탄두를 어뢰에 장착하고 적 함대 근처로 날려보낸 후 폭발시키면 발생하는 파도만으로도 함대를 무력화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히 항구에 정박 중인 적선이라 해도 원거리에서 쏘고 도망치는 것으로….”
핵어뢰, 핵대포, 초강력 핵폭탄 등. 쿠르차토프의 구상을 주코프와 베리야는 굉장히 흥미를 가지고 듣고 있었다.
물론 시대는 아직 핵폭탄의 사용을 목격하지 못한바, 이것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참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도시를 파괴시킨다는 것은 단순히 거기에 있는 생산시설과 인력을 파괴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민간인들, 어린아이들부터 노인까지 이르는 집단을 죽여 버리는 것이었다. 수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죽고 다치며 그들의 후손세대까지 방사능 피폭에 의해 고통받는….
물론 핵무기를 사용할 수는 있다.
이미 수백만에 이르는 소련인이 죽었다. 군인들은 총포탄에 맞아 죽거나 독일인들의 잔인한 포로수용소에서 학대당하다 사망했고, 민간인들은 무력하게 학살당했다. 독일이 저지른 잔혹한 짓거리들은 실제 역사보다도 더 심했다.
그 광기를 멈출 수만 있다면, 핵폭탄은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대륙 저편에서 마찬가지로 광증을 부리며 흉포하게 날뛰는 일본에도.
모델의 방어전 때문에 베를린에 이르기까지 죽어야 할 수십만, 백만이 넘을지 모르는 소련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예? 서기장 동지? 뭐라고 하셨습니까?”
미국의 핵개발을 주도한 오펜하이머는 핵실험의 결과를 보며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노라고.
그리고 그 옆에서 핵개발에 참여한 케네스 베인브릿지라는 학자는 이야기했다 한다.
이제 우리 모두 개새끼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