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133화
만주의 중심지, 하얼빈의 역사(驛舍)는 늘 그랬듯이 북적거렸다. 각지에서 오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역에 내리고 기차에 올라 또 각지로 떠나갔다.
이 과정에서 ‘수상한’ 사람 수십 명이 섞여들어 온다 한들 이 지역을 지배하는 만주국, 혹은 그들의 주인인 일본이 알아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등에서 개인 단위로 흩어져 들어온 이들은 하나하나 약속된 장소로 집결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일본 놈들이 아무리 짐승 같은 놈들이라지만….”
“아마도. 서기장이 담보한 것이니 아마 사실일 것일세.”
와글와글 모여 있던 조선인 청년들은 다 같이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이 작전에 지원하기 전 받아본 지령서에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본 침략자들의 만행이 적혀 있었다.
물론 일본인들이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취급하며 죽여 댄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만주며 중국에서 일본 놈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소련으로 피신한 조선인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 그래서 우리가 여기까지 모인 게 아닌가?”
하얼빈시 외곽에 있는 관동군 검역급수부, 암호명 731부대에서는 천인공노할 만행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소련은 즉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소련에 투신한 조선인 부대에 일본인들이 만주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렸다.
조선의용군은 고통받는 동포들과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참가할 것에 동의했다. 소련은 부득이한 유럽 전선의 사정으로 아직 일본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파시스트들이 저지르는 만행을 멈추는 데에는 전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소련군에게 훈련받고, 소련제 무기와 장비를 갖춘 조선인 특공대 100여 명은 아직 불가침조약으로 인하여 개방된 소일 국경을 넘어 하얼빈으로 잠입했다.
이제 저 일본놈들의 만행이 벌어지는 곳을 습격하기 위해, 이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련 측 협력자 ‘램지’ 씨가 만주군 군복을 10여 벌 준비해 주었네. 이중 제복이 체격에 맞는 이들 위주로 침투조가 편성될 것이네. 나머지는 침투 이후 탈출 작전을 위해 헌신해 주기를 바라네.”
특공대장 윤세주는 진지한 눈빛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특공대원들은 숙연해졌다.
“이 작전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아서 나가는 것이 아니네. 저 개만도 못한 일본 놈들이 저지르는 만행을 온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 목적이네. 탈출작전조가 어떻게 해 주느냐에 따라 작전의 성패가 결정되니 부디 잘 생각하게!”
“예!”
관동군 검역급수부에는 5천여 명에 이르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어 소일불가침조약을 깨지 않고 이곳을 정규군으로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련 측이 스페츠나츠 특공대를 투입하려 해도 만약 소련군의 시체가 남는다면 전쟁은 얼마든지 터질 수 있었다.
그래서 소련과 조선의용군은 생김새가 일본인과 비슷한 조선인 특공대를 투입하기로 했다. 혹시나 누군가 사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히더라도 끝까지 조선 독립군 측의 소행이라고 우기기 위하여.
꼬리 자르기를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특공대원들은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동포들이 겪는 고난을 두고 볼 수 없어 항일 투쟁에 나선 것이 아닌가?
“작전은 다들 숙지했겠지?”
“옙!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일어로 말하게. 혹여라도 조선말을 입 밖에 냈다가는 걸릴지도 모르니.”
침투조 60여 명은 두 대의 트럭에 나누어 타고 731부대로 향했다. 몇몇은 만주군 간도특설대의 제복을 입고 일본군 간부인 척하고, 나머지는 트럭 뒤 칸에 타고 이들이 잡아 온 포로를 연기하는 것으로 작전이 짜여 있었다.
만주군으로 분한 10여 명은 731부대의 고위층과 면담하는 척하면서 그들을 인질로 잡는다. 나머지 침투조들은 ‘실험시설’로 들어가 자료를 확보한다. 간단해 보였지만 자칫하다가는 엇나갈 수도 있었다.
특공대원들은 각자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누군가는 하나님에게, 누군가는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에게, 또 누군가는 신을 믿지 않았기에 조선인들을 돕는 서기장께.
* * *
“정지! 정지!”
검역급수부는 그 명칭에 따라 생각하면 군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전염병을 예방하고, 특히 물 공급을 관할하는 부대였다. 이전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에서 수인성 전염병으로 제대로 골치를 썩여 본 일본군은 관동군에 급수부대를 설치해 전염병을 예방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개 지원대치고는 수천 명에 이르는 인원이 상주할 정도로 거대해진 이 부대는 멀리서부터 불길한 기운을 풍겼다.
과도하게 삼엄한 경계. 초병들은 트럭을 멈춰 세우고 운전석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관등성명을 밝히시오!”
“허어, 요새는 왜 이렇게 경계가 삼엄해졌나?”
검문 때문에 차창을 내린 윤세주는 태연하게 연기를 시작했다. 능청스럽게 초병의 질문을 피해 가면서 딴소리를 한 그는 지금 만주군 대좌(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의 계급장을 본 일본인 초병들은 경례를 붙이면서도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FM대로 행동하는 그 모습이 더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관등성명 요청드립니다!”
“나 만주군 대좌 기무라 타로요. 아마 부대장 각하께 말씀드리면 아실 텐데?”
“옛! 알겠습니다. 즉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트럭은…?”
부대장과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말해도 초병들은 총만 내렸을 뿐, 여전히 경계했다. 윤세주는 손바닥에 땀이 흘렀지만 태연한 태도를 고수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음, 만주군에서 포로로 잡은 놈들일세. 관동군 방역급수부로 포로를 인솔해 넘겨준다기에 오래간만에 이시이 각하를 뵈러 온 것이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상부에서 뭔가 무전이 온 것인지, 초소로 뛰어갔다 온 오장은 트럭을 통과시켰다. 포로들을 인계받으러 누군가 올 것이라고 하면서.
“후우….”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작전이었다. 최대한 능청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서기장은 조선인 특공대를 만나는 자리에서 실패해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야기도 했다.
“그 이시이 시로라는 작자는 악마일세. 우리가 승리하더라도 다른 나라에 자기네들이 만든 자료를 넘기고 살아나갈 수도 있네. 포로로 잡아끌고 와 역사 앞에 정의를 구현하거나, 아니면… 그냥 죽여 버리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감상일세.”
그의 명령하에 이루어진 참혹한 실험들. 서류에 들어 있던 내용이 떠오르자 심장이 쿵쾅쿵쾅 뛰다가도 다시 잠잠해졌다. 정 안되면, 그놈의 머리통에 권총이라도 한 발 박아 주면 그만이다.
“대좌님? 사령관 각하께서 만나보겠다고 하셨습니다.”
“아, 고맙네.”
젊은 헌병 대위 하나가 그를 맞이했다. 후방부대에 걸맞지 않게 헌병들은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물론 트럭 밑바닥에 로켓포며 수류탄이며 기관총을 숨겨 온 특공대원들만 하겠냐만….
작전을 위해 노획한 일본군 트럭은 마개조를 거쳤다. 평범한 트럭처럼 보여도 안에는 방탄처리가 되어 있어 웬만한 소총탄 정도는 막아 낼 수 있었다. 이중으로 바닥을 만들어 아래에는 온갖 소련제 무기를 숨겨 두었고.
“저 포로들은 저희가 인수인계받도록 하겠습니다.”
“아, 잠시만.”
윤세주와 소수 특공대원들이 이시이를 인질로 잡는 동안 저들은 시설로 치고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 내려서 시설로 끌려 들어간다면 무기 없이 일본군과 싸워야 했다.
윤세주는 그래서 준비한 거짓말을 시작했다. 심호흡이라도 해야겠지만….
“저 안에 조선인 거물 포로 하나와 중요한 몇몇이 있는데, 내가 꼭 사령관님께 보여드리고 싶구만. 괜찮겠나?”
“예?”
대위는 뜬금없는 그의 제안에 당황한 듯했다. 만주군에서 거물 포로를 잡았다고? 그럴 법도 했다. 요사이 조선인, 중국인 게릴라들이 날뛰는 것을 보아서는 교전도 있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거물 하나 정도는 잡았을 수도 있다.
“음… 사령관님을 직접 뵙고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고맙군. 그럼 저 ‘마루타’들은 잠시 여기 놔두도록 하지. 으하하하!”
윤세주는 혼신의 힘을 다해 거들먹거리는 일본인 장교를 연기했다. 대위는 그가 말한 ‘마루타’라는 단어를 듣고 내부자임을 어느 정도 확신한 것 같았다.
애초에 검역급수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관동군의 최고 기밀사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여기에 이미 와 본 것처럼 굴고, 마루타라는 말까지 아는 대좌라면? 아마 만주군 소속의 중요 협력자일 수도 있다.
기무라 타로라는 이름은 워낙 흔해서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시이 역시 그 이름을 듣고 누군지 싶어 만나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화려한 장식품들이 놓인 사령관의 집무실에서 ‘기무라 대좌’와 마주 앉은 이시이 시로는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자네는 내가 아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군의중장 이시이 시로 각하를 뵙습니다! 저는 만주군 소속의 육군대좌 기무라 타로라고 합니다. 각하의 위명은 익히 들은바 꼭 만나 뵙고 싶어서 각하의 지인을 칭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이시이 시로는 처음 보는 덩치 큰 사내를 보며 애써 누군지 떠올리려 했으나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참에 윤세주는 역겨움을 참으며, 이시이에게 경례를 붙였다.
“으하하핫, 그랬구만. 자네 같이 기골이 장대한 이는 내가 아는 이중에도 몇 없는데. 그나저나, 여기는 어떻게 알았나?”
윤세주는 키가 180cm가 넘는 큰 체구였다. 마흔 살 중년의 나이에 위엄 있는 체격 덕분에 작전에서 대좌를 사칭한 그는 이시이에게 아첨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비볐다.
“아 저희 만주군 쪽에서 관동군의 협력 요청을 받아….”
“협력 요청?”
그런 것은 한 적이 없는데? 이시이는 갸웃거렸다. 이 부대에서 뭘 하는지는 일급 기밀인데 어떻게 함부로 남에게 협력 요청을 하겠는가? 관동군 본영에서 했나? 그렇게 고민하던 차 스스로를 기무라 대좌라고 한 이의 이마에 땀이 난 것이 보였다.
“자네….”
“제기랄, 쳐라!”
이시이의 얼굴에 의혹이 떠오르는 것을 본 윤세주는 그를 따라온 두 명의 부하에게 조선말로 명령을 내렸다. 만주군 제복을 입고 있던 두 명의 특공대원들은 권총을 꺼내 들어 주변의 일본군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탕, 탕 타탕! 총소리에 경악한 부대 호위병들은 방문을 열고 들이닥쳤지만 그들 역시 이마에 총탄이 박힌 채 쓰러졌다.
“뭐냐! 네놈들은!”
“뭐긴 뭐야, 악마새끼를 징벌하러 온 하늘의 사자지.”
트럭 안에 있다가 총소리를 들은 특공대원들은 순식간에 완전무장한 채 뛰쳐나왔다. 얼핏 들여다보고 그들이 다 밧줄이나 수갑에 묶여 있는 줄 알았던 일본 병사들은 총소리에 특공대원들의 습격까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으하하하하! 이것이 기관총이여! 개새끼들아!”
“자, 돌입조는 저쪽의 시설로 간다!”
731부대의 시설배치도는 이미 소련 정보부에 의해 작전 시작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직접 사령관을 만난 윤세주는 사령관 집무실에 있는 자료를 가져올 것이고, 나머지 특공대원들은 실험시설로 들어가 샘플을 확보한다.
아직까지 작전은 순조로운 것 같았다.
“너희 사령관이 포로로 잡혀 있다! 총을 쏘면 이자부터 죽이겠다!”
“살… 살려줘! 쏘지 마라! 쏘지 마!”
윤세주는 억센 팔로 이시이 시로의 목을 조르고 옆통수에 권총을 겨눈 채로 일본 헌병대를 협박했다. 이시이 시로는 그렇게도 살고 싶었는지 패닉에 빠져 쏘지 말라고 울부짖었다.
“빨리 챙겨! 빨리!”
일본어로 된 파일을 하나하나 펼쳐 볼 새도 없이 특공대원들은 그 문서들을 모조리 가방이며 옷주머니에 처박았다. 아무리 무장을 하고 있다고 해도 이곳은 후방부대. 본격적인 기관총이나 중화기들은 경비부대에는 없는 것 같았다.
사령관을 포로로 잡은 사이 나머지 특공대원들은 시설에 돌입했다.
“윽… 대체….”
“진짜구만 진짜….”
실험실 문을 열자 흰 옷을 입은 과학자들이 한가득 있었다. 기괴망측한 실험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들은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이 갑자기 뛰쳐 들어오자 혼비백산해서 숨어들었다.
“쏴! 죽여!”
투타타타타!! 반인륜적인 실험에 협조하고 있는 이들에게 살 가치는 없다. 특공대원들은 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그들의 실험 노트로 보이는 것들을 챙기고 다음 방으로 달린 그들은 충격적인 물건을 볼 수 있었다.
“미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낸 후 통째로 포르말린에 넣은 박제들이 몇 개나 방 안에 늘어서 있었다. 피 튀기는 전장을 헤쳐 온 그들에게도 구역질 나는 물건들이었다.
“모조리 찍어서 보내야 하네. 저건 가져가기엔 너무 크고….”
“알겠습니다!”
철컥, 철컥. 카메라로 잔혹한 박제 사진을 모조리 찍고, 특공대원 하나가 수류탄을 방 안에 까 넣었다. 박제로 남겨 두는 것보단 차라리 폐기되는 게 낫겠지. 성불하시오.
철문을 닫자 안에서 수류탄이 쾅 터졌다. 다 터졌을까? 그런 것을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이제 빠져나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다….”
시설에서 자료들을 한가득 건져온 특공대원들은 탈출할 방법을 찾았다. 자기네들은 죽더라도 이 패역한 자들이 만든 악행의 증거물만은 밖에 알려야 했다.
그들이 두리번거리던 차에 마침 저 멀리에서 와장창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아! 저기인가 봅니다!”
딱 봐도 묵직해 보이는 장갑차 몇 대가 부대 외벽에 뚫린 구멍으로 들어왔다. 무슨 폭탄으로 담벼락을 폭파했는지, 외벽은 처참하게 뜯겨나가 있었다. 장갑차의 총안구에서는 일본군을 향한 기관총 세례가 쏟아졌다.
“빨리! 이쪽이다!”
“대장은?”
아뿔싸. 모여드는 일본군을 상대로 총격을 가하며 장갑차에 일단 자료부터 던져 넣은 특공대원들은 윤세주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사령관 집무실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어떻게 할 거야?”
“대장을 버리고 갈 수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