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132화
100만 대군을 자랑하던 북부집단군은 몇 달 만에 초라한 패잔병이 되어 도망쳤다.
그동안 획득했던 점령지는 다시 소련군의 손에 넘어갔고 작년에 발을 들인 프스코프 앞까지 방어선이 밀려났다.
소련군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져 있었지만 독일군은 전성기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이제 순식간에 붕괴될 것만 같은 전황에 대해, 독일 장교들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멍청한 개새끼들! 감히 날 기만해? 그놈들도 반역도당, 스파이 새끼들인가!”
“고정하십시오, 총통 각하….”
와장창! 총통은 손에 집히는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참석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며 총통의 분노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북부집단군은 사실상 사라졌다. 30%만 전투능력을 상실해도 그 부대는 전멸로 판정하는 것이 현대 군사학의 상식이다. 그런데 북부집단군은 병력의 70%가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남은 30%도 부상자가 태반이었다.
한때 독일의 가장 강력한 부대였던 것이 말 그대로 증발한 것이다.
“이제 북러시아 지역은 아예 쫓겨난 게 아닌가? 네놈들의 졸렬한 지휘로? 어, 만슈타인 원수,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게. 죽고 포로가 된 수십만 대독일의 아들들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느냔 말이야!”
“…할 말이 없습니다. 총통 각하.”
만슈타인은 이를 꽉 깨물었다.
‘각하, 그 ‘대독일의 아들들’에는 제 아들도 들어 있습니다.’
그의 아들, 게로 폰 만슈타인은 전장에 나가 생사를 알 수 없었다. 포로들이 어찌 되었을지, 그것도 레닌그라드를 짓밟은 적군 사령관의 아들이라면 어찌했을지. 만슈타인은 도무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총통은 그런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무능한 밥버러지들! 이젠 어떻게 할 것이냔 말이다! 빌어먹을, 제기랄!”
총통은 말 그대로 발광했다. 입에 거품만 물지 않았을 뿐, 그는 시뻘게진 눈에 잔뜩 핏대가 선 목으로 사람들에게 고함을 쳤다.
그러나 고함을 친다고 없는 대책이 나오지는 않는다.
“….”
모든 장군들은 침묵했다. 총통이 공중보급을 강행했기에 핀란드만에 수십 명의 파일럿이 수장당했다고 삐친 괴링부터,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하급 장성들까지.
소련에 선제공격을 가한 이후,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숨통을 끊기는커녕 비등한 교전을 한 결과 소련은 감당할 수 없게 체급을 불려 버렸다.
독일은 병역자원이 바닥나 가며 공장의 숙련공들까지 전장으로 차출하여야 하는 가운데, 소련은 끝도 없이 더 많은 병사들을 징병했다.
“각하… 제국보안본부에서는 소련군의 내년도 추가 징병계획을 입수했습니다.”
“….”
“최, 최소 추가적으로 200만을 더 징병할 계획이라고….”
정보부의 담당자는 쭈뼛거리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모두들 절망했다. 소련군은 이제 질적으로도 독일군에 비해 그다지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심한 수준이던 저들의 장교단이나 병사 교육 수준은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 끝에 점점 향상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자랑이던 정예 장교단과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병사들은 대부분이 동유럽의 대평원에 뼈를 묻거나,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제 전장으로 투입되는 병사들은 병력 부족으로 속성 훈련을 받은 얼치기들이었다.
건강한 이들이 가장 먼저 끌려가 죽은 덕분에 추가적으로 징집되는 이들은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군대 근처도 못 가 볼 이들이었다.
“이런 놈들이 군대에 온다고?”
훈련을 담당하는 군대 교관들은 날로 경악했다.
자랑스러운 독일군에 이런 덜떨어진 놈들이 끌려왔다고?
사실 그 말을 내뱉어야 했던 교관들마저도 ‘교도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부대에 편성되어 전방에 투입되었다.
이제 독일군의 후방에서 교육업무에 종사하는 이들은 다양한 사유로 보충역으로 돌려진 이들이었으나 그들이 보기에도 신병들의 수준은 처참했다.
“병신이 병신을 가르치는 꼴이라니!”
독일군 훈련부대에서는 그렇게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손가락이나 발목이 잘렸거나, 눈 한 짝 정도를 잃은 이들이 주로 후방 훈련부대에 배치되었다. 더 이상 그 정도의 부상으로는 집에서 편히 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딘가 모자란 이들이나 심한 문제가 있는 이들을 훈련시키며 자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력은 모자랐다. 소련군이 200만을 징병했다면 독일군은 100만 명은 더 징병해야 했지만, 도저히 그럴 여유가 나오지 않았다.
“총통 각하, 제게 전선을 맡겨 주시지요.”
“!!!”
“…모델 원수?”
회의실의 구석에서 조용하게 앉아 있던 모델은 결단을 내린 것 같았다.
사람들은 희망을 품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방어의 사자! 남부전선의 소방수! 많은 이들이 모델을 그렇게 불렀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남부집단군을 구원해 무사히 퇴각시키는 데 성공한 그는 방어전의 대가로 위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비록 퇴각했을지언정, 그는 10대 1의 교환비를 내며 소련군을 말 그대로 분쇄해 버렸다. 그를 발탁해 집단군 사령관으로 올린 총통의 혜안을 모두가 상찬할 정도로.
그런 그가 동부전선을 맡아 보겠노라 나섰다. 총통은 발광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며 차분하게 그를 응시하는 모델을 마주 바라보았다. 모델은 나직한 목소리로 직언을 올렸다.
“각하, 우리 군대는 현재 최악의 상황에 몰려 있습니다.”
허억. 몇몇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국방군 반역사건’ 이후로 감히 총통 앞에서 극한에 몰린 전장의 상황에 대해 곧이곧대로 말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모델은 스스로에 대한 총통의 총애를 믿었는지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사실에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각하께서 바라시는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아군이 확보한 점령지를 수비해 내며 저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강요한다면… 강화를 청할지도 모릅니다.”
“….”
아무도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이 전쟁에 승리 이외의 결론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모델이 처음이었다. 최소한 총통의 앞에선.
히틀러는 이를 꽉 깨물고 모델의 얼굴을 응시했다. 모델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군대를 가지고, 압도적인 규모의 소련군을 막아내 보겠다고 선언하는 그에게 총통은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그는 이마를 짚고 물었다. 순식간에 10년은 늙어 버린 듯한 목소리로.
“얼마나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겠는가? 모델 원수, 아니 총사령관?”
“…50만 명, 혹은 그 이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 *
얼마 후 괴벨스는 특유의 쇠를 긁는 듯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라디오 연설을 했다.
[4군과 홀리트 분견군의 영웅적인 저항은 결국 소련군의 물량 앞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들을 추념하기 위해 3일간의 복상을 선포합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아돌푸스부르크로 개명되어 독일 민족의 판도가 되었어야 할 레닌그라드는 어떻게 되었나, 동부전선의 상황은 어떠한가.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방송에서는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오직 저들이 하고자 하는 말만이 흘러나올 뿐. 그 어느 때보다도 괴벨스의 목소리는 거칠게 사람들을 자극했다.
[독일 민족 여러분, 총력전을 원합니까? 저 악랄한 유태-볼셰비키 짐승들을 짓밟아 버릴 총력전을 원합니까? 그 어느 전쟁보다 급진적인 총력전을 원합니까?]
수만 명의 나치당원들이 동원되어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가행진을 벌였다. 그들은 <총력전 만세>나 유태-볼셰비키 빨갱이들을 이러저러하게 척살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총통 만세 등의 구호를 외쳐 댔다.
“총통 만세! 승리 만세! 독일 민족은 승리를 위하여 여러분의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모두 군대에 지원하십시오!”
어린 유겐트 대원들은 자체적으로 공모하여 제작한 포스터를 거리에서 뿌리고 다녔다. 이미 그들의 선배격 되는 이들은 지역별로 무장친위대의 유겐트 사단을 이루기 위해 차출되었다.
이미 독일의 거리에는 젊은이들은 보이지 않고, 대부분이 중년 이상들이었지만 광신도들에게 그런 것이 중요할 리 없었다.
“더 많은 병력! 더 거대한 군대! 독일 민족에게는 군대가 필요합니다!”
낮에는 유겐트 소년들이, 밤에는 비밀경찰들이 배회하며 군대에 끌고 갈 사람들을 찾았다.
<국민 돌격대>. 새로 징병될 사람들이 입대할 부대 명칭으로는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 * *
[좋습니다. 우리 정보국에서도 폭격의 효과는 상당할 것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주 좋은 소식이로군요.”
동부전선에는 이제 진흙탕의 계절이 도래했다. 전선은 잠시 소강상태로 빠져들었다. 물론 이것은 땅에 얽매인 지상군의 이야기일 뿐 하늘은 여전히 전장의 열기로 뜨거웠다.
미군은 수백 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슈바인푸르트의 공장들과 루르 계곡의 전력 생산 댐을 폭격했다. 작은 도시 하나가 불바다가 되었고, 댐이 무너져 수천 가구가 침수되었지만 그런 것에 미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서양에서의 피 튀기는 전쟁으로 인해 미국인들은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아조레스의 해변은 벌써 미국 군인들의 피를 넘치도록 머금고 있었다.
첩보를 통해 독일이 기습 폭격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안 미군은 더 많은 폭격 목표를 제안해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일본에도 비슷한 폭격을 가하겠다며 대형 중폭격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 같았다.
“우리 소련군은 겨울 동안 동부에서 공세를 가해 독일군을 소련 영토에서 몰아낼 계획입니다. 독일을 끝장내고 나서 최대한 빨리 대일전에 참전할 것입니다.”
[이번엔 제가 고맙다고 말해야겠군요.]
태평양 전선에서는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을 패퇴시킨 덕분에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연결선 자체는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침몰당한 전함과 항공모함들을 대체할 함선들을 취역시키지는 못한 관계로 공세에 나서지는 못했다.
[내년이면 우리 역시 신규 전함들을 취역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아군의 본격적 반격은 그때부터입니다.]
이제 막 진수된 전함 아이오와를 비롯하여 15척의 아이오와급 전함이 건조되고 있었다. 튼튼하고 강력한 전함을 십수 척이나 건조해 일본 해군의 야마토에 대적하겠다는 미국 해군의 발상에는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
만재배수량 7만 톤이 넘는 야마토에 대적할 만한 거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만재배수량 5만 톤급의 아이오와급을 줄줄이 뽑아내는 미국의 산업 생산능력은 진짜 군침이 흐르도록 부러웠다.
‘우리도 그만큼 함대 뽑고 싶은데….’
소련의 빈약한 건함기술력이나 강철 생산능력으로는 동부전선을 막으면서 저만한 배들을 뽑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항모가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미래의 지식을 통해 아는 이상, 전함에 수십억 루블을 쏟아붓는 짓은 할 수 없었다.
전함이 남자의 로망임에도 불구하고. 북대서양과 지중해, 태평양을 위풍당당하게 항주하는 소비에트 소유즈급 전함 함대! 그런 것을 상상하면 더 이상 서지 않는 내 그것도 벌떡 일어날 것만 같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전함이나 그것이나. 차선책으로 전후의 항모건조와 해군항공단 창설을 위한 훈련을 하고는 있었지만 어딘가가 아쉬웠다.
“아, 그리고 미국이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예? 그게 무엇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