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131화
하늘에서는 벌떼같이 불곰 전투기들이 날아와 독일군의 퇴각을 방해했다. 슈투카를 모방한 나팔 소리를 천둥처럼 울리며 날아오는 전투기 편대를 보며 독일군은 기겁했다.
“씨발, 좆같은 새끼들. 슈투카를 베껴가지고는….”
“으아악! 충격탄이다!”
쾅! 쾅! 500kg 항공폭탄이 독일군의 퇴각 행렬에 작렬했다. 도로 곳곳에 구덩이가 패고, 병사들은 개미 떼처럼 비행기를 피해 도로의 양편으로 흩어졌다.
불곰 전투기들은 답지 않게 날렵했다. 휙 하고 날아와 대공무장이 허술한 표적을 상대로 항공폭탄을 뿌리고, 중기관총을 긁어 버리면서 얼마 남지 않은 차량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하… 이제 저걸 어떻게 끌고 가냐?”
“버려야지 뭘….”
연기를 뭉실뭉실 내뿜는 트럭 안에서 그나마 조금 남은 식량이라도 건져 보려던 병사들은 휘발유에 불이 붙어 폭발하자 또 한 번 기겁하며 도망쳤다.
소련 공군은 독일군을 직접 살상하는 데 그다지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독일군의 엄호 전투기가 날아오면 그들은 순식간에 기수를 돌려 휙 하고 다시 날아가 버렸다.
다만 그들은 독일군의 전투 수행역량을 분쇄하는 데만 철저하게 몰두했다. 정면 교전을 피하며 보급과 이동을 봉쇄하는 방식으로.
4군이 시간을 끌어 주는 동안 북부집단군은 그나마 안정화된 에스토니아 방면으로 빠져나가야 했지만, 소련군은 집요하게 후퇴하는 독일군을 괴롭혔다.
만슈타인 원수는 최후의 발악으로 그나마 남은 기갑차량들을 전부 긁어모아 공격군을 편성해 소련군의 돌출된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이렇게 편성된 홀리트 분견군에게, 만슈타인은 애걸하듯 명령했다.
“제발, 단 2주일만 벌어 주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각하.”
총통은 반드시 레닌그라드, 아니, 아돌푸스부르크를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만슈타인을 비롯한 일선 사령관들은 더 이상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을 결정적으로 폭발시킨 것은 반대하는 괴링을 독촉해 차출해 낸 수송기 부대가 레닌그라드에 도착한 것이었다. 반격을 수행하는 공격부대가 아니라, 후위대를 자처한 이들의 도시 탈환을 지원하겠답시고.
“빌어먹을! 지금 이 꼬라지가 났는데 수송기는 거기에 왜 필요하단 말이오!”
“저희는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원수 각하.”
“…그 지랄 같은 명령을 우리가 지금 어기려 하고 있어서 말이네.”
<공군은 아돌푸스부르크를 사수하기 위해 물자를 보급하라!>
말은 쉬웠다. 하지만 현실은 약간 더 가혹했다.
레닌그라드의 하늘에는 이제 소련군 전투기들이 벌떼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 내에 충분한 규모의 활주로와 비행장을 만들고, 또 그것을 지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북부집단군 소속 항공군 사령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미쳤다는 평에 맞지 않게 상황을 냉철히 분석해서 진언하기는 했다.
“아군이 보급할 수 있는 물자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일 300톤에 미치지 못합니다! 4군이 소모할 물자를 생각해 보면 이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수치입니다.”
“작전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 이유는 정신력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그대들은 왜 안 된다고만 하는가!”
아무튼 그 말 한마디에, 전투에 지치고 부족한 보급에 굶주린 레닌그라드의 병사들은 삽을 들고 활주로를 파게 되었다.
* * *
“아니, 저 미친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 무슨 비책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재 레닌그라드 전역을 책임진 북부전구 사령관 이반 코네프 원수는 황당한 보고를 받아들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독일 놈들이 도시 내에 비행장을 만들고 그걸로 보급을 받아먹으려 하고 있다.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물자를 내려놓는 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도망가기도 바빠야 할 놈들이, 아예 뿌리라도 박으려고 저러는 건가?”
“….”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시로 박격포와 로켓이 날아다니는 저 험한 곳에 비행장을 설치해?
“거기로 공급할 수 있는 물자가 얼마나 되겠나?”
“예, 아… NKVD 쪽에서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매주 1천 톤을 넘길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 그걸 누구 코에 붙이나?”
그의 참모들은 다 같이 합죽이가 되었다. 최소 ‘매일’ 몇백 톤은 되는 물자를 보급해 주어야 야전군급의 부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놓은 간이 비행장은 도저히 그것이 가능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비행장을 사수하느라 발이 묶인 독일군을 소련군이 쉽게 포위하게 만들어 줄 뿐.
“으으음… 정 안 되면 비행장 주변을 겨냥해 승리 로켓을 뿌려 버리게. 몇 발은 맞겠지. 그거 몇 발만 꽂아 줘도 꼼짝 못 하는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방비가 허술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럼 더 많이 쏘면 되는 거지.”
많이 만들기 시작해서 그냥 많이 만들었습니다. 요사이 소련군에서는 이런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많이 만들기 시작해서 그냥 많이 만들었습니다.’
수백 대씩 생산되는 전차들, 천 단위로 보급되는 승리 미사일, 넘치듯이 보급되는 식량까지! 물론 거기에는 ‘고마운 동맹국’ 미국의 도움이 있다고는 했지만 아무튼 모든 게 진짜 많았다.
독일군은 그 물량을 이제 몸으로 체험하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역할을 떠맡게 되었고.
“일단 밀어 버리자고.”
일단 추정 2개 군단 규모의 적 반격에 대해서 2개 전차군을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린 코네프는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판이 이만큼이나 깔렸는데 못 주워 먹으면 그게 병신이지.”
전국은 대강 그가 예측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기장이 짚어 준 대로였지만.
‘방어가 허술한 틈을 찔러 퇴로를 막으면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반격해 올 것이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부분은 급속히 진격한 우리 공격군의 측면.’
뭐, 저들이 레닌그라드의 거점 유지를 위해 별 요상한 짓거리들을 하는 것은 상정 외의 사항이었지만 어차피 그것이 대단한 방해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벌써 승리의 보고는 들어오기 시작했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3전차군은 연대급 기갑부대 공세를 격퇴했습니다.]
[5충격군은 적의 예상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방어선 후방으로 진출하여 나르바강으로 진격하고자 합니다. 사령관 동지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군단급 보병부대 공세에 대해서 수비 중입니다. 추가적인 증원 없이도 현재 병력만으로 공세를 격퇴할 수 있습니다.]
아마 저편의 독일군 사령관들은 탄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코네프는 낮게 끌끌 웃었다.
레닌그라드의 탈환도 거의 완료되어가는 판에.
* * *
“저 좆같은 비극에 우리 병사들을 팔아넘기지는 않겠다.”
예측했던 대로, 병사들이 공들여 파고 지켜낸 간이 비행장은 순식간에 소련군의 공세하에 함락되었다. 로켓포와 포탄이 떨어지는 와중에 비행장은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 되었고, 괜히 착륙하던 수송기만 몇 기씩 꼬라박은 채 결국 점령당했다.
비행장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물자의 보급을 받을 길이 끊겼다는 것을 직감한 독일군의 사기는 급전직하했다. 애초에 네바강을 건너 받는 보급조차 공격군의 편성을 위해 돌려졌기에 점점 말라 가고 있었지만.
하인리치 상급대장은 남은 장병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항복할 것을 결정했다.
그렇게 레닌그라드를 둔 싸움은 마무리되었다.
폐허가 된 에르미타주 박물관 앞에서 포로가 된 독일군들은 조리돌림당했다. 다시 도시로 돌아온 소련인들은 도시를 불태운 잔혹한 독일인들이 시가지를 행진하는 것을 보며 온갖 야유를 퍼부었다.
“우우우! 더러운 파쇼 놈들!”
“꼴 좋다! 개새끼들!”
심심찮게 돌과 오물이 행렬로 날아들었다. NKVD 요원들이 질서 유지를 위해 길가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행인들의 분노 표출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가끔씩 너무 큰 돌덩이를 던지려는 사람들만 저지할 정도로.
대오의 맨 앞에서 수갑을 찬 채 비척비척 걷던 독일 장군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북부집단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남은 군대라도 살리기 위해서 사석(死石)이 되어 버려지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만슈타인 원수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필요한 선택이었을 뿐. 독일군과 국가를 위하여.
다만 찬비를 맞으며 행군하다 하나하나 쓰러지거나, 비칠대는 아들 같은 장병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소련군은 말 그대로 맹렬한 증오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항복문서를 접수한 소련군 사령관, 이반 코네프는 ‘전쟁포로’에 대한 가혹행위가 없을 것이라 이야기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무장친위대를 ‘전쟁포로’로 인정하지 않았다.
“무장친위대의 법적 지위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그저 나치당과 당신네 총통의 사병이 아닙니까? 독일국의 법률상 그들이 정의된 바가 있습니까?”
“….”
사실 소련군이 하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장군들은 SS를 색출해 어디론가 끌고 가는 소련군의 행태를 저지할 수 없었다. 다만 국방군 장병들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에, 약속을 지킨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
소련군은 SS 병사들이 어떤 표식을 하고 서로를 구분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파쇼 광신도 새끼들! 히틀러 추종자 놈들을 모조리 찾아내! 우리 고향을 불태우고, 우리 가족을 찔러 죽이고, 우리 누이들을 겁간한 놈들이다. 그 개새끼들만은 다 잡아 죽여!”
“예!”
그들은 무장친위대만큼은 철저하게 색출해 별도의 수용소로 끌고 갔다. 포로수용소를 경비했다던가, 혹은 그와 관련된 임무를 했던 이들 역시 색출 대상이었다.
병사들은 서로 입을 맞추고 숨기려 했지만 간간이 있는 투항자들은 어떻게든 대상자들을 찾아냈다.
“이자입니다! 여기 보이십니까? SS의 표식이?”
소련군복을 입었지만 계급장 없이 검은 완장만을 찬 소련측 ‘히위’(HiWi, Hilfswilfiger = 자발적 부역자) 한 명이 포로들의 대오에서 병사 하나를 질질 끌고 나왔다.
제대로 먹지 못해 야윈 그 병사는 잘 먹고 튼실한 체격을 자랑하는 히위의 완력을 이기지 못하고 비칠거렸다. 히위가 병사를 바닥에 집어 던지자, 소련군들이 그를 순식간에 둘러싸고 총구를 겨누었다.
“나, 나는 아닙니다! 살려 주십시오!”
SS 병사들은 유독 소련군을 두려워했다. 그 자신들이 소련인들에게 무엇을 했는지를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그의 머리통 위에 개머리판이 몇 번 박히자 곧 잠잠해졌다. 소련 병사들은 통쾌하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개소리하네. 이 새끼, 저쪽으로 끌고 가!”
“예!”
차가운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곧 도래할 혹한과 동장군을 예고하듯.
“…가노라 레닌그라드여….”
만슈타인 원수는 30만 명가량 되는 북부집단군 병력을 나르바 방어선 저편으로 꺼내어 가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나르바강을 건너 후퇴하는 패잔병들의 무리를 보고서도, 만슈타인은 한동안 강의 저편을 응시했다.
아스라이 포성과 폭발음이 들려오는 저 회색의 도시. 레닌그라드를.
소련군의 추격부대가 가까이 온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그는 돌아서서 그를 기다리는 사령부 인원들에게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은 초라했다. 패장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