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127화
레닌그라드에서는 연일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단 몇 미터의 담장을 두고, 도로 하나와 건물 한 층을 두고 수많은 병사가 죽어 나가는 그런 시가전이.
장군들은 거대한 도박판을 벌이고 있었다. 레닌그라드를 걸고, 병사들의 목숨을 판돈 대신 쏟아붓는 도박판은 나날이 그 열기를 더해 갔다.
장교들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언덕을 점령해라!’
‘이 건물의 소련군을 소탕해라!’
고지 하나에 소대 하나, 건물 하나에 중대 하나. 여덟 시간 후면 내줄 한 구역을 위해 수십 수백 명의 병사들을 던져 넣는 광기의 도시 속에서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예 이 노름판을 엎어 버릴 폭풍이.
지난 여름 동안 쾌속진격한 독일군은 총통의 비현실적 목표에 매달려 측면 정리를 소홀히 한 바 있었다. 레닌그라드에 들어간 전우들의 후방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선을 구축하던 병사들은 하나둘씩 차출되었다. 피를 피로 씻는 시가전에는 병사들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했으니.
만슈타인 원수의 참모들은 이러한 상황을 불안하게 주시했다.
“각하, 더 이상 레닌그라드에 병력을 투입한다면 소련군의 공격을 막을 예비대가 부족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1개 사단이 담당하는 방어선이 20km 가까이 늘어난 구역도 있습니다.”
핏발 선 눈으로, 한참은 늙어버린 사령관은 젊은 참모들을 응시했다. 참모들은 다같이 입을 꾹 닫았다. 더 이상 말한다면 자칫 ‘음모가담’, 내지는 ‘패배주의’로 몰릴 수도 있다.
그들이 아는 것을 독일군 최고의 두뇌인 만슈타인이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만슈타인은 이 근래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쳐 왔다.
그래, 방어선이 뚫리면 어쩔 것인가?
“우리가 지금 당면한 문제가 그게 아니잖나?”
힘이 쭉 빠진 목소리로, 그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소련군은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하루에도 수천 명씩의 증원군을 도시에 쏟아붓고 있었다. 퍼내도 퍼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닷물처럼 밀려오는 소련군 앞에서는 전략 전술이 무의미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의 슬로건이 떠올랐다. <인민의 바다 속에서 너희들은 익사하리라>
저들도 한계가 있고, 끝이라는 것이 있겠지만… 독일의 한계가 훨씬 일찍 찾아온 것 같았다.
“자네들 말대로라면 레닌그라드에서 후퇴하자는 것인가?”
“….”
그렇다. 후퇴할 수는 없었다. 이미 수만 명이 희생되었고, 수십만 장병들이 거대한 도시 속에 틀어박혀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단순히 나와라! 하면 나올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닌 것이다. 복잡하게 형성된 전선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면 우수수 연쇄적인 붕괴가 시작될 수도 있다. 차츰차츰 후퇴하려 해도 소련군이 그것을 눈치채고 공세를 시도한다면? 그러다가 피해가 더 커지면?
상황은 그야말로 딜레마라 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더 이상 털어 넣을 판돈, 고상하게 말하면 예비대요, 막말로 하면 젊은 병사들의 목숨이 부족했다.
하도 피해를 보다 보니 참모들은 본전이 생각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살아 있는 나머지 병사들이나마 살려 보려고 후퇴를 하려 하니 후퇴를 엄호할 병력이 또 없었다.
밤이 불안해질 정도로 얇아진 방어선에서 또 빼 오는 것은 불가능하고, 전략예비대를 요청하자니 총통의 성화가 두려웠다. 아니, 애초에 총통에게 레닌그라드에서 후퇴하겠다고 하면 북부집단군 사령부의 모가지는 안전할까?
“하하하… 빌어먹을….”
자리에 답지 않게 그는 쌍소리를 내뱉고는 의자에 기대었다. 하하, 얼마나 더 나빠질 수 있겠어?
그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시시각각 바뀌는 전술 배치도를 보며 어디서 병력을 빼내 올지, 어디에서 예비대를 조직해낼 수 있을지. 시간을 끈다고 더 좋아질 것은 없다는 것을 만슈타인은 아주 잘 알았다.
“자네들 말대로 후퇴를 하건, 아니면 끝까지 공세를 취해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건 간에 예비대는 필요하겠지? 그럼 한번 만들어 보세나.”
“예! 사령관 각하!”
한가득 쌓인 전투보고서들 사이에서 각 사단의 상황을 요약한 두툼한 문서를 꺼내 들던 만슈타인에게, 통신장교의 급박한 보고가 들려왔다.
“급보입니다! 현재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뭐? 어디서? 레닌그라드?”
“아닙니다. 노브고로드 방면이라고….”
* * *
독일군의 방어선은 프스코프와 레닌그라드, 300km 구간에 걸쳐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 가운데를 찌르며 러시아의 고도(古都) 노브고로드에서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하하하핫, 저놈들을 잡으려면 포탄을 꽤나 많이 쏟아부어야 할 거다! 더 쏴라! 더!”
독일군 방어선이 얇아져 있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져 있었다. 독일이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레닌그라드에 병력을 털어 넣고 있었다는 것도.
그 와중에 중부에서 공세를 펼쳐 기갑전력까지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수백 킬로미터짜리 방어선에 고작 이십여 개 사단 병력이라니. 포탄이 병사들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아닌가? 소련 참모부는 그런 농담을 했다.
“자! 어머니 조국을 짓밟은 파쇼들을 몰아내자! 우라!”
“우라! 우라!”
중부에서의 공세가 증원에 의해 돈좌되었다고? 그럼 다시 북부를 치면 되지! 서기장의 발상은 기가 막혔다.
정상적인 군사학에서는 그런 상황을 가정하지 않는다. 대등한 병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군사학의 가정이니까. 병력을 분산시켜서 이곳저곳을 찌르는 것은 패배로 가는 악수(惡手)나 다름없다.
하지만 가진 물량이 압도적인 상황이라면 어떨까.
그때는 정말 이곳저곳으로 적을 휘두를 수 있다. 딱 지금과 같이.
“3충격군이 파쇼들의 1차 방어선을 돌파했습니다! 아직까지 적군의 역습은 없다고 합니다!”
“6근위군도 방어선을 돌파했다는 보고입니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주공이 중부 방향인 줄 알았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부됸늬 원수를 투입해 아군의 의도를 착각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가장 강력한 단일 야전군인 1SS기갑군을 중부로 돌려주었을 것이다. 온갖 무리수를 감수하고서.
‘기갑부대의 야전 기동성은 당연히 압도적이지. 허나 그네들의 전략적 기동성도 그러할까? 수십 톤짜리 쇳덩이를 이쪽저쪽으로 옮겨 다니는 것이 쉬운 작업이라고 생각하나? 독일 놈들은 안 그래도 철도차량이 부족해서 보급도 못 하는데 그 무거운 걸 마구 옮겨 다닌다고? 으하하하하하!’
작전회의에서 서기장의 발언이 생각났다. 행정의 총책임자로서, 서기장은 독일의 약점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야전군인들이 바라보는 작전적 수준이 아니라 대국을 보는 안목으로 전쟁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1기갑군은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독일은 그만한 병력을 이리저리 옮겨 다닐 능력이 없다.
“저들에게는 역공을 취할 수단이 없다. 각 제대는 가능한 한 빠르게 전진하라!”
“예! 사령관 동지!”
50만에 이르는 거대한 병력이 독일군의 보급선을 절단하기 위해 진군을 시작했다. 소련군 원수 이반 코네프는 이 순수한 숫자의 폭력에 감탄했다.
‘각 전선군별로 대강 50만씩. 서부전선군과 남서전선군은 규모가 더 거대하니….’
500만, 여기에 서기장의 특별 명령으로 징병되고 있는 것이 또 수백만. 그는 지금까지 이렇게 거대한 군대와 군대의 충돌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파쇼 독일군을 밀어붙이는 이 순간에도.
“스탈린 동지는… 정녕 신과 같으신 분이 아닌가?”
“예?”
“아, 아닐세.”
크흠, 위험한 발언을 입 밖에 낸 것을 알아챈 코네프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소련은 공식적으로 국가 무신론을 고수하고 있다. 정교회를 허용했을지언정, ‘신’에 지도자를 비유하는 것은 잘못하다가는 종교에 빠진 반동분자로 몰릴 수도 있다.
‘차라리 신이 스탈린 동지와 같다고 하는 게 맞겠군.’
요사이 서기장은 개인숭배에 대하여 자제할 것을 명령했지만, ‘알아서 기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특히 전공을 세워 승진이 보장되는 군인들에 비해 정치가들이 유독 심하게 아첨을 했다.
‘우크라이나 대머리가 특히 심하단 말이지….’
* * *
“스탈린 동지, 스탈린 동지!”
“뭐, 또 뭔가.”
“저희가 조사한바, 수도 모스크바의 이름을 개명하자는 인민들의 의견이 아주 많았습니다. 스탈리노다르, 혹은 스탈린다르(스탈린의 선물)가 좋다는 여론이 88.9%로….”
정치국 회의석상에서 이런 낯 뜨거운 아부라니… 사람들의 시선에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민망해졌다. 어이쿠, 이거 시뻘게진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며 뺨에 손을 댔는데 이 우크라이나 대머리 무식쟁이는 내가 좋아서 그런 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내게 한번 혼쭐이 난 뒤로 흐루쇼프는 열심히 아첨을 해 댔다. 다시 총애를 회복하려 그러나 본데 아첨도 좀 덜 티 나게 해야 좋아한다?
“또한, 인민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스탈린 동지의 초상화와 자서전을 1억 부가량 인쇄하여 가정과 학교, 관공서에 배부를….”
“아니, 복지사업에 대해서 보고서를 쓰랬더니 그런 짓이나 하고 있나?”
그게 어떻게 ‘인민 복지’가 될 수 있는 거지? 스탈린 초상화를 집에 걸어 놓으면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나…
아, 진짜 이놈이 나중에 스탈린 격하를 한다고? 흐루쇼프의 현란한 혓바닥 놀림에 박수를 치던 정치국원들은 슬슬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박수를 멈췄다. 하지만 깨갱한 흐루쇼프를 봤는지 못 봤는지, 우리의 눈새 보롱이는 좋다고 한술 더 떴다.
“그거 아주 좋은 의견인데? 아, 하는 김에 연도도 바꿉시다. 스탈린 동지의 탄생연도를 우리 소련 연도의 기원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소?”
“…보롱, 아니 보로실로프 동지!”
실제 역사에선 독소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전쟁 지도자였던 스탈린의 우상화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전쟁에서 너무 잘 막아낸 바람에 벌써부터 나에 대한 우상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온갖 곳에 스탈린 이름 석 자를 가져다 붙이질 않나… 잘 알려진 스탈린그라드 이외에도 몇 개씩이나 더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스탈리노, 스탈리나바드, 스탈리니리… 어휴.
“다 닥치시오. 후….”
정치국원들은 거친 말을 듣고 당황했는지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눈치 없는 보로실로프도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는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후, 개혁을 한다면 이럴 때 해야겠지?
“이제부터 새로이 사람의 이름을 도시에 붙이는 일은 중단하도록 하겠소. 도시는 그 도시에 사는 인민들의 것이지 무슨 봉건 영주같이 마구 사람 이름을 가져다 붙이는 곳이 아니오. 알겠소?”
“…예! 예!”
“내 이름이 붙어 있는 도시들도 개명해 나가도록 하지. 지금은 그런 데 쓸 행정비용조차 낭비이니 내버려 두겠지만 스탈린그라드는 볼고그라드, 스탈리노는 도네츠크로 바꿀 것이오. 나머지 도시들에 대해서도 적절한 이름을 추천하시오. 레닌 동지의 이름이 붙은 레닌그라드나 고리키만은 예외사항으로 하겠소. 보로실로프, 몰로토프, 칼리닌, 자네들 불만 있나?”
“아닙니다!!”
소련에는 이런 혁명가들의 이름을 딴 도시들이 여럿 있었다. 모스크바 근처에 있는 칼리닌이라던가, 동프로이센을 점령한 이후 바꾼 이름인 칼리닌그라드라던가… 몰로토프도 있었고, 보로실로프, 보로실로프그라드 같은 곳도 있었다.
불만이야 있을 수 있겠지. 자기 이름 석 자를 역사에 남기고 싶은 욕심이 누구에게인들 없겠나? 하지만 21세기 민주국가의 감성으로 이런 것은 너무 촌스러웠다.
“지도자들은 왔다가 사라지지만… 인민들은 영원하지. 우리는 언젠가 시대의 뒤편으로 물러나겠지만, 인민들과 역사가 우리를 평가할 것이네.”
“와아아아! 역시 서기장 동지이십니다!”
바로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소리였는데….